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상이 어떨지 모를 때, 대 여섯 살 때에 우리 집 주위로 4개의 냇가가 흐르고 있었는데 왼쪽의 큰 내는 아주 폭이 넓어 건너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생각과, 바로 우리 집 대나무 울타리를 거치며 흐르는 내가 있었는데 지금의 단위로 5m 정도 되는 조그마한 다리로 건널 수 있었고, 오른쪽의 냇가는 보통 때는 흐르지 않다가 장마가 지면 물이 흐르는 30m 정도의 냇가와, 논사이로 흐르며 늪을 만드는 아주 조그마한 냇가가 흐르고 있었다. 이 냇가와 우리 집 울타리를 거치며 흐르는 냇가의 위쪽으로 올라가면 큰 늪이 있었는데 발원지가 같았다. 그 발원지는 아주 넓은 습지였고 갈대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 여기에는 많은 종류의 물고기, 뱀장어, 숭어, 미꾸라지, 왕잠자리, 고추잠자리와 이들의 유생들, 갖가지 철새 및 텃새들이 다양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때만 해도 갈대는 주위 사람들에겐 아주 귀찮고 하찮은 존재였고, 혹 철새들이 자리 잡고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놀래키기도 하였다. 더구나 겨울에는 갈대밭이 얼음 밭으로 바뀌어 얼음지치기에는 아주 그만이었다. 이 외딴 동네에 얼음을 탈 수 있는 애들은 나를 비롯하여 형, 누나, 여동생 정도였고, 혹 가다가 다른 동네의 애들이 하나, 둘 정도 있었다. 그런데 자그마한 판자로 만든 스케이트 밑에 철사를 오른쪽, 왼쪽에 하나씩 고정시키고 뒤쪽에 신발의 뒷 굽이 얹히도록 각대기를 대어 만든 것이, 신나게 달릴 수 있는 스케이트였고, 어린 나이에도 정비가 가능하여 하루 종일 놀아도 지겹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다 얼음 위에 갈대가 옹이처럼 박혀있어 스케이트가 씽씽 지나가다가 갈대 옹이를 만나면 스케이트가 뒤틀어지고 몸은 나뒹굴어 언 몸에 피가 나고 정강이에 살이 각겨나가 고름이 생기고, 고름에 옷이 말라붙어 떼어내면 또 피가 나고 아프고 다시는 안가겠다고 다짐을 해보지만 조금 지나면 신나는 생각에 못 이겨, 또 얼을 지치러 간다. 불을 질러 태워도 다음해엔 또 싹이 나는 아주 끈질긴 생명이다. 그래도 하나의 장점이 있었는데 갈대꽃을 꺾어서 방 비자루를 만드는 것이 유일하게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다 대학에 가서 사진에 미쳐 을숙도에 자주 다녔는데, 이 때 다시 만난 을숙도의 갈대는 한층 옛날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고, 젊은 청년들은 이 갈대밭에서 자유를 찾을 일을 꿈꾸기도 했으며, 이때를 중심으로 시간은 흐르고 갈대밭은 점점 머릿속에서 지워져 갔다.
이때도 마찬가지였지만 갈대는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듣지는 못했다. 특히나 겨울의 갈대숲은 서로 살 비비는 소리가 사람들의 심장에 뛰어들어 외로움과 더 깊은 고통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차츰 사람의 생활이 윤택해지고, 갈대밭에서 먹을 것을 구하지 않더라도 세월은 잘 흘러갔고 사람들의 마음에는 주체할 수 없는 낭만과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노출로 갈대밭은 한 걸음씩 다가서게 된다. 그 전에는 철새 몇 마리가 갈대밭에서 짝을 찾는 노래를 불렀는데 지금은 아예 갈대밭을 자기네 집으로 차지하고 있다.
