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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Oct 20. 2024

나이스샷이 아니어도 괜찮아

골린이의 첫 라운드

"자기야, 10월 4일에 머리 올리자."

"어? 벌써? 아직 자신 없는데"

"공 치러 간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놀러 간다고 생각해."

"그래. 가 보지 뭐."


얼떨결에 첫 라운드 일정이 잡혔다. 골프에 입문하고 처음 필드에 나가는 것을 두고 골프 치는 사람들은 '머리 올린다'라고 표현한다. 원래 머리 올린다는 말은 국어사전에는 '여자가 시집을 가다'라고 나와 있지만, 기생이 첫 손님을 받고 정식 기생이 됐다는 의미의 은어로도 쓰였던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표현이 썩 좋게 들리지 않는다.


어쨌거나 날짜를 정하고 나니 마음이 바빠졌다. 그동안 연습장을 다니면서는 편한 바지에 티셔츠 차림도 괜찮았으나 필드에 나가려면 골프복 한 벌쯤은 있어야 했다. 아웃렛 매장에 가서 하얀색 스커트와 알록달록한 색상의 글씨가 들어간 검정 니트를 샀다. 너무 튀지 않으면서 세일까지 해서 딱 마음에 들었다.


옷을 사놓고 나니 더 부담이 됐다. 옷만 예쁘면 뭘 해, 공을 제대로 맞출 수나 있을까... 지금이라도 취소하자고 해야 하나... 시간이 갈수록 내 실력이 뒷걸음질 치는 느낌이었다. 두 시간쯤 연습해서 이제 좀 잘 되나 싶으면 다음 날 또 안 되고, 그러면 또 동영상을 보고 팁을 얻어서 자세를 조금 바꿔서 연습하고... 되다 안되다를 반복하면서 제자리걸음일지라도 내가 믿을 건 열심히 연습하는 것뿐이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멤버는 남편과 나, 언니와 형부다. 남편은 10년, 형부는 20년쯤 골프를 쳤고 나와 언니는 4월에 시작했으니까 딱 6개월이 됐다.



비장하게 티박스에 올라갔다. 침착하게, 연습한 대로만 하자. 욕심내지 말고 딱 100m만 보내자. 공을 째려보면서 백스윙을 하고 다시 공 앞으로 채를 휘둘렀는데... 공이 100m는커녕 몇 미터 눈앞에 떨어져서 떼굴떼굴 굴렀다. 부끄럽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괜찮아. 처음엔 다 그래."

남편이 나를 위로했다. 나 역시 앞으로 기회가 많으니 괜찮다고 생각하려고 애썼다.


나 다음에 언니가 쳤다. 언니의 공이 붕 떠서 멀리 나아갔다. 언니는 어제까지도 공이 안 나간다고 투덜거렸는데, 말과는 달리 잘만 나갔다. 저 멀리 날아가는 언니의 공이 얄밉게 느껴졌다.


우리와 함께 하는 캐디는 그다지 친절해 보이지 않았는데 같이 돌면서 보니 신경 써야 하는 일이 워낙 많아서 친절하기가 힘들 것 같기도 했다. 카트를 이동시키고 채를 가져다주고 공이 다른 홀 쪽으로 넘어가면 '포어(fore)'라고 소리도 질러야 하는 등 정말 쉴 틈 없이 바빴다.


날은 덥고, 공은 안 나가고, 캐디는 빨리 치고 이동하자고 하고... 이건 내가 생각한 골프장 풍경이 아니었다. 나는 넓고 푸른 잔디밭을 여유롭게 걸어 다니는 상상을 했는데, 골프장 예약이 7분 간격으로 돼 있기 때문에 내가 실력이 없어 공을 여러 번 치면서 시간이 지체되는 게 민폐로 느껴졌다. (이렇게 빡빡하게 예약을 잡는 건 우리나라가 유독 심하다고, 해외 나가면 이렇지 않다고 한다)


다음 홀을 기대하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홀이 거듭돼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연습장과 달리 필드에서의 기회는 단 한 번뿐... 공도, 내 고개도 자꾸만 땅바닥을 굴러다녔다.


"아무래도 골프는 나랑 안 맞는 것 같아. 골프는 왜 한다고 해가지고..."

"공 못 치는 건 괜찮아. 하지만 코 빠져 있는 건 안돼. 오늘은 그냥 골프장이 어떤 곳인지 경험하러 온 거야."

남편이 계속 괜찮다고 말해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공이 마음처럼 나가지 않아도 실패라기보다는 그저 경험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9홀이 끝나고 그늘집을 들어가 막걸리에 사이다를 타서 마셨다. 달콤하고 시원해서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 뒤로도 상쾌하게 공을 날리지는 못했지만 경사진 곳에서 공을 쳐보기도 하고, 모래 구덩이에 빠진 공을 퍼올리기도 하고, 공의 방향을 잡는 법을 익히는 등 새로운 걸 많이 경험했다.


어쩌다가 잘 친 공도 있었다. 내가 친 공이 쭉 뻗어 날아가고 뒤에서 "나이스샷"이란 말이 들리면 짜릿했다. 하지만 난 전반적으로 연습 때보다 못해도 너무 못했다. 잘하고 싶은 마음과 달리 나를 믿지 못한 나머지, 채를 가볍게 휘두르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이것 역시 실패라기보다는 경험이었다.


아쉬움을 남긴 라운드를 마치고, 다 함께 장어에 소주를 마셨다. 그동안 언니는 자주 만나도 형부는 명절이나 가족 행사 때만 만났다. 골프를 배우길 잘한 것 같다.



그날 하루동안 가장 많이 들은 말이 '괜찮아'였는데, 술 한 잔 마시고 생각해 보니 날씨도 좋았고, 배운 것도 많았고, 장어도 맛있는 정말 괜찮은 하루였다. 그래도 다음번에는 '괜찮아' 보다는 '나이스샷'이라는 말을 더 많이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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