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시절은 지구본 위에서도 찾을 수 없는, 아니 아주 작은 점하나로도 찍을 수 없는 아주 외딴 마을 이었다. 겨우 네 집이 살고 있는 동네였고, 그 이름도 너무 예쁜 새주막이었다. 어릴 때는 그 의미를 모르고 그냥 동네 이름으로 알았다. 편리한 것은 우리 집은 경남, 상남면에 속해있었고, 지귀리, 서곡리, 두대리에 둘러 싸여 있었는데, 편지 봉투에는 상남면 “새주막”이란 말만 들어가면 우리 집에 배달이 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새주막의 뜻을 찾아보니 주막은 술집으로, 새로운 주막의 뜻으로 알았다. 우리 동네는 아주 오지로 동서남북으로 몇 십리 떨어져 있어, 사람들이 술 마시러 올 만한 장소도 아니었다. 혹 가다 스님이 지나가다 들러서 세상 얘기를 전해주곤 했다. 근대화 되면서 증기 기관차가 십리 밖에 다니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기차를 타려면 우리 집 앞 샛길로 지나가곤 했다. 그래도 우리 동네 네 가구는 술을 파는 곳은 없었다. 새주막은 술을 파는 곳이 아닌 아주 동화 같은 마을, 너무도 예쁜 동네 이름이었다.
어디서 날아 왔는지, 요즈음 같은 가을에는 온 길가에 코스모스가 피어 있었고 코스모스 꽃의 이빨을 대각선으로 뽑아내어 공중으로 던지면 바람개비가 되어 하늘에서 빙빙 돌며 떨어지는 것이 너무도 아름다웠고, 고추잠자리가 바람개비를 잡으러 수직 강하하는 모습도 외딴집의 소년에게는 아주 멋있게 보여, 하루에도 몇 십번을 날리곤 했다. 이 외딴집에 우리 집으로부터 두 번째의 집 담장 안에 아주 큰 감나무가 있었는데 봄에는 감꽃을 주워 목걸이도 만들어 과자같이 따 먹고, 땡감이 열려 떨어지면 주워 와서 소금물이든 장독에 넣고, 며칠 지나면 떫은 맛은 없어지고 쫄깃하면서도 맛있는 감이 되었다.
까치밥!
나는 오늘까지도 까치밥은 감나무 맨 끝에 달려 있는 홍시 감으로, 배고픈 새들이 날아와 쪼아 먹어도 되는, 사람이 배고픈 짐승을 위하여 배려의 뜻으로 남겨둔 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요즈음은 또 다른 뜻이 있을까봐 “까치밥”을 찾아보니, 이 외의 답이 나와 있었다. 신라 24대 소지왕이 사냥을 나가 까치를 쏘았는데 떨어져서 죽지 않고 계속 산으로 도망을 가니까 하인을 시켜 잡아오라고 했다. 까치를 따라 가보니 까치는 없고 흰 노인이 나타나 편지를 주고 사라졌다 한다. 그 편지를 왕에게 바치니 거기에는 “편지를 뜯어보면 둘이 죽고, 뜯어보지 않으면 하나가 죽는다”라고 적혀 있었다. 신하들과 의논해도 별 뾰쪽한 수가 없자 왕이 직접 뜯어보니“관을 쏴라”고 적혀있었다. 이 관은 임금이 사후에 쓰려고 준비해둔 것이었다. 관을 쏘니 임금을 죽이려는 역적 2명이 숨어 있었다. 왕은 역적 둘을 죽인 셈이고, 그냥 두었다면 역적에 의하여 왕이 한 명 죽게 되는 것이었다. 이에 왕은 까치를 국조로 받들고 날을 정하여 제사를 지내고 밥을 주었다고 전해진다(김광순, 한국구비문학 II). 여기서 까치밥의 유래를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예지몽과 비슷한 이야기는 알지 못했다. 결국 은혜를 갚은 이야기이고, 뱀과 까치 이야기도 비슷한 부류로 생각된다. 보은 하는 동물의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지만, 정치와도 관련된 이야기로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이기도 하여, 동물과 사람의 정신적인 교류로 요즈음의 애완동물처럼 의리와 정겨움을 전달하려는 것 같기도 하다.
또, 외딴집에 살았던 머릿속에는 까치를 길조라고 생각하며 사람과 친밀하게 된 것은 “까치가 울면 손님이 온다”는 말이다. 까치는 아시아 전역, 호주, 북미등과 다른 곳에도 분포하며, 높은 지능과 의사소통 기술, 적응력 등으로 아주 성공적으로 널리 분포하는 조류가 되었다. 까치는 세력권(텃세)이 아주 강한 동물로써 사람과 다른 동물과의 구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낯선 사람이 들어오면 경계를 위하여 소리를 짓는 것인데, 사람들은 손님이 오는 것으로 생각 했다는 것이다. 또한, 나무꾼을 구한 지혜가 민화에 담길 정도로 사람들과는 친밀하게 지내 왔다.
[내가 알던 까치밥]
또한, 나의 생각을 깊게 하는 것은 “까치밥”이라고 하면 새가 아니면 닿지 못하는 아주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홍시 한두 개를 말하는 것으로 세뇌되어 있는데, 그 때는 민심이 지금같이 흉흉할 때에는 아닐 것 같은데, 왜 한두 개 정도를 까치밥이라 머리에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
아주 오래전, 늦가을에 포항의 보경사에 간적이 있는데 들어가는 마을 입구에서부터 나뭇가지가 찢어지도록 감이 엄청나게 많이 열려있었고, 잎은 모두 져버리고 없어 그렇게 멋진 광경을 본적이 없다. 몇 년이 지나 안 일이지만 청도에는 씨 없는 감이라 그냥 먹어도, 홍시로 먹어도, 반시로 먹어도 아주 맛있다고 한다.
문명은 사람을 감사하게 만드는 것 같다. 30년 전에는 문명이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더라도 인간성은, 정은 사람들 살기엔 아주 좋았던 것 같다. 시골 장터에는 목소리는 높지만, 그래도 정은 살아 있어서 웃기도하고, 속아 주기도 하고, 기분 좋게 막걸리도 한잔 하면서 사람 냄새 나게 살았다.
송아지 팔러 가면, 어미 소도 같이 몰고 가는데, 새끼를 다른 사람에게 팔 때에는 어미 소의 눈에서 눈물이 나고, 울부짖는 고함소리도 나고, 주인을 어떻게 믿나 보다는 세상이 왜 이렇게 각박하지 라고 했을 것 같기도 한데, 요즈음의 시장터는 아예 없어지거나, 가뭄으로 논 갈라지듯이 쩍쩍 갈라져, 정도 같이 메말라 갔다.
그저 싸움소리만 여기저기서 들릴 뿐, 까치밥을 남겨두던 그 시절의 사람냄새 나던 정은 차가운 문명 속으로 숨어들어 갔다.
그래서 까치밥은 한두 개 남은 홍시가 아님을 이제사 알겠다.
까치도 한두 마리가 아닐 것인데 보경사의 감처럼 온통 그대로 그냥 두면 어떠랴 하는 마음이 다가온다.
[모두 까치밥이었으면]
비록, 까치 뿐 만아니라 온갖 새들이 추운 겨울에 먹이가 없을 때 찾아드는 그런 인심이 까치밥의 의미가 아닐까 해서.
현재는 누구도 까치밥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까치도, 새들도 발달된 문화 속에서 살아 굳이 까치밥을 찾으려고 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