[순천 갈대 습지]
주암 저수지, 창녕 우포늪, 그리고 차츰 사람들의 뇌리에 갈대의 외형적인 모습과 고뇌하는 모습이 차츰 사람들이 마음에 차고 들어, 순천의 국가정원 습지는 그 넓은 갈대밭에 데크를 설치하여 사람들이 발 젖지 않고 아주 편안하게 갈대밭의 속삭임에 자신을 투영하기에 이른다. 그처럼 갈대는 사람을 생각하게 만들었고 그 옛날의“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말이 지금은 현실로 돌아와 있다. 아마도 갈대는 바람에 잘 흔들리는 연약함을 사람에 비유한 것 같다. 생각이라는 것은 두뇌를 쓸 수 있는 동물 중에서도 사람만이 생각의 깊이를 더 할 수 있고, 철학이라는 개념을 세우고, 이 철학 속에 우주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사람이 곧 우주이고, 모든 것을 다스리기도 하고, 다스림을 당하는 게 인간이고 또, 우주일 것이다.
우리가 자유를 쟁취할 수 있었던 것도 갈대의 끈질긴 근성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에게 배움의 권리와 살아있는 자유를 앗아간, 계엄령 하에 청춘들은 점령당한 캠퍼스에 들어갈 수도 없어 학생 본분의 길을 갈 수가 없었다. 청년들의 직업은 학생이었고 학생은 밤새 불을 밝히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투자로 공부를 해야 할 시기였다. 직업을 뺏어간 계엄군들에게 젊은 청춘은 대어들지도 말하지도 못했다. 국방을 책임져야할 군인들이 국민을 감시하는데 이용되다니, 이것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일임에 틀림없다.
[갈대의 이야기]
갈대는 겉으로 보기에는 가는 바람에도 흔들리는 존재이나 사람들은 그 끈질긴 갈대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그냥 귀찮은 존재로만 생각해 왔을 것이다. 갈대는 바람이 없으면 말을 하려하는 존재가 아니다. 특히나 환경이 견딜 수 없는 어려운 겨울에는 말은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답답한 마음을 전달하고 싶어서라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가느다란 바람에도 쓰러질 것 같으나 실제로는 더 강한 바람이 불어도 겁내지 않는 것이 갈대이다.
태풍이 와도, 폭풍이 와도, 온몸이 쓰러져도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갈대이다. 흙탕물에 휩쓸려도 말없이 억울함을 참듯이 흙탕물에 숨죽이고 있다가, 이 또한 지나가면 배시시 웃으며 일어난다. 꺾여도 절대로 죽지 않는 것이 갈대이고, 뿌리 또한 얽혀 있어 서로를 잡아주기도 한다. 보통의 나무는 넘어져 뿌리를 내어놓고 쓰러져 다시는 스스로 일어나지 못한다. 그대로 두면 살기 어려워지며, 누군가의 도움으로 일어서야 한다. 갈대는 서로 붙잡고 도우는 삶을 살고 있어 어떠한 힘으로도 제거하지 못한다. 농부는 안다. 아무리 배어내고, 불을 질러도 다음해에 또 싹을 내고일어 선다. 어쩌면 오뚝이보다 질긴 삶을 산다. 사람들은 오뚝이 인생이란 말은 알아도 갈대 인생이란 말은 하지 않는다. 그만큼 사람들은 갈대를 모른다. 사람은 갈대같이 살아야 일어서고 성공할 수 있다. 겉으로는 연약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그 어느 장골이라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친화력을 가지고 있다.
