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가 핀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작년 가을녁에 옷을 벗고 나신으로 선 채 4개월을 부끄러워 낯을 들지 못하더니, 아직은 아지랑이보다는 살기어린 찬바람에 스스로를 지키고 섰다. 살을 깎아 봉오리를 만든 지 한 달 가까이 되어 가는데, 이제사 병아리 알을 깨듯 하얀 미소로 내 앞에 섰다. 1월 하순쯤에 제주도에 다녀왔는데 거기는 벌써 만발하고 있었다. 제주에는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별로 없다하는데 영도 정도 되면 서울의 영하 10 정도의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삼다 중에 바람이 그 양태를 이끌어 나오고, 폭설이 더해지며 사람이 움직이기에는 너무 힘들다고 택시 기사님이 정색으로 말을 한다. 여기 호텔의 정원에 만발한 매화가 미소 지으며 부르고 있는데 사방이 유리로 둘러싸여 가까이 갈 수 없다. 상데리아 불빛과 조명이 유리창 위에 자리 잡고 있어 만발한 매화를 느끼기에는 거추장스러움이 뒤 따랐다. 가두어진 공기 안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인지, 숨이 차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지, 어쩌면 숨 쉴 수 있는 자유마저 박탈당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나의 정원은 추위로부터 무방비로 열려있어, 햇빛, 찬바람, 비, 낙숫물들이 아주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는 곳이라서 봄이 그리 빨리 오지는 않는 것 같다. 이렇게라도 봄을 마중하려면, 꽁꽁 얼어붙은 마음에 호미질을 해야 한다. 최소한 손님을 맞는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하여.
식물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최대의 약점이기는 하지만, 이 약점을 그대로 둘러쓰고만 있지는 않다. 사람을, 동물을 차가운 창밖에 세워두면 거의 죽는다는 곡소리가 울릴 것이나 차가우면 차가운 대로, 뜨거우면 뜨거운 대로 그 생활을 이기며 벗어난다.
이빨 두 개가 난 아가가 웃는 모습으로 이제 막 미소 짓고 있는 매화는 깊은 시골에서 몇 년 만에 들어보는 옹알이와 깊은 해연과 같은 잔잔한 미소로 온 동네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하나의 사건이 된다. 순이가 넓은 뜻을 안고 몇 백 년 된 서낭당 팽나무 귀퉁이를 돌아 도시로 가고, 철이도 농사보다는 기술을 배우러 산골짝을 떠난 후로 깊은 시골에는 아가 달래는 소리보다는 혹 지나가는 나그네를 본 강아지의 짓는 소리가 더 요란한 이 골짜기에 아가의 출생은 한 동네를 살릴 수 있는 큰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이렇게 매화는 큰 기쁨과 희망찬 앞날을 가지고 왔다.
다른 곳에는 매화가 만발한 영상이 더러 올라오고 있는데 우리 집 아가는 그냥 귀엽게 미소만 짓고 있다. 엊그제 한 송이가 눈을 떴는데, 갑자기 차가워진 날씨에 미소가 멈추어버렸다. 얼마나 차가웠을까하는 생각과 어쩌면 이 차가운 날씨가 더 예쁜 꽃을 피우기 위해 거쳐 가야하는 필수 조건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움츠림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호연지기를 가르치고 있는 것 같다. 그 옆의 아가도 빼꼼 얼굴을 내밀고 세상구경을 하고 있다. 이제는 촉촉한 봄비가 다가와 덜 깬 아가들을 쓰다듬고 있다. 이 밤, 이 가랑비 속에서도 예쁜 눈빛은 창문 넘어 나를 쳐다보고 있다. 어쩜 타이핑하고 있는 나를 보며 좀 더 예쁘게 그려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 같다.
[ 아가의 미소 ]
봄의 미소는 아가를 닮아 더 환하고 귀엽게 다가와 있다. 이빨이 나지 않은 아가의 미소는 천진해서 좋고, 이빨이 한두 개 난 아가의 미소는 친근하여 무엇인가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숨겨져 있는 미소이다. 봄의 미소는 땅의 꿈틀거림으로부터 시작한다. 아틀라스 신의 어깨로도 둘러메기 힘겨운 지구를, 조그만 새싹들이 송곳처럼 비집고 나온다. 이런 힘을 가진 새싹이 봄을 끌고 온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노라면 애가 타기도, 반갑기도, 힘 장사 같이도 보인다. 여기저기서 ‘저도 왔어요’하는 소리가 들리고, 자기들끼리도 전화를 하는지 같은 시각에 땅을 밀어 올리고 있다. 올라올 땐 누구일까하고 생각했는데, 아! 작년의 그 자리에서 솟구쳐 오르는 튜울립이다. 내가 견뎌내기에도 차갑고, 어려운 날씨에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잘 이겨내고 나를 찾아왔다.
