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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비 Oct 08. 2022

불안정 애착, 희망의 빛이라는 착각 (1)

<애착 형성과 애착 유형>

     긴장한 탓에 홍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하고 익숙하지 않은 손길로 정장을 꺼냈다. 

세탁소에서 찾아온 하얀 와이셔츠는 풀 먹여 다린 듯 단단한 마음만큼이나 뻣뻣했다. 정성스러운 손길로 셔츠를 입고 타이를 맨 채 동동거리는 발걸음으로 그렇게 꿈에 그리던 사무실이란 곳에 도착했다. 면접 때 본 적 있는 입사 동기들과 멋쩍으면서도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설렘 반, 기대 반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인사과 직원이 들어왔다. 출근 첫날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듣고 앞으로 일하게 될 팀을 배정받은 뒤 신입 사원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인솔자를 따라나섰다.


     그날은 무척 더운 여름날이었다.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는 강렬한 햇빛에 땀을 뻘뻘 흘리며 팀원들과 인사를 하고 있을 때 그녀가 들어왔다.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자기 차례를 기다리다, “이희망 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말과 함께 인사를 하는데 그녀 뒤로 환한 햇살이 떠올랐다. 그 밝은 빛이 사무실에 들어올 때부터 내 등을 뜨겁게 태우고 있는 햇빛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에게서 나는 빛 때문인지 혼란스러웠다.


     “인사들 다 나눴지. 여기는 오늘부터 우리와 함께 근무할 신입사원 꽃비 씨. 모르는 게 많을 거니까 친절히 잘 알려주세요. 그럼 누구를 사수로 할까? 아, 희망 씨. 요새 업무가 많으니 당분간 함께 일하면 되겠네.”


     그날 등줄기로 흐르던 땀을 식힐 새도 없이 나는 그렇게 그녀의 부사수가 되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갔다. 지금이야 인턴 경력이 필수인 시대지만 그땐 제도 자체가 없었다. 그 덕에 졸업 전까지 해본 건 현장 실습이 고작이라 새롭게 익히고 배워야 할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혼자 끙끙대며 늦게까지 야근을 했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인생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결과를 만들어 낸다. 내게 기적같이 찾아왔던 그 일은 바닷가의 뻘처럼 계속 빠져들기만 하던 수렁 같은 이십 대의 삶에 한 줄기 빛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팀장님의 갑작스러운 호출이 있었다. 여전히 그녀와 웃고 떠들며 일하다가 사무실로 향했다. 뭔가 싸늘한 기분이 들었다. 계절이 변하며 자연스레 불어오는 찬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내 안엔 어릴 적에 만들어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주 예민한 감각이 있다. 그곳의 분위기와 상대의 표정을 통해 감지해내는 까실거림은 거친 옷감이 부드러운 목을 긁어내듯 나를 매우 거북하게 만든다.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곳에 충만해 있는 거북함을 느꼈다.


     “부르셨습니까? 팀장님.”


     “꽃비 왔구나. 이리 앉아라. 차 한잔할래?”


     “괜찮습니다. 일하면서 희망 선배하고 마셨습니다.”


     어떤 용건일까 싶어 커피 한 잔이 내키지 않았다.


     “응 그래. 다름이 아니라 지방 공장에 인력 충원이 있다고 인사과에서 연락을 받았어. 그런데 하필이면 우리 팀에서 차출하는 것으로 결정이 됐네. 그래서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꽃비 씨가 가줬으면 하는데.”


     너무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갑자기 마음속에 훅하고 걸리는 것이 있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사수라 불렀고 선배라 부르며 따라다녔던 그 사람 말이다. 삶에 아무런 동요가 없다면 소중한 게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급격한 변동이 있을 때 가슴을 절절히 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 인생을 온통 휘감고 있는 것이다. 거절한다고 될 일이 아니란 걸 알았기에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머리가 너무 아팠다. 싸늘한 찬바람에 상기된 얼굴을 식히며 길을 걷다가 다시 그녀 옆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그녀 옆에 있었다. 왠지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헤어지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뭔가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너무 과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기억에 남을 만한 작은 정성을 그녀 곁에 남겨두고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연구소 출근 마지막 날, 달콤한 초콜릿과 작고 예쁜 화분을 맞은편에 있던 그녀 자리 위에 올려 두고 나왔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 헤어졌다.

