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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길 Sep 10. 2023

사고(思考)의 가뭄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을 해야겠다. 정년퇴직 전에는 시간의 여유가 지금보다는 쬐끔 나앗다고 생각이 든다. 연구에 지치면 가까운 바닷가에 가서 시원한 냉차를 마시면 칼날같이 예리하게 서 있던 마음이 조금은 수그러들곤 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한 단원이 끝나서야 비로소 그 때가 좋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듯이, 지금의 나의 생활이 그렇다. 월요일부터 토요일 까지 근무를 한다. 좀처럼 머릿속에 글을 써야할 테마, 또는 그 상황이 없어졌다. 마음이 조금 비어 있을 때는 아, 이것을 글로 쓰면 무언가가 정리가 되겠다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지금은 머리가 오뉴월 가뭄보다 더 심해져, 마음이 말라버린 논처럼 쩍쩍 갈라져 거북등이 되어 버렸다.     


근무 시간은 눈 깜빡일 수 있는 시간조차도 가져가버렸다. 마음이 밝아야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다. 병원은 항상 북적인다. 사람들의 마음이 가볍지 못한 것이다. 나는 약사이기는 하지만 30년 넘게 약과는 담을 쌓고 교수로서의 연구에 몰두 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약에 관련된 사회적 환경, 약의 종류, 그 많은 제약회사들, 서로들 살기 위하여 많은 환경들이 변화되었고, 내 자신도 여기에 적응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 했으며,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눈앞에서 일어나는 상황이 되었다. 아마 신들도 적자생존에 대비하지 않으면 몰락할 처지가 되었다.     

  

옛날에는 정신과 병원에 다니면 살아남기 위해서 말 못하는 시기가 있었다. 마치 예리한 눈동자들이 자신을 경계하는 느낌을 가졌을 것도 같다. 요즈음은 정신과 병원이 없으면 잠시라도 버티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사회가 사람을 그렇게 윽박지르고, 인간성을 빼앗아 갔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나는 열심히 살고 싶은데, 사회는 나를 인정해 주지 않고, 취업에 대한 기대는 점점 멀어지고, 사람과의 어울림도 겁이 나고, 그러니 방콕해서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어쩌면 인간성 회복운동이 일어나야하고, 앞서가는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끌고 가는 사회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최근에 마음에 자리잡아가는 분야 중에 하나가 우울증이다. 우울증은 자기의 희망에 대하여 내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증상으로 볼 수 있다. 나는 잘하고 싶은데 대상이 없고, 부모의 마음에 들고 싶은데 내 능력으로는  뜬구름 잡기이고, 나도 다른 사람처럼 집을 갖고 싶은데 시간이 갈수록 내 목을 내어 놓아야 하는, 깜깜한 터널 속에서 한 가닥 빛을 찾는 형상이다. 내가 환자들에게 내어 주는 약들을 보면, 나도 놀랄 뿐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지는 몰랐다. 다르게 말하면 자기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전혀 없음에 기인된다. 무언가 빛이 보이고 그 빛이 나에게 희망을 안겨 주는 일들이 생겨야 한다. 병원을 찾는 이유는 한 가닥 빛을 찾기 위함이리라. 병원에 한참동안 입원하여 치료를 했을 때는 빛이 보여야 한다. 그 전과 같거나 좋은 상황이 되지 못하면 사람은 우울해진다. 좋은 것과 맛있는 것이 있어도 마음 밖에 있을 뿐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다.     


해직된 사람은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보다는 억울한 마음이 가득해지고 회사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적개심이 타오르기도 한다. 우리는 이를 민주주의의 결과이고, 기회 균등의 결과라고 말한다. 나에게 이런 일들이 오기 전에는 나만 살면 된다는 비좁은 생각과 나쁜 일들은 자신을  비켜 갈 거라는 얕은 근거 없는 자신감도 한 몫을 하게한다.     


그 누구도 사라져가는 인간성에 대하여 책임을 갖지 않는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어서 일 것이다. 내 자신도 세상 살아가기에 급급한 이 세상에....      


이제 따갑기만 하던 태양도 그 고도를 낮추어 방안 깊이 까지 밀고 들어오고, 산산한 바람과 더불어 국화를 간지럽혀 연분홍 얼굴로 다가서고 있다. 이 시기는 아마도 가을이 오고 있구나하는 생각과, 아직은 추수하기는 약간은 빠른 시점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성급한 사람들은 농사가 끝났다고 판단하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나, 조금은 인내심으로 기다려 보기도 하고, 마음이 갈라진 곳은 접착제를 써서라도 가지런히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오늘 아침에 오늘은 어떻게 하더라도 글 한 편을 써서 올려야겠다고 생각은 했으나, 대뇌, 소뇌, 연수 등 모든 뇌가 반기를 들고 일어서서 아무런 모티브도 잡지 못하고 있다가, 정원에 예쁜 꽃을 피우고 있는 란타나가 눈에 들어 왔다. 저 나무도 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열대지방이 고향이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올여름 매일 아침 물을 주고 퇴근해 보면, 우리 태양이 얼마나 따갑던지 사지에 끌려 간 것 같이, 숨도 못 쉬고 시들어 갔다. 꽃은 타들어 갔고 집을 비운 주인을 얼마나 탓했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며칠 전부터는 열기도 가시고 갈바람도 다가와 꽃을 잘 피우겠다고 생각했으나, 꽃은 시들어 떨어지고 잎은 벼락 맞은 듯이 까맣게 타가고 있었다.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란타나를 키우는 이유는 한 가지 욕심 때문이다. 이 나무는 17℃ 이상만 되면 사철 꽃은 피운다는 생각에 사계절 내내 꽃을 보기 위해서였다. 겨울에는 거실에 넣어두면 되고, 온도가 따뜻해지는 계절에는 거실 밖 테라스에 키우면 정말 내 욕심대로 예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그렇지만 아주 큰 일거리가 된다. 아마도 란타나를 키우다가 저 세상으로 보낸 사람들은 그 이유를 잘 알지 못 할 것이다. 이 나무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술을 못 마시면 미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이다. 보통은 비가 오면 다른 식물들은 물을 주지 않아도 잘 살아가지만 이 란타나는 물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겨울에 바쁜 출근 시간에 물을 주고 나가기는 쉽지 않은 일이 될 수 있다. 무엇이라도 얻고 싶으면 그에 따른 노력은 필수적이다. 꽃은 보고 싶은데 물주기가 귀찮다면 꽃은 키우지 말아야 한다.   


                                                              [란타나]


시들어진 란타나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물을 주었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제는 토요일이라 바로 집에 와서 무성한 가지치기를 했다. 그리고 영양분을 뜸뿍 주었더니 오늘 아침에는 방긋 웃고 있었다. 그 무덥고 뜨거운 여름에 진을 다 뺐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생활에 지치면 보양을 하라. 소고기를 먹던, 염소탕을 먹던, 삼계탕을 먹든 자기 관리를 해야 한다. 

    

몸이 지치면 힘이 없어지고, 의욕이 사라지며, 심해질 경우는 우울증으로 갈수 있다. 나도 판단하건데 일주일 내내 격무에 시달리면서 자신에 대한 관리를 소홀히 한 결과 머리와 마음과 몸이 완전히 말라 버린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생물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적자생존이다. 즉, 먹자생존이다.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를 흡수해야 한다. 하루가 고달픈 사람이여, 신(神)도 피해갈 수 없는 적자생존을 기억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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