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뒤에 숨은 진짜 내 마음
"웅~~"
사무실 책상 위에 있던 핸드폰이 울린다
업무 처리 중 고개를 돌려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니 아들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무슨 일이지?'
"엄마! 카드 잃어버렸어."
"어쩌다가?"
"모르겠어. 보니까 없어. 기숙사에 있나?"
"기숙사 가서 잘 찾아봐. 분실신고 먼저 하고..."
"거래 정지는 해뒀어."
타지에서 대학을 다니는 아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나에게 전화를 한다.
카드를 잃어버렸다고, 차가 너무 막힌다고, 속이 안 좋다고...
작은 이슈에서 큰 이슈까지 전화 내용은 다양하다.
멀리 떨어져 지내는 아들의 신변을 알 수 있어서 감사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그런 전화 때문에 숨통이 막힌다.
'오늘 무슨 옷 입고 가지?' 하고 물어보는 날은
나이가 몇인데 이런 것까지 엄마에게 물어보나 싶어서 걱정스럽기도 하고,
'속이 안 좋아!' 하고 전화한 날은
옆에서 챙겨줄 수 없어 안쓰럽기도 하다.
'버스가 너무 막혀!' 하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전화하는 날은
'그래서 엄마가 어쩌라고'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내려간다.
아들은 마마보이도 아니고 혼자 결정 내리는 것을 어려워하지도 않는다.
이제 갓 스무 살, 부모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의 심각한 문제는 겪지 않았고
대부분의 상황을 스스로 잘 해결한다.
가끔은 나와 이야기 나누며 스스로 답을 찾아가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잘 들어주기만 하면 된다.
공감의 말과 적절한 조언을 섞어가며 경청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사소한 일상의 조각들까지 나에게 일일이 늘어놓는 아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 아이가 언제쯤 어른스러워질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나는 왜 아들이 볼멘소리를 하거나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일 때마다 안절부절못할까?
'이제 나잇값 좀 해라', '네가 좀 알아서 해라' 하고 날카로운 말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오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이제 막 부모 곁을 떠나 혼자 생활하면서 느끼는 불안함이 오죽할까.
그 불안함에서 오는 푸념이겠지.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나만의 내면 여행을 떠난다.
돌아보니, 내가 아들의 불평 섞인 목소리를 견디기 힘들어했던 건 아들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였다.
아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내가 해결해줘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잘 처리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수습할 수 없는 문제였기에
'아들이 문제다'라고 스스로를 속였다.
생후 18개월, 아직 사랑받을 나이에 동생이 생긴 첫째에 대한 미안함.
연년생을 키우며 내 마음조차 헤아려볼 여유가 없었기에 고스란히 상처받았을 아이에 대한 죄책감.
그 미안함과 죄책감은 어느새 아들에게 잘해줘야 한다는 강박으로 변했고
나의 한계를 초월한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어 다시금 아들을 탓하고 있었다.
해결되지 않은 나의 감정들은 이렇게 또 현재의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아들에 대한 걱정은, 결국 죄책감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불편한 내 마음을 풀어내고 감정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끝과 시작을 알 수 없던 꼬인 실타래가 조금씩 정리되어 단단한 실뭉치가 된 듯하다.
어쩌면 어른이 되는 건, 나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
이제,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
각자의 단단한 실뭉치를 연결하여, 하나의 멋진 무늬를 만들어 가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