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뒤엔 무엇이 있을까? ]
나는 열심히 사는 것과 성실히 사는 것을 삶의 모토로 여기고 살아왔다. 다행이랄까, 난 내 자신을 빨리 알았다고 해야겠다. 나는 머리가 좋지 않다는 것을 일찍 알았다. 그래서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도 일찍 알았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성실히 해야 했다. 예를 들면, 다른 친구들이 한 번해도 알 수 있는 일들을 나는 한 번 만에 깨우칠 수 없어 아주 열심히 반복하고 되풀이 했다. 이렇게 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아 스스로 생각해도 참 성실히 살아오고, 살아가고 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하면, 성실하지 않으면 안 되었나 하면, 우리 세대, 나와 같이 살아가고 있었던 시대를 보면, 나는 아주 촌에서 살아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까지는 국가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즉, 다른 곳의 아이들은 중학교 갈 때 평준화되어 우리말로 뺑뺑이로 들어갔는데, 촌에 사는 아이들은 자신이 가고자하는 중학교에서 시험을 쳐야 했다. 어린 마음에 몇 개만 틀리면 불합격하는 아주 격한 시대를 살았다. 고등학교 진학할 때도, 우리 다음다음 해에 태어난 학생들은 평준화로 고교에 들어갔으나, 나의 세대는 시험을 치르고 진학 했다. 그리고, 예비고사를 치르고 해당대학 본고사를 이틀간이나 치르고 진학했다.
군 입대도 그렇다. 대학원 3학기를 마치고 한 학기를 남긴 채-나중에 복학 및 박사과정 연계를 위해- 학사장교 1기 시험에 합격하여 전방 백골부대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같이 시험 치르고 떨어진 사람은 육장(육개월 장교)로 제대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나는 39개월을 복무하고 제대했는데, 육 개월 만에 그것도 장료로 제대를 했다. 육사생도들은 다이아몬드(소위) 달기위해 4년을 공부하고 훈련하는데 6 개월 만에 장교 제대는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안가는 일이었다.
나는 열심히 살 수밖에 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시기에 살아가는 방법을 습득했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있다“는 철칙을 몸소 배우며 익혀 세상을 헤어 나오는데 중요한 역할들을 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그 산골에서 일본어 공부를 엄청 많이 했고, 영어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런 일들이 제대 후에 공부를 이어 갈 수 있는 길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제대할 때까지의 적금으로 등록금을 마련한 것 등이 열심히 살아온 것의 경과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박사 학위를 가지면 대학에 쉽게 들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그 때의 시대적 배경은 석사 학위만으로도 대학에 갈 수 있는 여건이 되었는데도, 약대에서는 그렇게 학위를 잘 주지 않았고, 심지어는 재직교수 모두가 찬성해야 학위논문을 제출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고, 실질적으로 이웃 대학에서는 박사학위를 빨리 취득케 하여 전국의 대학에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교수기 되겠다고 마음 먹은지 14년만에 대학에 들어 갈 수 있었다. 늦게라도 대학에 들어온 것에 너무도 감사하게 생각했고, 거의 수위처럼, 아침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며 열심히 살았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프로젝트를 수주하여 퇴임하는 해까지 한해도 쉬지 않고 연구를 해왔다. 지방대학에서 전국의 교수와 경쟁하여 프로젝트 수주하기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의 연구파트처럼 Biotechnology(생명과학기술)는 그 이론의 발달정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낡은이론, 1-2년 전의 이론으로는 실패율이 높아 새로운 이론을 엄청 공부했고, 열심히 살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그런데 열심히 산다는 것은 나의 목표였고 그렇게 살아온 것만큼 몸에는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하고자 하는 일에 몸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답답한 일들이 일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법의 하나로 색소폰을 시작하였고, 또 무엇이든지 시작하면 열심히 했기 때문에 손가락이 부어오르고 운지를 할 수 없게 되어도 집중적으로 계속하여 몸에 손상을 주게 된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것이 글을 쓰는 것이었고 틈나면 메모지에 긁적거리는 것에 시작하여 시를 쓰고 수필을 쓰게 된다. 코로나 시절 인터넷 강의를 하면서 강의 오픈 전 30분에 자작시 낭송 파일을 상영해 학생들의 정서를 담아 주기도 하고, 그 젊은 시절의 학생들에게 팝송을 상영하여 시대가 무엇을 요구하는지에 대해서도 강의하기도 했다.
항산화 강의를 위하여 저술하여 교재로 하고, 조류관련 응용 저서, 약용자원의 산업적 응용에 대해서도 출판하여 교재로 쓰기도 하였다. 여러 가지를 해오면서 열심히 성실히 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스스로 이해하기로 하였다. 많은 특허와 국제논문 등으로 퇴임 전에 회사 설립을 위해 꾸준한 노력을 해왔는데, 퇴임 3 년 전에 일 년 동안 수술대에 3번이나 오르는 일들이 일어나 준비를 열심히 하지 못하고 지금도 미련으로 남아 있다.
열심히, 성실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지금도 정년퇴임 하자마자 종합병원의 약사로 근무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열심히 살겠다는 의지의 결과이라고 생각한다. 30년 정도 학교에서 연구만 한사람이 병원의 약국에서 근무를 해낸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큰 일이 되었다. 문제는 그래도 내가 약사이고 옛날에 약국도 해봤는데 무엇이 어려울까하고 너무 쉽게 생각했었는데, 30년간의 공백은 아주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낸 일반사람과 틀린바 없었다. 정말 스트레스 많이 받으면서 1년 반을 보낸 지금은 무엇을 못할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육체적으로는 부담이 되는 모양이다.
그래도 매달 첫째 주 토요일은 색소폰 버스킹이 있는 날인데, 전번부터 연습해 오던 곡이기는 했지만 팝송으로 연습을 하다가 보니 너무 너무 열심히 했나보다. 그 날 밤에 눈의 핏줄이 터져서 왼쪽 눈이 퉁퉁 부어오르고 눈에는 흰자가 전혀 없는 쌔까만 눈으로 되어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환자들을 보자니 너무 답답하기도 하고 왜 그랬을까하는 자책도 든다. 지금은 15일 정도 지났는데 눈의 부기는 빠졌으나 아직 흰자는 보이지 않고, 근무하는데 스스로 고생이 많다. 그래서 3 일 전에 색안경을 준비하여, 여태껏 어떤 여름에도 한 번도 써보지 못한 색안경을 이 가을에 끼고 있다.
그렇다. 나는 내 자신을 너무 잘 안다고 자부하며 살아왔고, 성실히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 까지 열심히 살아왔다고는 할 수는 있으나, 과하게 살아왔다는 생각은 못하고 살아 왔다. 그것의 결과로 3번이나 수술대에 오르고 눈이 방탱이가 되도록 만들어 놓았다.
결국은 내가 내 자신을 너무 모르고 과하게 살아 왔다는 결론이 된다. 그래도 이쯤에서 내가 너무 과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깨우치는 일이 되었다는 것은 너무 늦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내 삶에 무슨 일이 생겨 또 열심히 살아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 무엇을 지키고 살아야 할까 ]
누구라도 자신을 잘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꼭 소크라테스의 “무지(無知)의 지(智)”를 끄집어 내지 않더라도 우리는 자신을 아는데 너무 소홀하지는 않을까 돌아볼 필요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