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고향을 가자]
가을이 오면 내가 정성들이지 못하고, 다 못한 일들에 대하여 서러움이 다가온다. 눈에 보이는 것도 그리움의 대상이 되나 보다. 말없이 쳐다보고 나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저 달님, 나로 인하여 달님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 같아 더욱 안쓰럽다. 어쩌면 저 초승달이 그리움을 잉태하게 만들고, 그믐달이 애잔한 기다림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나는 저 달님을 위하여 해 준 일이 없는데, 저 달님은 꼭 내 마음의 크기에 따라 얼굴을 변화시키며 나를 지켜온 것 같다.
나에게 기쁜 일이 생기면 은근한 미소로 쳐다보기도 하고, 슬픈 일이 생기면 그믐달처럼 애처로이 쳐다보고 있다. 이런 일들은 가을이 되면 달님에게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든다. 저 위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나의 걸음걸이가 왜 비틀거리는지를 아는지, 어제 쓴 시나 글이 달님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지는 않는지, 파란 강물에서 목욕하고 난 뒤의 기분은 어떤지, 달을 쳐다보고 짓고 있는 저 강아지의 웃음소리가 애처롭게 들리지는 않는지, 옛날 지붕 위에 하얗게 열려있는 저 박 덩이가 달님에게 전하는 마음을 듣고나 있는지, 강 따라 길게 피어 있는 코스모스가 흔들리는 것이 달님을 부르는 손짓으로 보이는지, 가을이 깊어감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 저 단풍의 옷값은 얼마나 되는지, 어깨 위에 달빛이 쏟아질 때 실제로 그 무게를 느끼는 건지, 아니면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말들이 들리기나 하는지, 한 밤에 귀가하는 스님의 저토록 고독스러운 뒷모습이 달님과 닮아 있지는 않은지 참으로 물어볼 것도 많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같은 하늘에 지내고 계시는 우리 엄마가 달님 덕분에 잘 지내고 계시는지도 알고 싶고, 보고 싶기도 하다. 꿈에서도 잘 뵐 수 없는 엄마의 얼굴을 달님의 주선으로 한번 뵙기라도 하면 좋겠다. 울 엄마도 틀림없이 저 별이 되어 계실 것인데, 아마도 달님의 귓속말을 잘 듣고 계실 것 같다. 별, 그 소리만 들어도 준비도 되지 않은 눈물이 난다. 별빛이 아름다워 나는 눈물도 되겠지만, 울컥 울 엄마가 아스라이 보이는 같기도 하고, 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안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별빛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따스해야 한다. 별빛이 차가우면 울 엄마도 차가운 곳에서 지내실 것 같아 더욱 마음이 저려온다.
[가을 - 그 아픔]
옛날 엄마 손잡고 산허리에 걸쳐있는 고구마 밭에 물을 주던 생각도 나고, 커다란 홍수로 이루었던 전 재산을 물에 다 흘려보내고도 벌근 눈으로 감싸주던 울 엄마, 언젠가 처마 밑에 왼쪽 날개를 절며 나타난 흰나비가 보리타작 할 때 다친 엄마의 왼팔이 아닐까하여 눈물짓던 때도 있었다. 왜 그리 엄마만 생각하면 눈물이 날까. 다하지 못한 나의 정성이 눈물을 불러오는 것 같아 섧기도 하다. 가을이 설운 이유는 엄마에게 다하지 못한 정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원래 바보로 태어나는 것 같다. 모두 잃어보고, 당해 봐야 눈을 뜨는, 참으로 어리석게 태어나는 것 같다.
