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 『여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한 한강 작가론
한강 작가의 노벨상 소식을 듣고 너무 설레서, 몇 년 전 써 놓았던 작가론을 다시 꺼내든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니. 한 달 치 잠을 다 잔 것 같다.
문인 집안에서 태어난 한강은 그의 첫 단편집 『여수의 사랑』에서 시작해 맨부커 상을 수상한 『채식주의자』, 최근작 『작별하지 않는다』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써왔다. 기존의 연구자들은 대부분 한강의 소설에서 초기의 예술가가 중심이 되는 작품과 여성의 식물적 욕망이 두드러지는 작품, 국가 폭력을 다룬 작품을 분리시켜 논의해 왔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한강의 작품들을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흐름으로서 보아 『여수의 사랑』을 중심으로 이 단편집이 어떻게 한강 소설의 흐름 속에서 이후 작품들의 문을 열었는지 논의하고자 한다. 여기에 있어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한강의 인식과 거기에 대항해 또한 인간이 밝히는 촛불의 형상이 한강의 주제 의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듯 보인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한강의 작품세계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어둠에서 탈피해 빛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곧 다시 말해 생(生)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며, 한강과 그의 아버지가 관심을 가졌던 불교적 세계관과도 상통한다. 여기서 인간의 육체는 그곳에 닿지 못하게 하는 장애로 기능하거나 혹은 폭력의 경험으로 인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육체의 불가능성에 대한 고민은 『여수의 사랑』 속 가족의 죽음을 겪은 인물들이 애도에 성공하지 못하고 자기파괴적인 행동을 이어가는 데에서 시작한다.
한강 소설의 인물들에게 육체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애도를 통해 빛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데 있어 장애물이다. 그들의 육체는 자신이 폭력적으로 경험한 인간에 스스로도 속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만든다. 이후 『내 여자의 열매』나 『채식주의자』에서 한강은 육체의 장애를 일으켰던 시각, 청각을 없애고 오직 촉각만을 남겨 놓았으며,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로 가면 영혼이 등장하며 모든 신체적 감각은 사라진다. 이렇게 한강은 육체의 소진을 통해 오히려 무한한 잠재성을 보여주는데, 이는 모두 빛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 한강은 결국 그의 소설을 통해 모든 고통받는 사람들을 빛으로 이끌고자 했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주제의 흐름을 살펴보며 한강의 삶과 단편집 『여수의 사랑』에서 그 근원을 찾고자 한다.
『여수의 사랑』은 총 7개의 단편으로 구성되는데, 이 단편들은 마치 한 이야기의 변주처럼 느껴질 정도로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이러한 이야기는 스토리 상 가까운 가족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표제작 「여수의 사랑」에서 ‘정선’은 폭력적인 아버지에게서 여동생과 함께 도망치다가 동생의 손을 놓는데, 그로 인해 동생이 죽고 혼자 살아났다는 죄책감을 떠안는다. 결국 정선은 그때의 트라우마로 계속해서 자신의 ‘더러운 손(『여수의 사랑』 53쪽, 이하 쪽수만 표기)’을 씻는 등 결벽증에 시달린다. 마찬가지로 동생이 죽을 때 ‘달려가지 못했다(70쪽.)’는 죄책감으로 끊임없는 달리기 욕망을 표출하는 ‘인규’(「질주」), 자신 몫의 일을 하다 죽은 상태나 마찬가지가 된 동생에 죄의식을 가진 ‘동걸’(「야간 열차」),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병적인 발작을 일으키는 ‘재헌’(「저녁빛」), 딸이 죽고 자꾸만 나무를 태우는 ‘황씨’(「진달래 능선」) 임신한 아내가 죽고 자해하는 ‘명훈’(「어둠의 사육제」)은 모두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당시의 상황을 지속적으로 상기하며 이상행동을 보인다. 그들의 내적 상태는 환청이나 환영, 결벽증, 육체적 통증 등으로 발현되어 그들의 일상생활을 구속하며 ‘무력한 육체(280쪽.)’는 빛을 향해 가기 위해서 그들이 탈피해야 할 것이 되는 것이다. 『여수의 사랑』에는 ‘자신의 육체에서 빠져나갈 수 없(77쪽.)’음을 자각하는 ‘인규’, ‘기차 바퀴 소리(86쪽.)’의 환청에 시달리는 ‘동걸’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몸뚱이까지 부숴뜨려야겠다는 것처럼(150쪽.)’ 구토를 하는 ‘재헌’과 ‘정선’이 있다. 이때 스스로의 몸을 파괴하는 인물들의 행위는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자각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동네 아이들이나 아버지 등 인간의 폭력적인 행위가 이들의 죽음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강은 어느 인터뷰에서 ‘인간이 어떤 행동까지 할 수 있고, 나 자신도 그런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의 육체가 행한 폭력적인 행위를 경험하고 그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 인물들은 곧 자기 자신 또한 육체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서 자신의 몸을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폭력적이지 않게 되려는 몸부림일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한강의 고민은 어린 시절 광주 사진첩을 보았던 경험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열두 살 때 어른들 몰래 열어본 ‘그 페이지에 담긴 압도적인 폭력의 증거를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몰랐’다고 회상한다.
