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상
어쩌면 소나무보다 더 오래, 더 깊게 우리 곁에 뿌리내린 나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저는 십여 년 넘게 식물 이야기를 써 오면서도 이 나무만은 한 번도 제대로 꺼내 놓지 못했습니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가장 늦게 불러 보게 된 이름. 바로 느티나무입니다.
저의 고향은 첩첩 산골의 대명사 ‘무주구천동’이라 불리던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였습니다. 그 산골 마을 어귀에는 언제나 ‘둥구나무’라 불리던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무라기보다 마을의 중심이었고, 약속이었고, 기둥이었습니다. “점심때까지 둥구나무 앞에서 오라”, “둥구나무 아래서 보자”라는 말은 장소 설명이 아니라 신뢰의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기쁜 날엔 그 아래서 돼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고, 슬픈 날엔 그 그늘에서 한숨을 눌러 삼켰습니다. 둥근 그늘은 늘 사람보다 먼저 와 있었고, 늘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몇 아름은 족히 되는 굵은 줄기를 끌어안고 숨바꼭질을 하던 어린 시절, 느티나무는 저에게 거대한 놀이터이자 시간이 멈춰 있는 이정표 같은 존재였습니다. 바람이 불면 잎사귀들이 서로 부딪히며 내던 소리는 지금도 귀 어딘가에 그대로 매달려 있습니다.
느티나무의 학명은 Zelkova serrata,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 교목입니다. 우리나라 들판과 마을 어귀, 서원과 정자, 향교와 절 마당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큰 나무이기도 합니다. 수백 년을 사는 장수목으로 알려져 있으며, 가지는 사방으로 넓게 퍼져 둥글고 웅장한 수형(樹形)을 이룹니다. 꽃은 4~5월 잎과 함께 소박하게 피고, 열매는 10월이면 작은 공 모양으로 익습니다. 목재는 단단하고 결이 고와 예부터 절집의 기둥, 대청마루, 사랑방 가구에 귀하게 쓰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나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老巨樹)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나무 역시 느티나무입니다. 수백 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며 마을의 생성과 소멸, 사람의 탄생과 이별을 모두 지켜본 나무. 느티나무는 그 자체로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생명체입니다.
느티나무의 이름에는 그 세월의 두께가 고스란히 숨어 있습니다. ‘늘 그 존재의 티를 낸다’는 뜻의 늘티나무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고, 제가 유난히 마음에 품고 있는 이야기는 ‘늦티나무’라는 해석입니다. 젊은 시절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다가, 오십 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 나무껍질이 비늘처럼 벗겨지며 비로소 깊은 ‘티’, 곧 자태가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한자 이름으로는 괴목(槐木), 혹은 규목(槻木)이라 불렸습니다. 이는 단순한 수목명이 아니라 마을을 지키는 나무, 도리와 모범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함께 품고 있습니다. 느티나무는 빨리 빛나는 법이 없습니다. 대신 오래 견디고, 천천히 깊어집니다. 그 느린 성장의 방식이야말로 느티나무가 사람에게 남기는 가장 큰 가르침인지도 모릅니다.
느티나무의 꽃말은 운명(運命)입니다. 이보다 더 정확한 단어가 있을까 싶습니다. 떠나지 않고, 변하지 않고, 한 자리를 지키며 수많은 사람의 만남과 이별, 환희와 좌절을 모두 지켜본 존재.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 곧 운명에 가장 가까운 나무입니다.
느티나무와 관련된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전북 임실 오수(獒樹)의 의견(義犬) 설화입니다. 불길 속에서 주인을 구하려다 죽은 개를 묻고 그 위에 꽂은 지팡이가 자라 큰 느티나무가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나무가 마을의 수호목이 되며 ‘오수’라는 지명이 생겨났다는 전설입니다. 의리와 희생, 기다림과 수호의 상징으로서 느티나무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사람의 덕목을 대신 서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제 어린 시절의 둥구나무는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해마다 봄 성묘를 가는 날, 우리는 여전히 그 나무 아래에 차를 세우고 산길을 오릅니다. 변한 것은 차량뿐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그 그늘입니다.
올해 여든다섯이 되신 큰언니께 여쭈었더니, 언니의 어린 시절에도 바로 그 굵은 가지에 그네를 매달아 타고 놀았다고 하더군요. 한 세기의 시간을 품은 나무 아래에, 언니의 어린 시절과 저의 어린 시절, 그리고 오늘의 자동차가 함께 서 있는 풍경. 그 장면 앞에 서면 깨닫게 됩니다. 느티나무는 결코 과거형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 속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살아 있는 역사서라는 것을.
그리고 제 방 한가운데에는 느티나무로 만든 작은 탁자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국악을 하는 후배의 아버지께서 손수 깎아 만들어 주신 탁자입니다. 매끈하게 닳은 상판 위에 손바닥을 올릴 때마다, 저는 이상하게도 고향의 둥구나무를 떠올립니다. 숲에서 살던 나무가 집 안으로 들어와 다시 시간을 나누어 주고 있는 듯한 느낌 때문일까요. 그 탁자 위에서 저는 글을 쓰고, 책을 읽고, 계절을 받아 적습니다. 나무는 여전히 제 삶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이 글을 통해 마음속에 오래 미뤄 두었던 느티나무에 대한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 기분이 듭니다. 늘 그 자리에 변함없이 서서, 한 시대를 넘어 우리 모두의 삶과 운명을 묵묵히 지켜 주는 나무. 가장 흔해서 가장 귀한 존재, 느티나무. 저는 오늘도 그 그늘을 마음속에 한 번 더 불러옵니다.
느티나무(榉木) 요약 정보
· 분류: 느릅나무과 낙엽 활엽 교목
· 학명: Zelkova serrata
· 수명: 수백 년 이상 생존하는 대표적 장수목(長壽木)
· 개화 시기: 4~5월, 잎과 함께 소박한 꽃이 핌
· 결실 시기: 10월, 작은 공 모양의 열매 형성
· 특징: 사방으로 넓게 퍼지는 둥근 수형(樹形), 넓은 그늘
· 이름 유래: ‘늦게 티가 나는 나무(늦티나무)’에서 비롯되었다는 설
· 한자 이름: 괴목(槐木), 규목(槻木)
· 상징: 마을의 수호목, 중심목, 공동체의 기억
· 꽃말: 운명(運命)
· 전설: 전북 임실 오수(獒樹) 의견(義犬) 설화와 연결
· 쓰임: 전통 건축재, 대청마루, 사랑방 가구, 탁자 재료
· 문화적 의미: 만남과 이별, 잔치와 제례, 세대의 시간을 품은 나무
https://youtu.be/n1Sj70scb14?si=KrAdtpI6nfb9KA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