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 시가 넘은 시간에 휴대폰이 진동을 뿜어냈다. 발신자는 202호(아래층) 어르신. 이 시간에 왜 전화를 했을지 뻔하기에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최대한 상냥한 말투로 '네'하며 전화를 받았다.
-아니, 뭘 그렇게 집어던져. 아주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
-아, 그래요? 딸애가 지금 막 들어왔는데 가방을 좀 생각 없이 내려놨나 봐요. 조심하라고 할게요. 죄송합니다.
-그래, 조심 좀 해줘요.
딸애한테 짜증 섞인 당부를 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아래층 어르신이다. 웃으며 검은 봉지를 하나 건네신다. 봉지 안에는 냉동 우족탕과 소고기가 들어있었다. 소음 때문에 괴로워서 전화를 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드셨나 보다.
-아휴, 뭘 이런 걸 가져오셨어요. 잘 먹을게요.
나는 다음 날 포도를 한 상자 사서 아래층을 찾아갔다.
-얼마 전부터 저희 딸들이 안방을 쓰거든요. 학원에서 늦게 와서 가방을 내려놓거나 뭘 떨어트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아요. 조심하라고 이르는데 가끔 잊어버리나 봐요. 또 시끄러우면 편하게 연락 주세요.
-그렇구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 돌아가는 길에 어르신은 오렌지와 과자를 싸서 주신다.
-우리 집엔 먹을 사람이 없어. 거긴 먹을 사람이 많잖아.
202호 어르신과는 아래위층으로 11년을 살았다. 우리 집이 정말 시끄러웠던 건 아이들이 어렸던 지난 몇 년이었는데 그때는 층간 소음 문제로 연락이 오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 딸들한테 안방을 내주고 나서부터 아래층에서 종종 연락이 온다. 아이가 밤에 학원에서 돌아와 무거운 가방을 바닥에 툭 내려놓거나 책상에서 뭘 떨어트릴 때, 머리 손질을 하면서 헤어드라이어를 툭툭 바닥에 내려놓을 때 아래층에서 느끼기에는 천장이 무너지는 것 같아 깜짝 놀라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았다.
전에 없이 층간 소음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바닥에 작은 것 하나만 떨어트려도 예민해지게 된다. 그동안 참 편안하게 살아온 것 같다. 아이들이 어릴 때 아래층 어르신이 우리 집에 전화를 하지 않은 건 시끄럽지 않아서가 아닐 것이다. 아이들 있는 집이 다 그러려니 하고 이해하고 넘어가셨을 거다. 심지어 어르신은 우리 집에 종종 먹을 걸 가져다주시고 길에서 아이들을 만나면 천 원짜리 몇 장을 용돈으로 주시곤 했다. 내가 이 집에서 무탈하게 아이 셋을 키운 건 이렇게 좋은 이웃을 만난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 이사 온 윗집 사람들이 주말마다 손님을 초대해 술을 마시는지 새벽까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들도 위층이 너무 시끄럽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했다. 주차장에서 윗집 남자를 만났을 때 그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그냥 웃으면서 인사만 했다. 일단은 참아보자고, 아래층에서 참아준 만큼 나도 참아보자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