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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Apr 19. 2024

파김치를 놔두고 다이어트를 할 순 없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이름은 영숙 씨. 지하철 광고판에서 이 문구를 본 순간, 나는 두 사람이 떠올랐다. 한 분은 브런치 작가님이고, 한 분은 우리 이모다. 광고판을 사진으로 찍어 이모한테 보냈다. 오랜만에 연락한 나를 반기며 이모가 "파김치 해줄까?"라고 물었다. 생각만 해도 침이 꼴깍 넘어갔다.



우리 이모는 순댓국집을 한다. 이모네 순댓국집은 순댓국도 맛있지만 직접 담그는 겉절이와 깍두기가 정말 맛있다. 겉절이와 깍두기 만드는 솜씨로 파김치를 만든다면 맛이 없을 수가 없다.


마침 주말에 아빠 기일이라 가족들과 산소에 갔다가 순댓국을 먹으러 갔다. 이모네 순댓국집은 아빠 산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순댓국을 배불리 먹고 앉아있으니, 이모부가 느린 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모부는 허구한 날 술만 먹고 혼자만 즐겁게 살다가 몇 해 전에 뇌졸중으로 쓰려졌다. 이모부는 쓰러진 직후에는 잠잠하더니 몸이 조금 회복되자 약을 제대로 먹지 않고 술을 또 입에 댔다. 원래도 말투가 거칠었던 이모부는 뇌졸중과 함께 온 치매증상으로 이웃들에게 폭언을 내뱉어 몇 차례 소동이 일어났다. 주변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이모는 경찰의 권유에 따라 이모부를 정신병동에 입원시켰다.


이모부가 이모에게 날마다 전화를 걸어 집에 가고 싶다고 울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은 다시 데려오면 안 된다고 했지만 마음 약한 이모는 이모부를 집으로 데려왔다. 그 뒤로 이모부는 약을 꼬박꼬박 잘 먹고 순한 어린애가 되었다. 


이모는 이모부를 어린아이 보듯이 보살핀다. 식사를 할 때면 숟가락에 반찬을 놓아주고 입가를 닦아준다. 같이 여행도 자주 다닌다. 이모는 이모부가 건강할 때보다 지금이 좋다고 한다. 건강을 잃으면 다 잃은 거라고 하던데, 이모부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요즘 몸이 피곤한 게 운동을 시작해서 그런가 했는데, 잘 생각해 보니 살이 쪄서 그런 거 같다. 다이어트를 결심한 시점인데, 이모가 해 준 파김치가 나를 유혹한다. 삼겹살에 파김치, 짜장라면에 파김치, 흰쌀밥에 파김치! 와우, 파김치는 정말 다이어트 최고의 적이다. 다이어트는 파김치가 다 떨어지면 시작하기로 했다.



저녁으로 파김치에 삼겹살을 먹고 졸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야근을 한 남편이 밤 11시쯤 들어왔다.

"왔어?"

나는 누운 채로 남편에게 인사를 했다.

"나 요즘 너무 피곤해서 정신을 못 차리겠어."

나는 일어나고 싶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어쩔 수 없다는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눈을 감았다.


잠시 후에 주방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남편이 짜장라면을 끓였다.

"이거 파김치야?"

남편이 김치 냉장고 안에서 조금 남은 파김치 통을 찾아들고 물었다.

"아니, 평소에는 눈앞에 썰어놓은 김치도 못 찾아 먹던 인간이 어떻게 그걸 찾아낸 거야?"라고 말은 못 하고,

"어, 그거 이모가 해준 거야. 맛있어."


혼자 밥 먹는 걸 싫어하는 남편이 기어이 나를 일으켜 식탁 앞에 앉혀놓는다. 나는 남편이 짜장라면과 파김치 먹는 모습을 본다. 나는 아껴 먹느라 한 번에 한가닥씩 집어먹었는데, 남편은 한 뭉텅이씩 집어먹는다. 조금씩 먹어줬으면 좋겠다는 말은 못 하고,

"아니, 이 밤에 왜 라면을 먹어? 그거 다 독인 거 몰라? 그러다 쓰러져."

"나 쓰러지면 갔다 버릴 거야?"

이모부를 정신병동에 입원시켰다고 했을 때, 남편은 이모부를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이모부가 불쌍하다고 했었다. 어떻게 가족을 버릴 수가 있냐면서. 

"안 버려. 하지만 이모처럼 할 자신은 없으니까 나한테 구박받고 싶지 않으면 야식 그만 먹어."


내 말은 들은 척 만 척, 라면을 다 먹은 남편이 밥을 퍼온다. 파김치를 끝장내기 위해서다. 신나게 먹더니 곧바로 후회를 한다.

"지금 먹으면 속 쓰린데. 왜 나 안 말렸어?"

"말린다고 내 말 들었냐, 언제."


남편이 밤에 이렇게 폭식하는 모습은 때로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가끔 남편하고 오랜 시간 연락이 안 되면 '이 사람 어디서 쓰러진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곤 한다. 가족을 내팽개치고 술만 마시러 다닌 게 아니라 야근에 회식에 스트레스받아서 먹은 것뿐이라고 해서 혈관이 자비를 베풀지는 않을 테니까.  


아쉽지만 다행히 파김치가 다 떨어졌으니 내일부터 다이어트를 해야겠다. 집안에 라면부터 치워야지... 먹어... 치워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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