양지바른 곳에는 작년에 심어둔 카네이션이 이 겨울과 처절히 싸우더니 침엽수 아닌 풀로서, 더구나 왔다 갔다 하는 날씨의 조롱에도 몇 송이 꽃을 피우면서 지독한 겨울을 넘겼다. 모란도 나무에 잎새를 올리려고 무진 노력을 했는데 아직 잎은 나지 않고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보면 모든 식물과 꽃이 페르세포네의 마음을 따라 새 세상을 보고자 얼마나 많은 노력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청춘남녀를 맺어주는 중매쟁이가 있다. 오랜만에 기다리던 봄이 왔는데 꽃식물은 아직 다가서지 못 하는 듯한 인상이다. 봄이 왔으면 벌과 나비가 오기 전에 꽃을 피워야 하는데, 날씨라는 놈이 중매쟁이로 나서는가 보다. 봄과 꽃식물의 사이에 끼어들어 이 사이를 밀고 당기고 있다. 어쩜 봄으로서는 억울하고 꽃식물도 난감하다. 서로 눈이 맞아 희망을 띄우려면 찬바람이 끼어들어 사랑을 식히고 있다. 중매쟁이는 언제가 물러나야 할 것인데 저렇게 방훼하고 있으니 곁에서 보고 있는 장사꾼도 마음이 탄다. 그래서 꼬리자르기란 말이 나오나보다. 봄도 그냥 ‘콱’ 와서 봄을 준비하는 모든 생물에게 빛을 주었으면 하는데 꼭 겨울꼬리, 우리말로 꽃샘추위라 하지만 그렇게 반갑지는 않다. 꼬리 자르기 하는데 한 달 정도 소요되어, 안 그래도 짧은 봄을 더 짧게 만들고 있다. 봄이 조금 길어져서 여름을 좀 더 천천히 맞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는데 누가 나서 주겠는가. 또한 여름이 오지 않으면 청춘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중매쟁이가 하는 일을 그대로 믿고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지 않겠는가.
누구든, 봄이 오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회자정리, 헤어짐은 만남을 기약한다고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자연의 법칙임을 안다. 어쩜 가만히 있어도 봄은 돌고 돌아 우리에게 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보다는, 손님이 오면 멀리 까치가 먼저 알려 주듯이, 우리는 봄을 그냥 억지로 맞을 것이 아니라 한 껏 기다림에 선물처럼 오는 봄이 더욱 정겨울 것이다. 그래서 자그마한 텃밭이라도 돌을 골라내어 얕은 담이라도 만들고, 봄이 오면 조금 쉬어 갈 수 있도록 몇 송이 꽃모종과 몇 그루의 나무를 심어 긴 어둠을 뚫고 찾아오는 손님을 반갑게 맞으면 이 또한 얼마나 큰 사건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앙칼진 자갈밭을 손질하여 봄을 심을 수 있다면, 그게 어디 나 혼자만의 기쁨이겠는가.
지하에서 지내던 페르세포네가 그간에 뵙지 못한 대지의 여신 엄마 데메테르를 찾아 나서는 때가 되어가고 있다. 차고 매말랐던 대지에 새싹이 돋아나고 대지는 더욱 빠르게 초록으로 물들어 갈 것이다. 페르세포네가 지하의 신 하데스가 내민 석류를 한 알 먹었다는 것은 자신의 뜻대로 해 나가기 위한 하나의 포석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봄은 자신이 움직이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래서 봄은 미인의 손에서 만들어 진다. 그래서 봄은 예쁘고 아름다워야 한다. 그리고 그 봄은 우리가 호미질 해둔 마음의 빈터에 곱게 자리 잡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멋진 봄에 내일을 위한 씨앗을 뿌리고 간절한 청춘의 고비에서 꽃을 피우고, 따스하기도 멋지기도 한 생의 항로에 흔들리지 않는 키 잡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