갈대숲에 들어가 보라. 수많은 새들이 갈대와 이야기 하고 있고, 실 냇가처럼 자그맣게 흐르는 물길에는 게, 짱뚱어들이 평온하게 살고 있고, 강한자들을 막아주어 갈대숲에는 생물들이 가족처럼 살고 있다. 청춘인 갈대를 보라. 청춘을 갉아 먹는 많은 벌레들이 있지만 청춘의 갈대에는 갈대 잎을 갉아 먹는 해충은 없다. 너무 튼튼하고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갈대밭을 농지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결코 갈대를 제거 할 수도 없고, 그 생명을 끊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냥 두고 다른 방법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청춘들은 이러한 갈대의 생각을 동경하기 시작했고 갈대의 이야기를 믿으려 했다. 을숙도에서 바라다 보이는 갈대는 청년들에게 움직이라는 말하기 시작했고, 청춘들은 이 말에 용기를 얻기 시작했다. 드디어 10월 26일 부산극장 골목에 청춘들이 모여들어 골목을 따라 가로로 줄을 서고 그 맞은편에는 [갯벌의 수다]
경찰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오후 3시에 청춘들은 애국가를 불렀고 애국가가 끝나자마자 경찰들은 청춘들을 오징어 낚시하듯 잡아 채 갔다. 주위 상인들을 청춘들을 감싸고 경찰에 저항하며 청춘들을 감싸 안았다. 먹는 것을 제공하고 청춘들이 하는 일에 합세하였고 다음날 그렇게도 심하게 자유를 유린당한 청춘들에게 자유는 곱게도 미소 지으며 곁으로 다가왔지만 청춘들이 자유를 보듬고 기뻐할 시간도 없이 자유는 손님처럼 왔다가 고운 대접도 받지도 못하고 청춘의 곁을 떠나갔다.
[갈대숲의 겨울 이야기]
사람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이제는 몇 세기가 지나갔고, 갈대에 대해서는 다시금 정의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더 이상 갈대는 연약한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 그 때의 생각하는 갈대는 예전에는 찾지 못했던 아주 강한 모습으로 진화했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은 “제어 할 수 없는 강력한 갈대다”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 생명이다. 현대에 맞게 정의를 해보면 “사람은 미래를 극복하는 끈질긴 갈대다”라고.
또한 갯벌은 바다와 인접해있고, 갯벌에는 수많은 갈대들이 숨을 쉬고 있다. 조금 멀리서 쳐다보면 갈대숲은 바다를 먼 배경으로 하고 넓게 퍼져 장관을 이루고 있고, 갈대가 바람을 맞이하는 광경은 꼭 몇 년 동안 기다리던 님이 나타나 그 반가움에 몸 둘 바를 모르는, 강아지가 전쟁터에서 귀환한 주인을 만나 날뛰고 있는 모습이, 갈대는 서로 부비는 언어로 사람을 반기고 있다. 갈대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나지막이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서 갈대의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다.
[자유의 Mento]
어떨 때는 태양을 숨기고 있는 모습이, 내일을 위하여 알을 품는 어미 새와 같은 모습이다. 밤새 알을 품고 고운 마음으로 세상을 밝히는 모습은, 알이 아니라 인간을 품고 지낸 아주 포근한 모습이다. 사람은 외롭고 쓸쓸할 때 갈대밭을 찾는다. 갈대와 대화하러 간다. 가만히 조용할 때는 땅속 생물의 반가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어떤 때는 우리 여동생 수다처럼, 서로 말하는 모습들이 어쩌면 인간을 닮아 있다. 외로움을 다 가져가 사람의 마음을 달래주기도 하고, 다정한 이웃같이 나에게 무슨 좋지 않는 일이 있는 것 같이 끈질기게 노려보고 답을 주려고 한다. 이런 것을 우리는 정이라고 표현 하는데, 사람은 갈대에게 잘 해주는 것도, 물질적으로 주는 것도 없지만 갈대는 꼭 빚을 진 것처럼 찾아들고 안기어 온다.
갈대는 우리의 멘토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사람은 고독을 느낄 때 흔들리지만, 밖으로 불어오는 바람보다는 자신의 마음속으로 부는 바람이 더욱 사람을 흔들어 놓는다. 이런 의미로는 흔들리는 갈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나, 밖으로는 갈대보다 덜 흔들릴 것이다. 흔들린다는 것은 무슨 일이 마음속에서 발생하여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경우이며, 고독이 찾아오고, 외로움이 엄습하고, 생각의 자유까지도 움츠리게 된다. 이럴 때는 갈대의 말들을 새겨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낄 때는 무언가 자신의 마음을 세워주고 지켜 줄 수 있는 동기가 생겨야 한다. 갈대의 웃음소리나 속삭임들이 상황을 전환 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갈대밭은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고급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챙겨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