     현장에서의 생활은 연구소와 다르게 매우 거칠었다. 사람들 사이에는 알력 싸움이 존재했고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며 상대방을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개인의 이기심이 충만하고 오로지 경쟁만을 일삼으며 앞만 보고 달려갔다. 그리고 나는 이런 조직 생활이 너무나도 싫었다. 어쩌면 이런 사회생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가 이상한지도 몰랐다.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이면 물고 뜯으려 달려드는 그들을 보며 환한 웃음꽃의 그녀 얼굴이 자주 생각났다. 


     그렇게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나고 그녀와 간간이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지내던 중 일주일간의 교육 발령이 떴다. 교육 장소는 그녀가 근무하고 있는 연구소 옆의 인재 개발원이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지만 그날만큼은 왠지 상큼하고 밝았다. 바쁜 손놀림으로 세면과 면도를 하고 엊저녁 미리 골라 둔 옷을 입고 가장 깔끔한 모습을 한 채 밖을 나섰다. 인재원으로 향하는 길이 합격 통지를 받고 첫 출근하던 날보다 더 떨렸다.


     “선배, 잘 지냈어요? 나 교육 때문에 연구소 올라가는데. 요새 많이 바빠요?”


     “어머, 언제 올라와요? 화분에 물 줄 때마다 꽃비 씨 생각났었는데. 올라오면 꼭 술 한잔해요.”


     앞에 서 있던 강사의 목소리는 몽연의 환청처럼 희미했다. 그리고 아예 멈춰버린 듯 손목 위의 초침은 흘러가지 않았다. 그렇게 맘 졸이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그날의 석양이 강의실 창밖에 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개월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는 그녀 앞에 다시 설 수 있었다. 그리고 붉은 석양이 내리기 시작하던 빨간 하늘 위로 환하고 밝은 그녀의 얼굴이 비치기 시작했다.


     “꽃비 씨, 너무 오랜만이에요. 공장에서 고생이 많으시죠? 너무 갑자기 발령 나서 서운했어요. 뭐 먹고 싶어요?”


     보자마자 속사포처럼 쉼 없이 말을 쏟아내는 그녀를 보며 살짝 미소를 띤 채, 그녀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하하하, 어서 갑시다. 배가 고프답니다. 오늘 맛있는 거 먹으려고 엄청나게 기대하고 왔어요! 어서 가시죠.”


     주차장에 서 있던 그녀의 차에 올라 창문을 살짝 열었다. 차창 밖에서 들어오던 거친 바람결에 연녹색 나뭇잎의 청량감이 섞여 있었다. 그 시원한 공기를 폐부에 마음껏 들이쉬며 단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자주 들르던 단골 가게 앞에 차를 세워 두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눈에 띄지 않는 구석진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구린 게 있으면 구석을 찾듯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단둘이 빠져나온 게 마음에 걸리기도 했지만, 이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좁디좁은 구석으로 그녀를 밀어 넣으며 그녀의 마음이 나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기를 바랐다. 


     파전과 산사춘이 올라왔다. 뚜껑을 따고 봄꽃을 닮은 연분홍 술을 그녀의 잔에 가득 따랐다. 작은 테이블 사이를 채우던 촉촉한 눈길에 취해 은근히 달아오르는 몸을 느끼며 끝나지 않는 대화를 나눴다. 짙게 깔리는 어둠만큼 술병이 쌓였을 때, 차가운 새벽 공기를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따라 유독 달빛이 밝았다. 짙은 어둠 속에 휘영청 떠오른 달빛을 받으며 아무 말 없이 걷다 인재원 숙소 앞에 도착하고 말았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건만 잘 가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다 눈을 들었을 때 따뜻하고 보드라운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 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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