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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옹다옹하다 Apr 15. 2024

사투리 쓰는 남자

괜찮아유

 서른 살 무렵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왔다. 십 년 만의 귀향은 낯설고 고적했다. 조마조마한 구직 끝에 2년간 한 중소기업에서 일하다가 지금의 회사로 이직하였다. 지역농협이라는 직장의 특성상 직원들의 연령대는 고령화를 향하고 있었고 주로 대하는 고객들도 어르신이 대부분이었다. 모든 처음이 그렇듯 어색했고 막막했다. 나의 역사가 시작된 발생지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처럼 겉을 맴돌았다. 사람과 가까워지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성격이라 더욱 그랬다. "형, 저희보다 나이도 많으신데 이제 그만 말 놓으세요. 여긴 다 그래요." 회사 안에서는 직급이 높은 선배였지만 심성이 착한 동생들이 말을 편히 하라고 권했다. 학연 지연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지역 사회였다. 나이가 더 많다는 이유로 무조건 반말질부터 하고 보는 꼰대가 수두룩했다. 말을 놓으면 경계를 누그러뜨려서 쉽게 다가갈 수 있었지만 마음의 벽까지 허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반말을 쓰면 타인도 내게 말을 함부로 하기 일쑤였다. 말의 모양새는 이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되었다. 무엇보다 내가 가진 정중함의 힘마저도 잃어버리는 게 싫었다. 지금은 막역한 사이가 된 동갑내기 여직원 하나가 답답했는지 먼저 말을 꺼냈다. "입사한 지 일 년이나 됐는데, 언제 말 놓을 거여! 내가 싫은 겨?" 매사에 수줍어 쭈뼛거렸다. 의심의 날이 바짝 선 길고양이처럼 조심스러웠다. 언어는 능력도 경력도 없는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였다. 지나치게 유창한 말은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것을 증명하곤 했다. 적당히 유려하면서도 진중하고 겸손한 말투는 사람을 진솔하게 꾸며 주었다.

 

 내가 쓰는 언어의 겉면에는 사투리라는 포장지가 씌워져 있었다.

 사용하는 언어는 적군과 아군을 가르는 척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나 또한 당신들과 같이 이 지역의 토박이이며 같은 처지에 놓인 우군이라는 것을 언어로 증명해야만 했다. 두루뭉술한 충청도 사투리의 장단점은 명확했다. 능청스러운 사투리를 쓰면 위로 나이 차이가 많은 사람과도 허물없이 친근할 수 있었다. 경직된 관계의 장벽을 허물기에 사투리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경영지원실에 근무할 때 책임자와 임원을 주로 상대해야 했는데, 사투리를 능글능글하게 잘 쓰면 딱딱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관계의 긴장과 권위가 느슨해지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내 위치는 그들 쪽으로 격상되었다. 친절히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대부분 그런 언어를 사용했다. 사투리를 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사투리를 즐겨 썼으니까. 다만 어려운 것은 말하기가 아니라 듣기였다. 하나의 문장이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중의성이 담긴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똑떨어지게 명확한 표시를 해주면 좋으련만 충청도인들은 매사에 우유부단하고 흐리멍덩했다. 애매하고 어중간한 의사표현은 결정적인 순간에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한두 번 호되게 당하고 나서는 말하는 사람의 성향과 상황적 뉘앙스까지도 고려해야만 했다.

 충정도 사투리에는 기본적으로 위트와 해학이 담겨 있었다. 호들갑을 떨 만큼 급박한 상황에서도 여유를 부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천연스러운 척을 했다. 옷에 밥풀이 묻어 있으면 "냅둬유, 이따 간식으로 먹게."라고 넉살을 떨었다. 지각한 직원에게 "머 하러 이렇게 일찍 왔댜. 아예 내일 오지 그랬어."라고 한다던가, 문을 세게 닫는 직원에게 "그렇게 닫아서 문이 부서지겠슈."라고 하곤 했다. 반대 결론에 도달하는 질문을 하여 진리로 이끄는 일종의 변증법을 다들 깨우친 것일까. 뒤늦게 철든 청개구리처럼 하나의 말을 두고 이게 직설법인지 반어법인지를 고민해야 하니 환장할 지경이었다. 결국엔 나 역시 반어법을 익혀 자주 사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하느라 힘들지 않냐고, 지내는 게 어렵지 않냐는 물음에 "괜찮아유."라고 답하곤 했다. 과하게 웃는 얼굴로, 태연하게 괜찮다는 놈치고 진짜 괜찮은 놈 없었다.


 내가 쓰는 말이 사투리라는 것을 대학에 입학하고서야 처음 알았다. 설렘과 긴장, 두려움을 한데 버무린 채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했다. 리조트의 객실에서 같은 조가 된 조원끼리 동그랗게 원을 만들어 앉았다.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서울과 경기도에서 온 친구들이 많았다. 뭐라고 나를 소개해야 되나 고민하며 속으로 할 말을 반복해서 되뇌었다. 드디어 차례가 되어 소개를 하는데 중간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부지, 돌 굴러가유. 빨리 좀 말해유." 모임을 진행하던 2학년 선배가 얄밉게 비아냥거렸다. "여기서 더 빨리 말하면 사람들이 못 알아들어요." 놀림을 당하는 것이 거북하여 맞대꾸한 것이었는데 다시금 웃음판이 벌어졌다. 사실이 그렇기도 했다. 내 말이 느리다고 생각한 적이 이전에는 없었다. 고등학교 때 반에는 나보다 말이 느린 친구들이 태반이었다. 어떤 애들은 잠시 말을 입속에 머금은 것처럼 한참을 우물거리다가 뱉었다. 누군가는 느릿한 표현 방식이 답답하다고 가슴을 치겠지만 나는 그 긴 정적이 좋았다. 빠르게 굴러 떨어지는 돌을 피하게 할 수는 없었지만 대신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을 신중하게 꺼낼 수 있었다. 마치 머릿속으로 불필요한 문장을 거르듯 느리고 깊은 말이 맘에 들었다. 그래서 내 말은 굼뜨고 간혹 더듬더듬했다. 말속에 담긴 내용마저 어눌할 수는 없어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채우려고 노력했다.

 

 지난겨울 직원들과 회식을 마치고 택시를 부른 적이 있었다. 호출한 지 30분이 넘었는데도 택시는 오지 않았다. "진득이 기다려봐, 충청도 택시라 그려."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아무도 화를 내거나 재촉하는 사람이 없었다. 생을 마치 한 편의 콩트처럼 가볍게 대하는 유희적인 태도와 대충 살다 가겠다는 느긋함은 관점에 따라 혐오스러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캄캄하게 불 꺼진 방에서 주위를 더듬다 시시덕거리며 느리게 전진하는 삶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다 누군가 말했다. "괜찮아유, 내복 입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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