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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승호 Jun 26. 2024

<당신을 그리며>

영화 에세이 / 미술 에세이

혹시 모네를 좋아하시나요? 어느 설문에 의하면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풍으로 인상주의가 선택됐다고 합니다. 그 중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화가로는 모네가 있는데요. 아도 이 글을 읽는 분들 또한 모네를 좋아하고 계실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학창 시절 동안 스쳐 지나왔던 미술 교과서를 보면 역시 인상주의의 비중이 꽤나 있는 편이구요. 한국인의 감성적이고 역동적인 경향이 인상주의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모네의 작품 중에 어떤 걸 좋아하시나요? 제가 가장 좋아해서 레플리카로 방에 걸어놓은 그림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아를에서 고흐의 방>이구요 하나는, 모네의 <양산을 든 여인>, 그중에서 자신의 연인 카미유를 모델로 삼은 그림입니다. 오늘은 모네와 카미유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모네의 인상주의는 빛과 색채의 변화를 중심으로 세계의 진실을 이해하려는 시도였어요. 같은 장소, 공간을 반복적으로 방문해서 그 순간에 우리 머릿속에 지각되는 인상을 담으려던 기획인 거죠. 그래서 모네가 그렸던 그림들은 대부분 고정된 사물이나 건물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성당이나 건초더미 같은 거요. 그런데 모네가 이런 방향에 맞지 않는 대상을 하나 그리기 시작했는데, 바로 사랑하는 연인 카미유입니다. 그래서 모네가 카미유를 담은 그림들을 볼 때면, 인상주의자면서 인상주의에서 일탈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모네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인상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았어요. 인상주의의 창조자이자 인상주의를 마지막까지 지켰던 파수꾼 같은 사람인 거죠. 그런데 저는 그런 모네가 그린 카미유의 그림을 볼 때면 작고 소소하면서도 깊은 감동을 느낍니다. 사랑이 자신의 정체성인 화풍도 신경 쓰지 않게 만들었으니까요. 이 점에서 모네에게 카미유는 단순한 연인 그 이상 같기도 하네요. 


그런 모네가 그렸던 연작 중에는 카미유의 죽음과 관련된 것이 있습니다. 모네는 카미유가 죽어가는 과정을 연작으로 화폭에 담았어요. 그녀가 죽어가기 직전까지 그녀를 캔버스에 담았죠. 처음 모네 원화전에서 이 그림을 보고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당장 죽어가는데 그림을 그리고 있다니. 이런 미친..! 이거 완전 사이코패스 아니야? 그런데 뭔가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꺼림칙한 거예요. 그때부터 모네와 카미유는 제 삶의 화두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제가 한가람미술관에서 모네 원화전을 봤던 게 2015년이니까 이제 9년이 됐네요. 수년 동안 모네와 카미유에 관해 생각했는데, 이제는 모네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면서도 싫어하는 앙드레 바쟁이라는 유명한 영화 비평가가 있는데요. 이 사람은 회화의 기능을 이렇게 설명해요. “회화란 필멸자들이 존재의 절멸에 도전하려는 시도이다.” 말하자면, 우리 인간은 모두 죽잖아요. 아무리 오래 살아봤자 결국 죽고, 무덤을 만들어 봤자 무덤도 언젠가 없어지겠죠. 하지만, 회화는 이걸 지연시킨다는 거예요. 사람이 죽어도 초상화나 인물화로 그 사람의 생과 기억을 연장할 수 있는 거죠. 우리가 그들을 보고,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니까요. 픽사의 애니메이션 영화 <코코>에서는 사람이 죽고 나면 저승에 간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저승에서 사람은 한 번 더 죽어요. 사람들에게 모두 잊혀 졌을 때지요. 그때의 죽음은 어떤 물리적 죽음이라기보다는, 존재 자체가 유령으로도 남을 수 없게 소멸하는 거예요. 결국에 <코코>에서 사진을 통해 대상을 기억하려는 것, 회화를 통해 대상을 기억하려는 건,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우리의 열렬한 반항심 아닐까요? 그러니까 아마도 모네가 멈추지 않고 카미유를 화폭에 처절하게도 담아내려 했던 건, 사라져가는 사랑의 순간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려는 절절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한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요즘에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앞서 말했던 영화 비평가 앙드레 바쟁은 또 이렇게 이야기해요. “회화와 사진 예술의 차이점은, 회화는 대상을 불완전하게 재현하지만, 사진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죽음을 극복하려는 인간 노력의 진화이다.” 그 점에서는 사진이 회화에 비해 발달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그럴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왜냐면, 회화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담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그 아름다움이 극대화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사진은 대상을 카메라가 지각한 방식으로 담습니다. 그 계획을 인간이 구성하는 거구요. 하지만,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은 내가 상대방을 지각한 방식으로 화폭에 담습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당신의 실재가 아니라 내가 열렬한 사랑을 담아 해석한 당신의 모습인 거죠. 결국에 한 편의 그림이라고 하는 건 당신이 아니라, [너와 나]가 되는 거예요. 그 점에서, 모네가 화폭에 강박적으로 기록하려고 했던 건, 카미유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저는 감히 이렇게 생각해 보고 싶어요. 모네가 기록하려고 했던 건 그녀가 아니라, [그녀와 자신이 사랑을 교감하던 그 순간]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면 그림이라고 하는 건 전적으로 나의 것도 아니고 그려지는 대상의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것인 거죠.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영화 <만추>는 탕웨이가 연기한 애나가 현빈이 연기한 훈을 어느 카페에서 기다리는 장면으로 끝나는데요. 저는 이 장면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첫 마디로 무슨 말을 할지 어색하게 연습해 보고 있는 애나의 표정은 감히 제가 사용하는 얄궂은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 중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순간의 얼굴 아닐까요? 그러니, 다음과 같은 말로 글을 마쳐보려 합니다. 


사랑의 기간 중 가장 안온하고 애정 어린 순간은 당신을 머리에 그려 볼 때이다.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 당신을 기다리는 길, 다가오는 만남의 시간을 맞이하며 어렴풋이 당신을 그리는 그 순간만은 누구도 틈입할 수 없는 당신과 나만의 영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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