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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Nov 13. 2024

갱년기라서 그래

그날 밤, 나는 혼자 이불속에서 눈물을 훔쳤다. 모두들 나를 무시한다. 정말이지 더럽고 치사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낮에 고3 아들이 다니는 학원에 입시 관련 상담을 신청하고 아들과 함께 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엄마, 저 혼자 갈래요."

"왜? 엄마도 궁금해. 엄마는 아무 말하지 않고 듣기만 할게."

"그냥 혼자 갔다 올게요."


아들은 대입 수시 원서를 쓸 때도 제멋대로 한 군데도 쓰지 않았다.

"안될 거 같아도 써 보는 게 낫지 않겠니?"

"이미 다 말씀드렸잖아요. 안 쓰는 게 나아요."

내 아들이 이렇게 고집불통이었나? 아니면, 부모가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학원비나 내주고 신경 끄라는 건가? 속이 타들어갔다.


2박 3일간 학교 수련회에 다녀온 고1 딸이 짐을 풀다 말고 휴대폰을 붙들고 뒹굴고 있다. 방안은 온통 쓰레기장 같은데 그 속에서 누군가와 정다운 대화를 한다. 한 시간, 두 시간... 밥을 먹으면서도 휴대폰만 보면서 웃고 있다. 수련회 가서 찍은 사진 좀 보여달라고 했더니 친구들 몇 명이 같이 찍은, 얼굴도 제대로 안 보이는 사진 한 장 달랑 보내줬다. 딸 앞에서 내가 투명인간이 된 것 같았다.


남편은 토요일마다 대학원 수업을 들으러 간다. 거의 저녁을 먹고 들어와서 그러려니 하고 있는데, 그날은 저녁을 넘어 밤까지 들어오지 않아 전화를 했다.

"술 마셔?"

"응. 조금 더 있다가 갈게."

"지금 열한 시가 넘었어. 아주 신났구나. 그렇게 맨날 술 퍼먹고 다니다가 길에서 쓰러져 디진다."

그냥 언제 들어오냐고 물어보려고 했던 건데... 남편 목소리가 너무 신나게 들렸다. 나는 혼자 쓸쓸한 주말을 보내고 있는데 너만 신났구나 싶어서 심술이 났다. 나는 결국 남편한테 악을 쓰며 전화를 끊었다.


남편한테 계속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모두들 내가 해주는 밥을 먹고, 내가 빨아주는 옷을 입고 다니면서 나를 무시한다. 내가 없어져봐야 후회를 하지. 내일은 파업할 거야. 니들끼리 밥 해 먹고 있어 봐라!!


한 시간쯤 뒤에 남편이 들어와 나를 흔들었다. 나는 잠든 척을 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남편이 옆에서 코를 골고 잔다. 계속 잠이 오지 않았다. 거실로 나와 쿠션 위에 쪼그리고 누워있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씻고 옷을 갈아입는데 남편이 물었다.

"어디 가게?"

"나 집 나갈 거야."

아무 말 안 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말이 나왔다. 아무 말 안 하고 나가면 내가 왜 나갔는지 아무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나가자."

일요일이면 늦잠 자는 남편이 벌떡 일어났다. 말리지 않았다.


막내딸의 아침을 차려주고 집을 나섰다.

"서오릉 가서 해장국 먹자."

해장국 한 그릇을 싹싹 비우고 서오릉을 산책했다. 남편이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열심히 따라 걸었다.

"내가 갱년기라서 그래."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들면서 갑자기 버럭 화를 내고 마는 날이 있다. 내가 많이 부족한 인간이라서 그런 건데, 갱년기라는 게 좋은 핑계가 된다. 어쩌면, 갱년기라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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