[가을엔 고향으로 가자]
고향이 없어진 사람에게도 가을이 또한 쓸쓸할 것 같다. 고향은 살면서 마지막으로 들러 보고 싶은 곳이다. 잘 된 사람은 잘 되게 해주어서 감사하다는 뜻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에게는 다시 땅을 짚고 일어 설 수 있는 마음을 세울 수 있는 곳이다. 살면서 언젠가는 가고 싶은 곳이고, 그 때 그 시절이 동화처럼 머리에 흘러 갈 때 그 정경은 한 사람의 눈물을 받아 내기엔 충분한 곳이 또한 고향이다. 나는 어쩌면 ,사회, 국가의 발전에 따른 개발로 고향이 없어진 사람이다. 푸른 초원에 방울을 단, 젖 짜는 아가 염소가 들판을 뛰어 놀고, 품에 안고 뽀뽀를 하던 그 어린 때의 고향이 사라졌다. 그리고 홍수로 온 마을이 다 잠긴 적이 있지만, 키 큰 버드나무, 느티나무, 뭉게구름, 고추잠자리 등은 남아있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도 찾기 힘들다. 삶이 힘겨울 때 고향의 공기를 크게 들이키면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 냄새조차 맡을 수가 없다. 다만 개 짖는 소리가 하늘을 가를 때 달을 쳐다보는 애닯은 마음만 남아 있다.
[가을- 이글거림]
사람들은 이 가을에 많은 아쉬움을 가지고 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겨울에 아쉬움을 이야기하기에는 마음이 너무 얼어붙을 것 같고, 그래도 한 계절이 남고 무언가 해결 할 수 있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곳이 이 가을인 것 같다. 옛날 허수아비는 참새를 다 좇아내지 못한 아쉬움에 이빨이 두세 개 빠져 있고,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기도 했다. 지금의 허수아비는 아예 AI를 탑재하여 참새들이 미치지 못하는 생각에 맞추어져 있을 것 같다. 누구에게든 아쉬움은 많을 것이다. 아마도 사람은 아쉬움을 메꾸기 위하여 사는 생명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또한 가을은 기다림의 계절이기도 하다. 사람이 사람을 기다리던, 계절을 기다리던, 멀리 떠나간 사람을 기다리던, 이런 기다림은 그리움을 낳는다. 그리움은 기다림 없이 결코 눈물 맺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 그리움도 어쩌면 살을 애는 아픔일 줄도 모른다. 기다림은 대상이 없을수록 더욱더 애절하다. 어떤 사고로든지 앞서간 아이들, 세월호가 그렇고, 이태원 사고가 그렇고, 군대 간 아이가 그립고 아프다. 사랑은 바보이어야 기다림이 가치가 있을 것 같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바보는 안 올 줄, 못 올 줄 뻔히 알면서도 기다림에 지치지 않고 익숙하게 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기다림을 배울 필요가 여기에 있다.
이런 아픔들은 다르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내일의 일로 이어져 간다. 아쉬움을 막아야 하고, 다하지 못한 마음을 살려야 하고, 아픈 상처들을 삭여야 하고, 이루지 못한 것들을 새겨야 하고, 기다림에 익숙해야 하고, 그리움을 승화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들이다.
그래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잊으려는 망각이 아니라 단풍이 소리 없이 가만가만 다가서서 우리의 마음을 녹이듯이 가을은 모든 일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가을은 그냥 계절의 순환에 따라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다림에, 그리움에, 아쉬움에 대답하기 위하여 조심스레 다가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가을 - 그 기쁨]
나에게 가을이 오면, 그 뜨거운 여름이 있어서 가을이 오고, 풍족함이 따라온 것으로 마음을 잡는다. 그리하여 가을에는 풍족하다는 마음보다 내가 일군 것만큼 받아들여 행복을 찾고자 한다. 가을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특히 인생에 있어 가을은 먼 산위의 억새가 피어 울고, 황홀하지는 않더라도 고운 석양이 일고, 더 이상 부족한 것도 없는 그런 가을이 되었으면 한다. 꼭, 단풍이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스며들어 단풍을 만들 듯이, 나의 마음에도 들뜨지 않는 조용한 가을이 찾아 들기를 바란다. 나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일이 있었을 지라도 살아 있음에 일어난 일라고 생각하겠다.
그리고 한해의 노력에 대한 어떠한 어려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며, 나에게 와준 가을에 대해서 한없는 고마움과 스며든 단풍처럼 마음도 곱게 물들이고, 주변의 모든 생명에 대하여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