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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승호 Aug 30. 2024

미와 고고학적 발굴

"이상에는 여러 이름이 있으며, 그중 하나가 바로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은 황홀경(Ecstasy)이다. 그것은 배고픔만큼 단순하며, 그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장미의 향기와 같아서 맡을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아름다움, 나아가 예술과 관련 없는 예술 비평은 지루한 것이다." - W. 서머싯 몸, 《케이크와 맥주》


서머싯 몸은 아름다움은 느끼는 것이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말한다. 그 말에 일면 동의하기는 하지만 만약, 미적 경험이 그가 말했던 것처럼 엑스터시 그 자체라면, 그것을 해명하고자 하는 갈망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이를테면, 고흐의 <아를에서의 방>을 보고 지독하고 뾰족한 것이 끌개가 되어 심부를 긁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 뷔페의 유년기 그림들을 보면서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냥 주저앉고 싶은 기분이 들 때, 그런 온몸을 에워싸는 혼란을 느낄 때 반사적으로 의미를 찾으려는 마음이 추동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물론 그때마다 내가 알게 된 건, 지금 느끼는 것을 해명할 만큼의 충분한 말과 문장을 내가 보유하지 못했다는 사실뿐이었지만.


내가 느끼는 게 무엇인지를 적확히 감지하고, 이를 은근하면서도 바르게 호명하고 싶었다. 그런 언어를 찾기 위해 이것저것을 읽었다. 미에 대한 것이든, 철학에 대한 것이든,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에 관한 것이든. 그 질료들을 안경 삼아 마음을 돌이키다 보면 바닷가에 던진 통발에 우연히 돌고래가 잡히는 것 마냥 어떤 말이, 어떤 문장이 마술적으로 포획될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말과 문장을 잘 옮겨 담아 이리저리 점토처럼 뭉개고 다시 세우다 보면 때때로 ‘아’ 하는 순간이 올 때도 있었다. 물론 그 느낌은 곧 흩어지는 것이었지만, 온몸에 흐르는 정전기처럼 불현듯 찾아오는 그 순간을 감지할 때만큼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정확하게 읽혀지는 것 같아서 그게 좋았다.


느낌이 선명해질 때면, 시선이 이 경험을 유발한 대상을 향하곤 했다. 어디선가 이를 대상의 아름다움을 밝히는 일이라 하더라. 예를 들면, 고흐의 그림에서 어떤 부분이 내 심부를 긁는 것 같은 느낌을 들게 만들었는지 알아보는 일. <아를에서의 방>은 처음 볼 때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 같은 그림의 중심이 텅 비어있어 어떤 고독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 방 안의 사물들을 고흐가 하나하나 섬세히 배치했다는 사실, 아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빈방이 설레는 미래를 고대하고 있는 추상적 자화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즉, 방의 구성물들은 고흐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며 방 안에 사람을 그려 넣지 않은 것은 아직 오지 않은 것들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텅 빈 방의 느낌은 또 다른 기시감을 유발한다. 가령, 아를에서 고갱과의 갈등으로 관계가 파탄나고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낸, 아니 결국 견뎌내지 못한 고흐의 삶을 떠올리면, 방 중심부의 공백이 설레임을 집어삼킨 고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그림을 보면, 그림이 그려졌던 순간의 이미지와 미래의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충돌하게 되고, 그 결과 이미지는 추락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찌그러진 몰락의 이미지는 이내 끌개가 되어 골수를 후벼파듯 보는 이를 고통케 한다.


내가 느꼈던 경험이 어디서 유발됐는지 그 출처를 이해하면, 이해할 수 없는 신탁을 받고 몽글거리는 감정만을 안고 살아가다 어느 날 불현듯 신탁의 실현을 목도하게 되는 범부처럼, 희미하지만 깊은 감동을 느끼곤 한다. 아, 이렇게 됐던 거구나. 이게 나에게 이렇게 다가왔던 거구나.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 이 미적 경험의 본질은 무엇일까. 다시 말해, 미노타우르스의 미궁에서 테세우스가 의지했던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처럼, 나와 대상 둘 사이를 연결하여 강렬한 경험에 이르도록 하는 이 단단한 끈은 대체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아름다움이나 미에 대해 말할 때, 아름답다는 말은 곧 이쁘다는 말로 해석되며, 그림이 아름답다는 말은 소묘가 매끄럽거나, 색감이 화려하거나, 분위기가 감상적임을 의미하곤 한다. 즉, 이때 사람들이 미적 경험에 이르도록 하는 것은 대상의 심미성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 끈은 좀 더 넓은 것이 된다. 가령,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볼 때 엄격한 대칭 구도와 엔틱하면서도 진한 색감의 회화적 미장센을 통해 심미적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결핍된 인물들이 엉거주춤하면서도 결국 무너지지 않고 어떻게든 생을 이어나도록 허락하는 영화의 비관적 따뜻함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한다. 이때의 아름다움들은 감각적 수준과 성찰적 수준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 나와 대상을 연결하는 끈은 그것의 특성이 심미적이냐 성찰적이냐 하는 범주 이전의 것, 즉 대상이 아름답게 느껴질 만큼 나에게 감정적 파문을 일으키는가 하는 것이다.


파문이 나와 대상을 이어내는 실타래가 된다면, 미적 경험은 단순히 예술가가 만들어 낸 작품에서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체현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누군가 커피를 마실 때, 커피를 흘릴까봐 잔을 들지 않고 조심스레 입을 먼저 가져다 대는 것, 질문 하나를 할 때 가벼이 하지 않고 온 에너지를 모아 회심의 일격처럼 하는 것은, 행위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전심을 다한다는 점에서 아름답다. 누군가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 다른 사람이 좀 더 깨끗한 상태의 책을 볼 수 있도록 매대 맨 위에 있는 제일 먼지가 탄 책을 꺼내 계산대로 가져가는 모습은, 타인의 시간을 조금 먼저 살아보고 그들의 경험을 헤아려 본다는 점에서 아름답다. 누군가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 두 손을 가슴 위에 모으고 눈동자의 광채를 발산하는 모습은, 두 눈이 애정이라는 별을 담지한 우주가 된다는 점에서 아름답다.


이처럼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일은 나와 당신을 이어주는 파문, 즉 연(緣)을 찾는 일인 것이며, 그 연의 경위를 밝히는 일은 내 안에 퇴적된 당신의 흔적을 추적한다는 점에서 고고학적 발굴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 내가 상세히 감각할 수만 있다면 적어도 미적 경험에 있어서 당신이라는 세계는 무한한 유적지가 되는 것이며, 그곳에는 아정한 행복만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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