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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옹다옹하다 Oct 23. 2023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점

 중학교에 입학하자 신성한 교실은 아이들의 힘 겨루기 장으로 전락했다. 인격은 아직 초등학생의 티를 벗어나지 못한 채 몸만 어른이 된 중1은 실로 위험천만했다. 이차 성징이 시작되며 전에 없던 힘을 소유하게 된 남자아이들은 그걸 몸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일곱 개의 초등학교에서 하나의 중학교로 모여들었다. 교실 안에서는 한동안 첨예한 탐색전이 이루어졌다. 폭풍전야 같이 고요한 암중모색의 시간이 끝나자 본격적인 서열정리가 시작됐다. 매일같이 교실의 뒤에서 수컷들의 결투가 이루어졌다. 유치한 힘자랑에 동참할 생각은 없었지만 간혹 피할 수 없는 싸움도 존재했다. 자칫 약자로 낙인찍혔다가는 내내 괴롭힘이 따라붙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강자의 꼬리표를 달기 위해서는 인상에 남을 만한 강렬한 싸움과 승리가 필요했다. 일단은 여기저기 시비를 걸고 다니던 싸움닭 중 이길 수 있을 만한 상대를 물색하며 기다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이던 정호는 단 두 번의 싸움으로 강자의 자리에 군림했다. 정호는 덩치가 크고 배짱이 좋았지만 먼저 싸움을 걸거나 약한 친구를 괴롭히진 않았다. 정호와는 함께 농구를 하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농구를 할 때 녀석은 센터 포지션을, 나는 가드를 맡았다. 스피드가 빠르고 드리블에 능한 나는 정호가 득점하기 쉽게 공을 잘 패스해 주었다. 정호는 내성적이고 감성적이던 나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갖고 있었다. 호탕하고 시원시원했다. 나는 반에서 유일하게 소설을 읽고 기타를 치던 학생이었다. 다름에 대한 이질감은 동경과 끌림의 작용을 일으켰다. 정호와 어울리면서 주위에서 지분거리던 싸움닭들은 꼬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정호는 키도 훤칠하고 미남이라서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공용 음악실을 이용하는 음악 수업이 있는 날이면 정호의 자리에 항상 편지가 놓여 있었다. 음악실에 갈 때면 여자 반 건물을 지나야 했는데 조숙한 아이들은 2층 난간에 서서 남자애들의 모습을 훔쳐봤다. 정호는 종종 내 목에 자기 팔을 두르고 걸었다. 내 키도 중간 이상은 됐지만 함께 다니면 비교가 돼서 땅딸보처럼 보였다. 중학교 2학년 수련회 장기자랑 시간에 무대에 올라가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를 불렀다. 그 이후로 음악실 내 자리에도 편지가 날아왔다. 수업 마치고 집에 오면 간혹 여자애들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자기들끼리 키득키득하더니, 너 혹시 여자친구 사귈 마음 있어?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은근슬쩍 떠보는 질문에 샌님은 사뭇 단호하게 답했다. 아니! 고루한 겁쟁이에게 남녀 간의 사귐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탈이었다. 어떤 날은 수화기 너머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여학생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제 말이 안 들리세요? 저는 아무 말도 안 들려요.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언제부터 소설을 읽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독서와 음악의 히스토리가 사촌형의 작은방에서 시작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집에는 책이 한 권도 없었다. 자주 고장나던 오래된 티브이뿐이었다. 그 무렵 한창 무섭게 다투던 부모님은 공부를 하라고 혼내기만 했지 책을 읽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진 못했다. 삼 형제 중 둘째였던 사촌형의 방은 별채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이미 고등학생이던 사촌형은 내게 기타 연주를 처음 들려주었다. 전축에 시인과 촌장의 레코드판을 틀어 주면서 놀다 가라고 자리를 비우면 책장에 있던 소설책을 꺼내 읽곤 했다. 책장엔 황석영, 이청준, 이문열 등 남자 소설가의 작품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할 문장을 왜 붙잡고 있었는지, 독서의 시작이 늘 싸움뿐인 집으로부터의 도피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거나 나는 읽었다. 물 위에서 타는 불처럼 위태롭고 불완전한 내적 생장이 시작되었다. 학교에서 백일장을 하면 항상 수상을 했다. 그런 나보다 더 상을 많이 타던 친구가 있었는데, 미지라는 아이였다. 글짓기를 좋아하고 같은 반이 된 적도 있어서 미지랑은 가까운 편이었다. 미지는 또래에 비해 어른스럽고, 차가운 면이 있어서 친해지기 쉬운 타입은 아니었다. 어느 날 어떤 남자애가 미지에게 미친년이라고 놀렸다가 그 아이의 부모님과 미지의 부모님이 학교에 온 적이 있었다. 미지의 아빠는 고등학교 선생님이라고 했다. 시에서 주최하는 백일장에 함께 다녀오던 날 미지는 말했다. 난 어른이 되면 개명할 거야. 뭘로? 서현이로. 왜? 미지라는 이름 좋은데. 미지의 세계처럼 신비롭잖아. 미지가 살짝 웃었다. 쌀쌀한 냉소인지 기분이 좋아서 웃은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정호는 같이 학원에 다니자고 했다. 고입 시험을 위해 공부를 하자고 했지만 다른 속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녀 합반도 아닌 데다가 학생주임 선생님의 감시가 워낙 삼엄해서 연애를 하기 힘들었다. 학원에 가면 공부를 핑계로 여자애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정호와 함께 삼총사를 이루던 친구, 근길이와 함께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근길이는 짝사랑 전문가였는데, 쉽게 사랑에 빠지고, 차이고, 또 다른 사랑에 빠지고를 반복했다. 학원에 소문이 퍼져 더 이상 상대가 없자 학원에 다니지 않던 여자애를 콕 집어 다시 순애를 시작했다. 나 고백할 건데 편지 좀 대신 써주면 안 돼? 근길이가 더 이상 상처받는 것이 두렵기보다는 이 진절머리 나는 고백병이 종결되길 바라는 마음에 그만 승낙하고 말았다. 마치 근길이가 되어 실제 사랑에 빠진 것처럼 정성껏 편지를 썼다. 다소 과장된 미사여구와 철학적 단어들을 조합한 유치한 편지글이었다. 여자애의 긍정적인 답장을 받던 날 근길이는 너무 기분이 좋아 농구를 하다 덩크슛을 꽂아 넣었다. 근길이는 고맙다며 내 볼에 연신 뽀뽀를 했다.

