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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Sep 04. 2024

골프공에 맞지 않을 세 번의 기회를 날렸다

그날,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 내겐 세 번의 기회가 있었다.


<첫 번째 기회>


"나 오늘 연습장 쉴래. 팔꿈치가 쿡쿡 쑤셔."

"그래 그동안 너무 열심히 했지. 며칠 쉬어."


며칠 전에 스크린 골프장에 간다고 열심히 연습을 했다. 스크린 골프장에서 연습 때보다 공을 더 못 맞추는 게 열받아서 죽어라 세게 쳤다. 그리고 다음날에 난 왜 이것밖에 못하는지 속상해서 또 열심히 쳤다.


그랬더니 팔꿈치가 아팠다. 남편한테 며칠 쉬겠다고 말해놓고 연습장을 갔다. 딱 50분만 살살 치고 와야지. 간신히 잡은 감이 떨어져 나갈까 불안했던 나는 습관처럼, 중독자처럼 그렇게 연습장으로 향했다.



<두 번째 기회>


프로님을 만나면 또 어디가 잘못됐다고 잔소리를 하시겠지. 오늘은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 일부러 프로님 없는 점심시간에 연습장을 갔다. 타석이 많이 비어있었다. 나는 그중에 굳이 두 번째 타석을 골랐다. 첫 번째 타석도 비어있었는데, 그 타석에는 모니터가 켜져 있었다. 굳이 두 번째 타석으로 가서 꺼져있던 모니터를 켰다.


40분쯤 연습하고 있을 때, 비었던 내 앞자리 타석에 어떤 남자분이 왔다. 그분을 힐끔 보며 생각했다. 별로 잘 치는 분은 아니군... 얼마 전 스크린 골프장에서 스크린을 찢어먹을 듯 퍽퍽 소리 나게 공을 날리던 남편을 떠올렸다.



<세 번째 기회>


아까 밥 할 때는 아팠던 팔이 공을 칠 때는 안 아픈 게 신기하다. 50분만 살살 치고 가려고 했는데, 시간은 이미 한 시간이 다 돼가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샷을 날리고 퇴장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준비 자세를 취했다. 골프채를 손에 쥐고 허리를 숙이고 눈은 골프공을 노려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때 그 일이 일어났다.


그날 나는 완벽한 샷을 날리는 대신 누군가의 엉터리 샷에 귀를 맞았고, 그 순간 어쩌면 이것은 내가 선택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세 번의 기회가 있었다. 골프연습장에 가지 않을 기회, 두 번째 타석을 선택하지 않을 기회, 마음먹은 대로 딱 50분만 치고 갈 기회...


귀에서 삐 소리가 나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물이 났다. 앞타석 남자분과 뒷타석 여자분이 다가와 뭐라고 말을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한참을 흐느끼며 주저앉아 있다가 진정하고 일어나 귀를 만지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연습장 위에 이비인후과가 있으니 가보자고, 뒷타석 여자분이 말했다. 그분은 앞타석 남자분이 남편이라며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병원에서 접수를 하려는데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한다. 내 귀에서는 아직 피가 흐르는 응급 상황인데... 신분증 확인이 먼저라고 한다. 신분증이 없다고 하니 모바일 건강보험증을 다운받아 보여달라고 해서, 정신줄을 겨우겨우 부여잡고 해냈다.


의사 선생님께서 내 귀를 살펴보더니 안쪽은 괜찮고, 겉에만 살짝 찢어졌는데 꿰맬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찢어진 곳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내고 소독솜으로 막고 밴드를 붙였다. 내가 느끼기에도 귀에 열감이 있기는 하지만 속에 이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크게 다친 게 아니라고 하니 나는 마음에 여유가 생겼는데, 같이 온 여자분이 거듭 미안하다고 하셨다. 사실 나도 공이 여기저기 튈 때가 많다고, 일부러 그런 거 아니고 크게 다친 거 아니니 괜찮다고, 오늘 내가 운이 조금 나빴을 뿐이었다고, 아니 운이 좋았던 걸까요? 얼굴이나 머리에 맞았으면 큰일 날 뻔했잖아요,라고 말했다.


이 골프연습장은 타석 간 간격, 타석과 스크린의 거리가 좁은 편이다. 그래서 나 같은 초보자의 공이 앞뒤로 튀는 경우가 많다. 어제 유난히 내 공이 앞사람 쪽으로 많이 튀었다. 튀어간 공은 맞으면 살짝 기분 나쁠 정도이지 다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 공에 저 앞사람이 맞아 다치면 누구 책임이지? 내 책임인가? 골프장 책임인가?


내 질문에 답을 이렇게 내려주시나요... 네가 직접 알아보라고.



- 이 글은 그날(일주일 전) 집에 와서 바로 쓴 글입니다. 제가 공을 맞은 자세한 상황과 뒷이야기를 정리해서 오마이뉴스에 기사로 송고했어요. 기사로 채택된 이후에 브런치에도 발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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