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자 Feb 06. 2024

아빠, 저 이 사람이랑 계속 만나도 될까요?

연애, 부모님, 그리고 조급함에 대하여

 애인과 1년을 채 만나지 않은 어느 날, 고민이 생겼다. 

우리가 만난 날들의 8할은 싸운 날이라는 것. 과연 이대로 만나도 될까- 하는 치기 어린 고민이 생겼다. 나는 결혼을 꿈꾸는 사람이었고, 내 나이는 눈 깜짝할 새에 2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다른 어른이 보기엔 코웃음 칠 나이지만 내게는 사뭇 중요한 고민이었다. 주변 환경이 중요하다고, 내 주변은 벌써 20살 때 만나 2년, 3년은 우스울 만큼 함께 하고 있는 커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정착하지 못하는 내 모습에 더욱 초조해졌다. 나만 아직 누군가를 진득이 만날 준비가 안 된 사람인 것 같아서. 혹시나 내가 잘 맞지 않는 인연을 억지로 붙잡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다. 또 불안이 도졌다.


우리는 그만큼 잘 싸우지만 화해도 곧잘 하는 연인이었다.

둘 다 감정적인 사람인 데다 예민한 기질이 어디 가지 않고 서로를 향하기 일쑤였다. 애인은 싸우면 동굴로 숨어버렸고, 나는 늘 그를 동굴 밖으로 꺼내기 바빴다. 도저히 안 되는 날이면 엉엉 울면서 서로를 향해 모진 말을 내뱉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또 얼굴 보고 싶어 하고. 얼굴만 보면 모든 게 눈 녹 듯 풀려서 어영부영 넘어가는 날도 많았다. 감정을 가라앉히고서야 가려졌던 이성적인 사고가 팽팽 돌아갔고, 뒤늦은 사과를 주고받으며 다정한 대화를 나눴다.

 어느 날은 정말 크게 다퉜다. 내가 길거리 한복판에서 그렇게 울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처음 알았다. 유치하기 짝도 없다. 서로가 감정을 쏟아내며 이해만 바라다 집으로 돌아갔다. 냉전은 며칠간 이어졌다. 그리고 늘 그랬듯, 우리는 다시 서로를 찾아갔다. 사과를 할 줄 모를 때 쓸 수신호도 정하고, 서툰 마음을 정돈할 서로의 시간을 허락해 주기로 했다. 물론 이는 허상적인 약속일 때가 더 많았지만 그래도 노력했다. 놀 때는 정말 이 사람만큼 재미있는 사람도 없었다. 연인이라기보다 친구처럼 장난칠 때가 더 많았는데, 어디 가서 말하기도 부끄러운 티키타카를 주고받곤 했다.

 그만큼 우리는 서로를 원했지만 부딪히는 것도 많았다. 한 마디로, 우리는 '잘 싸우는 법'을 몰랐고, 지금도 잘 모른다.




 우리 집에서 그나마 중립적이고 둥글한 의견을 낼 줄 아시는 분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평화주의자'다. 싸움을 정말 싫어하고, 그만큼 피로를 빠르게 느끼면서도 좋게 웃으며 넘어가려는 분이다. 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오던 건 아니었다. 약속을 나갈 때나 종종 말씀드린 게 전부다.

 어느 날 아침. 나도 모르게 입술이 떨어졌다.


"아버지, 저 이 사람이랑 계속 만나도 될까요?

너무 많이 싸워요. 어른의 시선에서 봐주세요."

우리의 잦은 다툼과 서로의 마음고생에 대해, 서로의 예민함과 감정적인 성격에 대해 말씀드렸다. 보통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지 않나. 아버지의 팔은 굽지 않고 평평히 펼쳐져 있었다.


"네가 걔 단점 보듯이 걔도 네 단점을 봐. 너도 모르는 네 단점이 있다고.

너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말고 서로 잘해. 결혼은 서른 살 넘어서 생각해도 안 늦어.

꼭 결혼하란 말도 안 해. 요즘은 혼자 사는 사람도 많으니까.

그러니까 뭐든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어. 천천히 해. 뭐가 됐든 천천히 해."


 만사가 조급해서 덤벙대는 성격인 나를 잘 아시는 분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것도 도전했다가, 저것도 찔러봤다 하는 성격을 봐오셔서 그런 것일까. '천천히'라는 말을 강조하셨다. 재촉하지 않으니 천천히 생각하라고 하셨다. 주변의 장기 커플들을 보며 발에 붙었던 불이 나만의 방식으로 식어갔다. 꼭 완벽한 '내 편'에서의 조언도 아니었지만 내게 필요한 말들을 들었다. 내 편이 아닌 것 같던 아버지는 너무 온전히 '내 편'이라 되려 내가 등을 돌리고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릴 땐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이 떠나가라 코를 고는 아버지를, 고봉밥을 두 그릇씩 드시는 아버지를, 분명 출발도 않으셨으면서 출발해 벌써 학교 앞이라 과장하는 아버지를, 무슨 일이든 화 한 번 내지 않고 웃으며 넘어가려는 아버지를, 아무리 불편해도 얼굴 붉히지 말란 아버지를, 새 옷 하나 사 입지 않으시던 아버지를, 누구보다 어머니께 효도하란 아버지를, 가벼운 고민은 알아서 하란 아버지를, 잔소리 한 번 않다가도 한 번씩 꼭 훈육하시던 아버지를. 때론 치기 어린 마음에 미운 날도 있었다.

 누군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저 어딘가의 동네 아저씨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난 아버지와 같이 산지 이십여 년이 넘어가고서야 이제야 알아간다. 그 누구보다 내 편인 아버지란 걸. 그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고 계셨다는 걸 그날의 대화를 통해 느꼈다.






 조급해하지 말고 편안히 마음먹을 이유이자 명분, 그리고 그런 나의 뒤를 받쳐주고 있는 사람이 있단 건 감사한 일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뒤를 내가 조금이나마 받쳐주는 마음으로, 두서없을 글을 마친다.

너무 조급하게 살지 말자. 조금 속도를 늦춰도 기다려줄 사람은 충분히 있다. 당신의 조급함이 지금의 당신을 포함한 소중한 누군가에게까지 튀지 않도록 하자. 잘 보듬어서 나도 누군가에게, 꼭 우리 아버지처럼 그 따뜻함을 전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너무 조급하게 살지 말자.

작가의 이전글 지난날을 후회보다 추억하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