 미지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만났다. 이미 학원을 다니고 있던 미지에게 알은체했다. 아직 개명 안 했냐? 미지가 무심하게 말했다. 너 노래 잘하더라. 미지는 문학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미지는 가방에 소설책을 한 권씩 넣고 다녔다. 학원에서 어쩌다 마주치면 내게 물었다. 너 은희경 '새의 선물' 읽어 봤어? 신경숙의 '깊은 슬픔' 읽어 봤어? 어, 당연히 읽어 봤지. 갑자기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어땠는데? 엄청 슬펐지. 미지가 피식 웃었다. 이번엔 비웃음이 틀림없었다. 학원을 마치고 서점으로 달려가 깊은 슬픔을 사 읽었다. 그리고 다음날 일부러 미지 앞으로 다가가 생뚱맞게 소설의 내용을 들먹이며 아는 척을 했다. 근데 왜 넌 여류 작가 소설만 읽는데? 그러는 넌 왜 남자 작가 소설만 읽는 건데? 그냥! 나도 그냥. 미지가 그냥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미지가 그렇게 소리 내어 웃는 것은 처음 보았다. 너무나도 싱그러워서 근길이였다면 바로 사랑에 빠져 침을 질질 흘렸을 것이 분명했다. 미지는 내게 여성 소설가의 책을, 나는 미지에게 남자 작가의 책을 한 권씩 추천했다. 내가 건넨 책은 김승옥의 '무진기행'이었고, 미지는 내게 오정희의 '유년의 뜰'을 선물했다.

 

 미지랑 부쩍 친하게 지내면서 정호는 미지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급기야 정호는 미지와 사귀고 싶다며 대신 편지를 써달라고 했다. 초등학교 때 내가 쓴 글을 본 적이 있어서 분명 눈치챌 거라며 거절했다. 정호는 서운한 티를 냈다. 며칠이 지나고 다시 편지를 써 줄 것을 부탁했다. 너 혹시 걔 좋아하냐? 아니, 그런 거 아냐. 그럼 딱 한 번만 써줘.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이번엔 정호가 되어 간절하게 편지를 썼다. 미지를 향한 애절하고 그윽한 마음이 마구 샘솟았다. 그게 지나친 감정 이입 때문인지 내 본심인지 헷갈렸다. 정호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미지에게 편지를 전했다. 학원에는 대번에 둘이 사귄다는 소문이 퍼졌다. 다음 날 둘이 따로 만나는 걸 봤다는 애도 있었다. 속상한 마음에 미지가 준 오정희의 책을 분리수거함에 버렸다. 그리고 밤새 저주했다. 미지와 정호가 아닌, 지질한 나 자신을.

 정호야, 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굴이 중요한 거야. 학교에 가니 뜻밖에도 근길이가 정호를 위로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둘이 밖에서 만났다는 건 거절하기 위함이었다. 걔는 대학 갈 때까지 남자 안 사귈 거래. 어차피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니었어. 정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정호도 별 거 아니라고 느낀 건 처음이었다. 학원에서 만난 미지에게 따지듯 물었다. 넌 왜 남자친구 안 사귀어? 다소 성급한 물음에 미지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점이 뭔지 알아? 외로움이 타의에 의한 쓸쓸함이라면 고독은 자의로 혼자가 되어 느끼는 즐거운 마음이래. 그리고, 네가 시라노냐? 티라노? 티라노사우루스? 시라노가 뭔지 몰라 엉뚱한 소리를 하자 미지가 한심하다는 듯 다시 말했다. 다른 사람 편지 써 주지 말라고!

 분리수거함에서 건져낸 오정희의 소설을 다시 읽었다. 미지가 말한 고독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읽는 내내 미지의 웃는 모습이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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