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기자의 세상보기 우수상 수상작_김이곤
1. 그곳은 지도에는 물론, 그 흔한 인터넷 거리뷰에도 없는 시골 마을이다. 국도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시골 마을과는 다른 곳이었다. 그때 나는 방송국 차에 타고 그 마을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이라고 여기저기 국가 헌신을 기리는 행사 플래카드가 목적지를 향하는 거리 곳곳에 걸려있었다. 과거 정부 주도로 민간인을 상주시켜 북한의 침투를 막고, 우리의 우월성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선전마을, 이길리가 나의 목적지였다.
2. ‘수해마을 이길리, 집단이주로 새 보금자리 마련 성공’과 같은 지자체에서 보낸 보도자료들. 수북이 쌓인 메일함 가운데 아직 그곳엔 사람이 산다는 제보가 있었다. 그렇게 상습 수해지역 이길리를 향했다. 육군의 관할 초소를 통과하고 굽이 돌아가는 그 길은 슬픈 곡선을 그리며 뻗어 있었다. 그 곡선을 따라 달리니 나를 반기는 건 새들의 울음 사이로 흩날리는 먼지뿐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내다본 마을 풍경. 4년 전 수해의 상처가 마을 곳곳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3. 무너지고 방치된 집들과 깨어진 돌담, 잡풀들…. 도저히 사람이 살고 있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청산별곡(靑山別曲)>의 구절과 같이, 이길리엔 자고 일어나기만 하면 눈물과 울음으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이길리에 남은 13 가구 주민들이다. 어르신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앉아 계셨다. 이길리는 북한에서 잘 보이는 곳에 주택을 지으라는 정부의 ‘전략촌 정책’으로, 지난 1997년에 조성된 마을이다. 하천보다 낮은 지대에 만들어졌고, 이런 까닭에 이길리는 지난 1996년과 1999년 발생한 수해로 각각 100억 원이 넘는 피해가 났다.
4. 또, 지난 2020년 집중호우 당시에도 큰 재해를 입었다. 4년 전 수해로 마을은 쑥대밭이 됐고, 지뢰 지대에 묻혀있던 지뢰가 빗물에 휩쓸려 집 앞에서도 발견됐다. 무서움, 두려움과 함께 주택 68동은 모두 물에 잠겨버렸다. 주민들은 한순간에 이재민이 됐고, 청와대에 가서 대책을 호소했다. 결국, 지자체에서는 주민들이 살던 땅을 ㎡당 6만 3천 원에 수용했고 6만여 평 규모의 이주 마을을 조성했다.
5. 과연 주민 모두가 잦은 수해와 접경지역의 불안감을 훌훌 털고 이주했을까? 이전 땅과 집 신축비용은 오롯이 주민들의 몫이었다. 여유가 있거나 고령이 아닌, 빚을 갚을 여건이 되는 주민들은 이전했다. 하지만, 이전된 땅을 사고 집을 지을 돈이 없는 주민들, 대부분 고령자로 구성된 13 가구는 이길리에 남게 됐다. 정부 정책에 따라 북한 턱밑에서 한평생을 산 그들이다.
6. 수해 당시 영부인과 국무총리가 마을을 찾았을 때 기자들이 많이 왔단다. 주민들이 그간 비가 올 때마다 힘들다고 했어도, 기자들이 한 번을 안 왔는데 그때 총리 온다니까 바로 기자들이 왔었다며 쓴웃음도 지었다. 아직 기자의 옷을 입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난 어찌해야 할지 몰라 괜히 가방을 뒤지는 척하다 명함을 건네며 공손히 인사했다. 명함을 받자, 주민들은 바로 말했다.
“살려줘요”, “북한이 오물 풍선 날리고, 우리는 확성기도 설치하고, 얼마 전에 지뢰가 또 발견되고…. 좀 살려주세요.”
7. 살려달라는 말을, 기자가 되고 처음 들어봤다. “살려주세요”와 “도와주세요”는 같은 맥락의 요청이라 할지라도, 그 태도와 단어가 내재한 의미는 완전하게 다르다. ‘살려줘’는 단순하게 힘을 보태 달라는 말이 아니다. 누군가가 총구를 머리로 들이밀 때처럼 심각한 상황 속에서나 외칠법하다. 정말이지 완전한 절망 속에서 자기 포기와 무력함을 뜻하는 말이다.
