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라, 무소의 뿔처럼 나아가라’ 나는 무슨 위기 상황이나 곤란한 사항에 처할 때마다, 이 말을 나지막이 외친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편지에 마지막 문장에 자주 써주신 말인데, 나는 나만의 주문처럼 이 말을 좋아한다. 나를 이루고 있는 무언가가 흔들릴 것 같을 때, 멘탈이 바스러지기 시작할 것 같을 때마다 이 말을 암송한다. 오늘 저녁 약속이 있는데, 퇴근길 차가 너무 막힌다. 항상 최소 10분 전에는 도착해 있는 게 내 캐릭터인데, 아슬아슬하다.
2. 나는 ‘빨간불 신호가 언제 변할까?’ 하며 꽉 막힌 도로에서, 운전석에 기댄 채 다시 한번 그 말을 반복해 본다. 오늘 저녁을 함께 먹기로 한 분은 내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시다. 내가 1학년일 때 담임선생님이셨고, 그 후로도 계속 우리 가족과 선생님네 가족과는 교류가 있었다. 고등학생 때, 한 번 내 인생에서 내가 처한 상황이 그 어느 때보다 힘들었던 적이 있는데, 선생님께서 손 편지를 써서 집에 찾아와 주셨다. 그때 마지막 문장도 비슷했다.
‘이곤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 불교 <수타니파타>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비슷한 말들도 많다. 독일 시인, 횔덜린도 비슷한 시구를 썼다. ‘가라, 무방비 상태로 나아가라’ 어쨌든, 무소의 뿔처럼 운전하니 금방 약속장소에 도착했고 드디어 선생님을 뵈었다. 선생님 남편도 퇴근하시고 바로 오셨다.
▲ 선생님 부부와 식사하고 찰칵!
선생님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남편도 여전히 멋지셨다. 오랜만에 뵙는 거라 반가웠고 진심으로 좋았다. 더군다나 제자가 원하는 직업을 갖고 뵙는 거니, 선생님께서도 뿌듯하셨는지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4. 흡사 다들 코미디언이 된 것처럼, 무슨 얘기를 해도 우리 테이블은 웃음으로 가득했다. 예전에 내가 중학생 때였나, 선생님이 미국 출장을 가시고 내 선물을 사 오셨다. 엄청 유명한 서점에서 ‘해리포터 영어판’을 사 오셨다며,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꼭 읽어보라며 내게 주셨다. 당시 난 그래도 영어를 어느 정도 했는데, 아무리 읽어도 읽히질 않는 거다. 첫 번째 문장을 5번이나 읽어도 전혀 읽히지 않고 이상한 거다. 찾아보니 이거 웨일스어였다.
▲ 중학교 때 선생님께서 미국으로 출장을 다녀온 후, 선물해 주신 해리포터 책(웨일스어) 언젠가는.. 읽겠지..?
선생님께서는 JK 롤링 고향 웨일스어로 된 책을 선물해 주신 거고, 나중에 말씀드리니 책장에 뽀대용으로 둬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하셨다. 나는 아직도 그 책을 읽지 못하고 있다.
5. “왜 이렇게 안 먹어?” 이렇게 식사가 즐겁거나, 내가 너무 좋으면 나는 뭘 잘 못 먹는다. 엄마는 식사 예절 중에 그러면 상대가 오해하거나 불편해한다고 몇 번 나무랐는데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이런 건 우리 아빨 닮은 것 같다. 선생님의 귀요미 아들 두 명의 근황과 나의 고민, 그리고 값지고 소중한 조언들을 듣고 나니 배가 막 불렀다. 중학생 때 저녁에 체육수업 농구 수행평가 연습을 하려고, 동네 체육관에서 농구를 연습했던 적이 있다.
6. 상대팀을 이겨야 A를 받는데, 우리 팀은 아무리 해도 계속 지는 거다. 그때 선생님 부부가 지나가다 나를 보셨다. 선생님은 기억하지 못하고 계셨는데, 그때 내게 다가와 이런 말을 하셨다. “너 농구할 때 제일 중요한 게 뭐야?” 나는 “당연히 슛이랑 드리블이죠.”하고 답했는데, 선생님 남편이 집에 가서 농구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보라며, “실제로 선수가 슛하고 드리블하는 시간을 재봐” 하셨다.
7. 나는 정말 A를 받고 싶어서 그날 밤에 가서 타이머를 들고 농구 경기를 봤는데, 정말 선수가 드리블하고 슛하는 시간은 4 쿼터 중에서 4분도 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중요한 건, 패스하고 수비의 위치 선정을 정확하게 해야 하는 거였다. 진짜 농구 경기는 농구공하고는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벌어지고, 승패가 갈린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나는 수행평가 A를 받았다. 이때 배운 농구 경기의 법칙은 어른이 되고 사회에 나가니 더욱 눈에 선명히 보인다.
8. 나는 기자라는 옷을 입고 있다. 얼마 전에는 특정 사안을 내가 접하고, 영광스러운 상을 받았다. 한국기자협회에서 이달의 기자상을 받았는데, 농구 경기 법칙을 적용했다.
▲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 수상 소감을 말할 때
특정 사안을 접했는데, 그 사례에만 집중해 기사를 작성하고 보도했으면 아마 상을 받긴 어려웠을 것이다. 이 레이스 안에, 그 사안 외에도 비슷한 형태를 깊게 넓게 취재하니, 지역뉴스의 전국화·전국 뉴스의 지역화를 동시에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9. 글을 쓰다 보니 글이 좀 샜는데, 이 법칙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대개 사람들은 평소에 늘 일어나는 일보다는 갑자기 눈에 띌 정도로 ‘확’하고 벌어지는 사건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 어떤 사람이 평상시와는 너무나도 다른, 인생의 어떤 드라마틱한 순간에 달했는데 그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건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농구 경기는 공과 떨어진 데서 이뤄진다’ 법칙은 더욱 확고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