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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승호 Sep 19. 2024

슬프게 공부해야만 해요

신형철 작가의 사유를 따라가며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프롤로그에서 신형철 선생은 우리는 타인의 슬픔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슬픔을 공부하는 일은 ‘슬픈’ 공부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 하나. 정말 타인의 슬픔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을까요? 우리 인간의 거울 뉴런은 타인의 고통을 감지했을 때 이를 유사하게 느끼도록 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이 거울 뉴런은 학습을 할수록 점점 정교해지는데요. 그렇다면 슬픔을 공부하다 보면 점점 타인의 슬픔과 근사(近似)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생리적으로는 똑같은 슬픔에 도달할 수도 있겠습니다. 문제는 모든 인간이 각자의 서사를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서사와 ‘너’의 서사 사이에는 근원적인 결락이 있다는 것. 그 결락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같은 슬픔도 다르게 해석한다는 것. 슬픔을 공부하는 일이 슬퍼지는 원인은 이러한 인간의 태생적 결함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이 모두 해소되지는 않습니다.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느끼는 감각에 가 닿으려는 이 정성 어린 태도를 굳이 슬픈 것으로 여길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과정을 다정이 담긴 온기 어린 공부로 여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초점을 바꾸어 보려고 합니다. 혹시 저 말의 본의는 슬픔을 공부하는 일을 ‘슬픈 공부로 여겨야만 한다’는 어떤 당위적인 메세지 아닐까요? 그 답을 신형철 선생의 명판 『몰락의 에티카』에서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몰락의 에티카』에서 신형철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서정시의 문제란 자연이나 타인을 대상물로 삼아서 자신의 사유를 하나의 일관된 틀로 전개하는 데 있다고. 이런 서정시의 문법이란 지극히 화자 중심인 것 같다고. 서정시의 화자는 자신이 느낄 수 있는 것 혹은 자신이 느끼고 싶은 걸 대상에게서 발견할 뿐이라고. 거기에 알 수 없는 타자의 세계란 배제되는 것이라고. 만약 그런 문학만 계속 쓰여진다면 우리는 나르시즘적인 세계에 갇히게 되는 것이고 타자의 진실이라는 나머지 반쪽은 볼 수 없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문학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하면, 첫째, 진실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사람들이 나르시즘적 주체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 밖에 있는 세계의 사소하지만 중대한 진실을 알 수 있도록, 타자의 아픔, 상처, 고통을 ‘나’의 앞에 소환하여 면대면 만남을 주선하는 것. 그 속에 문학의 본령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진실에 대한 비관론입니다. 문학이 우리 앞에 타자의 세계를 불러들이더라도 만약 사람들이 그 타자를 ‘나’의 관점으로 도식화하여 이해한다면 이건 대상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왜상과 만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타자라는 진실과 만날 때 해야 하는 윤리적 선택은, 영원히 이 타자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비관론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타자를 온전히 해명할 수 없다는 그 슬픔 속에서 출현하는 어떤 기적적 교류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의 평론집의 이름이 왜 『몰락의 에티카』인지 조금 이해되네요. 이 제목을 조금 고쳐서 다시 써보면 어떨까요. 당신과 제대로 만나기 위해 나의 관점이라는 두 눈을 찌르고 기꺼이 주저앉는 슬픈 자의 윤리학이라고요.



이런 윤리학을 등에 이고 신형철 선생은 자신의 소망을 『느낌의 공동체』에 담고 있습니다. 『느낌의 공동체』는 원래 『몰락의 에티카』에 한 절로 담겨있던 글입니다. 그 글이 하나의 산문집으로 발전된 것이지요. 여기서 신형철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종류를 알고 네가 하루에 몇 시간을 자야 개운함을 느끼는지 알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인가? 나는 네가 커피향을 맡을 때 너를 천천히 물들이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일곱 시간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네 몸을 감싸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네 귀에 가닿을 때의 그 느낌을 모른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그러나 어쩌면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의 울림일 그것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대체로 타자다. 나는 그저 ‘나’라는 느낌. 너는 그냥 ‘너’라는 느낌.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일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그러니까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사랑은 능력이다.



『느낌의 공동체』 서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몰락의 에티카』에 실려 있는 원문과 한 가지 차이가 있다는 것인데, 느낌의 세계에서 만나는 방법론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원문에 있던 방법론이 철학자 질 들뢰즈의 이론에 근거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신형철 선생이 책에 빼놓은 그 구절을 굳이 억지로 욱여 넣을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그 방법에 다가가 보면 어떨까요? 아래 윤동주의 시 한편을 읽어 보면 좋겠습니다.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이 시에서 화자는 젊은 여자를 바라봅니다. 그러다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한 가지 부분이 인상 깊습니다. 앞에 다른 여자 환자가 등장했고 자신의 아픔을 병치시켰는데, 서정시에서 응당 나타나야 할 여자의 아픔에 대한 해석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나는 성내서는 안된다’며 자신을 조금 다그치고 있네요.


그러던 중 여자는 자리를 떠납니다. 그때 화자는 여자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라다 황급히 자신의 건강도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왜 뭔가를 잘못했다는 듯이 이렇게 황급히 말을 바꾸었을까요? 아마 그에게 ‘여자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은 주체-객체 관계에 근거한 발화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얼른 내 건강도 회복되기를 바란 것이지요. 너와 내가 함께 아프고 너와 내가 함께 나아졌으면 좋겠다. 여기 주체-주체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화자는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봅니’다. 어떤 이를 해석하지 않고, 자신의 아픔을 과장하지 않으며, 상대를 동정하지 않는 마음으로 그의 통감을 잠시나마 같이 느껴보려는 것. 그 자리에 느낌의 기적적인 교류가 숨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타자와 진실하게 만나기 위해서는 ‘너’를 이해할 수 있다는 ‘나’라는 오만을 내려 놓아야 한다고(『몰락의 에티카』). 그러므로 해명할 수 없는 것을 향한 그 공부는 슬픈 것이 되어야만 한다고(『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그럼에도 나는 너를 정확히 사랑하려는 실험들을 계속할 거라고(『정확한 사랑의 실험』). 때때로 우리는 기적적인 느낌의 교류에 잠시 성공할지도 모른다고(『느낌의 공동체』). 그렇게 어정거리며 손을 맞잡는 우리의 이야기가 쌓여 곧 역사가 될 거라고( 『인생의 역사』).


이렇게 짧은 글로 뭔가를 설명하려 하는 것이 얼마나 부박한 일인지는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흩어진 느낌들을 몇 자 기워내 적어봅니다. 우리 모두가 때때로 느낌의 영역에서 만나기를 소원하면서.


* 참고한 글

  - 『몰락의 에티카』, 2008.

  - 『느낌의 공동체』, 2011.

  - 『정확한 사랑의 실험』, 2014.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2018.

  - 『인생의 역사』, 2022.

  - 그 외 계간 『문학동네』 지면 게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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