8. 평생 최북단 민통선 마을, 이길리를 벗어난 적 없는 어르신들이 별짓 다 해도 변화는 없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처음 보는 기자에게 살려달라는 말을 하는 게 이해가 갔다. 전적으로 자기의 목숨을 기자에게 맡기는 행위에 가까운 살려달라는 말. 나는 잘 자란 나무에 영양 비료를 얹어 주는 기자도 있지만, ‘사흘 굶으면 양식 지고 오는 놈 있다’는 옛 속담처럼 막다른 지경에 달해도, 양식을 짊어지고 오는 기자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도 싶었다.
9. 어르신들의 사정부터, 댁에 가서 현재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 수해 이후 공사는 어떻게 됐으며, 지뢰가 발견된 장소는 어딘지, 어르신들을 따라 전부 세심하게 들여다봤다. 최근처럼 남북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불안감은 반복됐고, 저녁에 산책하러 집 밖을 나가면 군인들이 금세 와 들어가라고 한단다. “나갔는데 여기 CCTV가 있어요. 거기 나가지 말라고 나가면 큰일 난다고 초소에서 얘기해” 군 당국이 곳곳에 설치한 CCTV의 감시는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10. 더 큰 걱정은 자연재해. 이길리 주민 대부분은 농업이 생업이다. 철원군의 특산품인 쌀도 이길리에서 생산되는데, 제삼자이자 기자의 눈으로 바라본 이길리 농민은 평온한 농부의 삶과 거리가 멀었다. 마을 지대 자체가 하천보다 낮아 비가 조금 많이 오면 물이 차기 일쑤였고, 갑자기 논밭에서 지뢰가 발견돼 지뢰 공포도 여전하고…. 마을을 떠나지 못한 13 가구의 보금자리 건물 외벽엔 금이 가 있고, 콘크리트가 떨어져 성한 곳이 없었었다.
11. 정부와 지자체는 한탄강 유실구간 제방 공사도 마쳤지만, 비만 조금 오면 여전히 모래가 떨어졌다. 올해는 예년보다 집중호우가 더 할 것 같다는 예보에 주민들은 비가 쏟아지지 않을까 하루에도 두세 번 하늘만 쳐다봤다. 한 할머니께서는 이주를 간 사람들과 이제 교류가 없다며 내게 먼지 쌓인 윷놀이 세트를 보였다. 명절만 되면 함께 마을회관에 모여 주민들끼리 윷놀이를 했는데 할머니께서는 그게 그렇게 좋았던 모양이다.
12. 이젠 이 윷놀이 세트를 내버릴 거라고 할머닌 말했다. 그렇게 가까웠던 이들도 떠난 뒤 남아있는 13 가구를 두고, 까짓 거 빚지고 나오지 왜 지역에서 유별나게 그러느냐며 손가락질한단다. 비가 오더라도 마을 주민들의 ‘함께’라는 연대가 강했는데, 이젠 윷놀이를 할 사람도, 그 ‘함께’라는 힘으로 가득했던 마을 공동체도 파괴된 것이다. 윷놀이에서는 상대편과 대결은 진흙 판 싸움이 되더라도 같은 편끼리는 업히고 또 업어가는 그런 따뜻한 규칙이 있다.
13. 그런데 상대편이 되면, 윷놀이의 생리에는 알다시피 윷판에서 얼른 일 초라도 빨리 도망쳐 나가는 게 제일 중요한 목적이 된다. 그렇게 먼저 벗어난 팀은 유일한 승리자로 자리하고 윷놀이 판에 남아있는 말들은 패자로 전락한다. 정부에서 규정한 이주 마을로 옮기는 게 가능한 시기도 지났고, 대출도 받기 힘든 상황 속에서 불안 속에 사는 주민들, 그들은 언제까지 그렇게 울어야만 하고, 패자로 이길리 판에 남아있어야 하는 걸까.
