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늦어?"
오후 6시가 넘으면 남편에게 카톡을 보내 묻곤 한다. 남편은 평일엔 대부분 회식이나 고객사와의 만남으로 술자리를 겸한 저녁식사를 하고 들어올 때가 많다. 귀가시간은 빠르면 10시, 늦으면 새벽 2시쯤.
가족이 다섯이지만 저녁은 막내딸과 둘이서 먹는 날이 많다. 큰아이는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고, 고등학생 둘째는 학원과 스터디카페에서 공부를 하다가 11시쯤 들어온다. 아직 초등학생인 늦둥이 막내딸이 없었다면 나는 날마다 혼자 저녁을 먹었을 것이다. 막내딸의 존재가 새삼 감사한 요즘이다.
지난 금요일 저녁에 큰아이가 집에 왔다. 저녁을 같이 먹으려나 했는데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며 짐만 내려놓고 나갔다. 그래서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막내딸과 둘이 저녁을 먹었다. 우리 둘 다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며 여섯 시쯤 고기와 채소를 볶아 간단하게 먹었다.
티브이를 보면서 둘째를 기다리는데 10시쯤 되자 살짝 출출해지기 시작했다. 11시에 둘째가 들어와 베가 고프다고 해서 삼겹살을 굽고 비빔국수를 만들었다. 내가 한 음식이 가장 맛있어 보이는 시간이다. 한 입만 먹을까? 아냐, 참아야 한다. 밤에 먹는 건 다 살로 간다!
잘 참은 나를 칭찬하고 앉아있는데 남편이 들어왔다. 남편의 얼굴 보다 손에 들린 주황색 종량제 봉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뭐 사 왔어?"
"짜자잔"
남편이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술병을 꺼냈다. 그리고 편의점 냉동 치킨까지.
"아, 이 시간에 뭘 먹어? 살찐단 말이야."
"내가 다 준비할게. 자기는 가만있어."
내가 귀찮아서 먹기 싫다고 하는 줄 아는 남편이, 결국은 내가 먹을 거라는 걸 아는 남편이, 이미 밖에서 마시고 온 술로 기분이 좋은 남편이 냉동 치킨을 에어프라이어에 데우고 과일을 꺼내 깎는다.
오늘도 거부하기는 글렀다. 이런 일은 종종 있는 일이지만 난 한 번도 거부하지 못했다. 꼭 내가 뭔가 먹고 싶은 걸 참고 있는 밤늦은 시간에 술과 안주를 사들고 들어오는 남편. 남편은 내 다이어트의 두 번째 적이다. 첫 번째는 바로 나 자신이고.
"밤에 이런 것 좀 사 오지 마, 제발."
첫 잔을 툴툴거리며 털어 넣는다. 남편이 내 입에 치킨을 밀어 넣는다.
"아, 뭐야. 이 치킨 왜 이렇게 맛있어?"
늦은 밤에 먹는 치킨과 소주의 조합, 너무나 황홀해서 바로 무장해제가 돼버렸다.
남편이 내게 오늘 만난 사람과 일 이야기, 뒤늦게 하는 공부에 관한 이야기 등등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의 입은 먹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말하기 위해 존재한다. 난 남편의 이야기 보다 술과 치킨에 집중한다. 그동안 남편과 술을 마시면 말하기 좋아하는 남편이 주로 말하고 나는 듣는 편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일하는 분야가 내 관심사가 아니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지면 졸음이 몰려온다. 결혼 초기에는 참고 들었지만 20년을 같이 산 지금은 지루한 티를 감추지 않는다.
"좀 짧게 이야기할 수 없어?"
술과 치킨을 어느 정도 먹었고, 잠은 오지만 바로 누우면 안 될 것 같아 버티고 앉아있는데 마침 큰아이가 들어왔다.
"너도 한 잔 할래?"
이제는 남편이 큰아이를 붙잡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게는 지루하게 들리는 이야기인데 아들은 남편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다. 나와는 달리 호응도 하고 질문도 하면서 대화를 이어가는 두 사람.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남편이 밤늦게 술을 사들고 들어오는 이유는 술을 마시고자 함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대화가 필요한 거였어!
누군가 '술 한잔 하자'라고 하면 대화를 하자는 것이 당연한 건데, 나는 왜 남편이 술을 사들고 들어오면 밤늦은 시간에, 살찌는데, 술을 사들고 오다니, 정말 짜증 나,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라고만 생각했다. 사실 술은 안 마셔도 되는 거였다. 술이라도 있어야 내가 앉아있으니 술을 사 오는 거였다.
20년을 함께 살다 보니 내가 이 사람에 대해 다 안다고,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앞으로는 남편이 밤늦게 술을 사들고 들어오는 이유가 나랑 대화를 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날만큼은 두 귀를 활짝 열어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