14. 남은 13 가구 주민들은 얼른 상습 수해 지역 이길리를 벗어나고 싶지만, 방법이 없는 것이다. 남북관계 경색에 수해, 그리고 지뢰까지…. 말 그대로 이 위험천만한 곳을 벗어나 살고 싶은 거다.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면서 손주보다도 어린 앳된 기자에게 눈물을 보이는데, 기자로서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막다른 지경에 달해도, 양식을 짊어지고 오는 기자가 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내가 겪었던 일들을 자신 있게 기사로 얘기할 수 있는 것뿐이었다.
15. 지자체에선 강원특별자치도 1주년 기념일, 6월 11일에 수해로 고통받던 이주민들이 집단이주를 모두 마쳤으니 입주 기념식을 개최한다고 했다. 모두 “잘됐다”라며, “이제 고령의 주민들이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겠다”라고 할 때, 아직 여기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알리는 것. 살려달라는 남아있는 13 가구 주민들의 말을 전하는 것. 그게 내가 기자로서 할 수 있는 전부였다.
16. 이주민 입주 기념식이 열린 그날 저녁, 지역 언론사들은 북한 선전용 마을로 조성된 수해 지역 이길리의 주민들이 마침내 이주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기사들이 나왔다. 그 사이로 아직 13 가구나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기사가 방영됐다. 뉴스가 방영되자마자, 지자체는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다각적인 대책 마련에 나섰다고 밝혔다.
17. 철원군은 부서 긴급 점검을 통해 이길리 마을에 대한 폭우 예방 대책을 점검하고, 제방 보강공사와 홍수 방어벽을 설치하기로 약속했다. 또, 배수펌프장 운영 점검과 주기적으로 제방과 소하천을 정비할 것이라는 방침, 지뢰로 인한 주민들의 피해 예방을 위해 군 당국과의 협력, 13 가구 어르신들을 계속 설득해 이주를 완료하게 하겠다는 계획까지.
18. 뉴스 보도 이튿날, 이길리 주민 한 분께 전화가 왔다. 마을회관에서 13 가구 모두 모여 스피커폰으로 내게 전화를 걸었는지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기자님, 죽기 전에 텔레비전에도 나와보고. 우리 얘기 잘해줘서 고마워요. 지금 엄청 신경을 써줘요. 우리가 고마워요. 나중에 또 와서 윷놀이 같이해” 고맙다는 말이 왜 이렇게 쑥스러운지. 대답도 잘 못 하고 끝난 대화. 여든이 넘은 그들은 ‘우리 얘길 잘해줘서 고맙다’라는 말을 햇병아리 같은 기자에게 했다. 그 한마디가 왜 이렇게 뭉클한지.
19. ‘이게 기자구나’ 남의 일을 말하는 직업, 기자다. 보통 세상에서 ‘말’이란 곧 남의 흉을 의미하고, 헐뜯는 비난 같은 기사들을 보며 의문을 품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사이로 내 기사가 별처럼 빛나 보였다. ‘하늘엔 총총 별도 많고, 우리네 세상살이 말도 많고’라는 민요가 머릿속에 울렸다. ‘휴머니즘이 넘치는 지역사회와 세상을 만드는 데 이바지하고 싶다. 세상살이 말도 많지만, 인간미가 넘치는 기자가 되고 싶다. ‘나’와 ‘너’ 사이의 대화로, ‘나’보다는 ‘우리’라는 말을 더 즐겨 사용하는 기자가 되고 싶다’라고 다짐을 굳게 했다.
20. 정말 힘들고, 소외된, 게다가 죽음까지 내다보는 이들에게 사흘 굶으면 양식 지고 오는 기자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살려달라”는 그들의 같은 입에서 “윷놀이 같이해” 같은 말이 나온 것만으로 나는 큰 보람을 느꼈다. 병아리 기자로서 내가 이번에 취재를 통해 본 따뜻한 세상을 평생 기억하고 싶어 마지막 문장에는 마침표를 찍지 않으려고 한다
“윷놀이 판에서 모두가 앞서가는 말에 주목할 때, 뒤처지는 말의 말을 듣고 쓰고 말하자”
'이길리엔 아직 사람이 산다' 취재기는 한국기자협회가 주최한 <2024 기자의 세상보기>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