그럼에도 한강에게 ‘인간은 기차 선로에 떨어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지만, 아우슈비츠에서처럼 끔찍한 폭력의 가해자이기도 하다.’ 한강은 폭력의 사진 말고도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폭력으로 다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줄을 선 사진을 보았다고 말하며 그러한 이중적인 인간의 본성에 대해 고민했다. 이때 기꺼이 타인을 돕는 인간의 행위는 이후 한강 소설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촛불’의 원형이 되며, 인간으로 인해 생겨난 누군가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타인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 우선 촛불의 의미에 앞서 타인의 존재가 한강 소설의 서술자로서 두드러진다는 점을 살펴보겠다.
한강의 소설에 등장하는 서술자의 목소리는 상실을 겪은 이들의 주변에서 그들을 관찰하는 또 다른 인물의 것이다. 그들은 타인의 고통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데, 작품 속에서 이 두 인물은 동일시되어 있다. 이러한 동일시된 관찰자의 존재는 한강 소설 속 인물들이 왜 그렇게 대상의 죽음을, 그들과의 이별을 두려워하는지 그 실마리를 제시한다. 이는 그 대상과 이별하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잃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상실을 겪은 인물들은 자신의 한 부분을 잃은 것이 되고 이러한 경험은 ‘난자된 흔적(15쪽.)’으로 남게 된다.
이러한 인물들의 동일시는 여러 작품들에서 유사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여수의 사랑」에서의 ‘정선’은 ‘자흔’에게서 자신의 고향인 여수의 냄새를 맡고 그녀에게 ‘가지 말아요(56쪽.)’라고 애원하며 그녀와의 이별에 고통을 느끼게 되며, 여수에 가고자 하는 ‘자흔’의 욕망을 똑같이 느낀다. 또 「야간 열차」의 ‘나’는 야간 열차에 대한 ‘동걸’의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를 ‘나의 분신(89쪽.)’으로 여긴다. 「어둠의 사육제」의 ‘나’와 ‘명훈’에서는 그 동일성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마치 무거운 짐을 하루하루 약속된 장소에 조금씩 부려놓으면서 나아가는 짐꾼’(249쪽.)과 같아 보이는 ‘명훈’은 ‘나’가 이사를 하는 모습과 겹쳐지며, 「붉은 닻」에서 밤마다 배회하는 ‘동영’의 행동은 ‘동식’에게서 똑같이 반복된다.
이렇게 유사한 두 인물의 등장은 고통을 보고 트라우마를 외면화하는 타자의 시선은 마치 그 당사자의 것인 양 보이게 한다. 이렇게 한강의 소설에서 이들이 겪는 상실은 여러 인물들 간 연결되며, 가족을 잃은 누군가와 그를 잃는 누군가의 등장은 상실과 기억을 통해 다수의 사람을 하나로 결합시키고 서로의 고통에 귀 기울이게 만든다. 이렇게 타인의 고통에 관심을 갖는 한강 소설의 인물들은 뉴욕타임즈에 게재한 기고문에서 보이듯 ‘인간이 인간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방어선은 이러한 모든 편견을 극복하고서 완전하고 진정한 시각에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썼던 한강 자신의 의지로 보인다.
이렇게 『여수의 사랑』에서는 인간의 트라우마가 수면 밖으로 드러나고 이에 빛으로의 탈피를 꿈꾸기 시작하게 된다. 그들은 ‘왜 그런 짓을 해요?(13쪽.)’, ‘왜 이러십니까(206쪽.)’ 하는 반복적인 질문을 던지며 상실로 인한 자기파괴적인 행동을 보이는 이들에게 그러한 행동을 멈추라고 요구한다. 그들은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불을 켜세요(267쪽.)’라고 애원하며 그들을 살게 하고자 분투한다. 이는 한강의 ‘인간의 존엄성이 꽃피는 곳에 도달하고 싶었다’는 말과 겹쳐지며 인간의 폭력성 속에서도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한강의 자각이 소설의 발화로써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단편집 『여수의 사랑』에서의 탈피 욕망은 다소 무력하고 수동적으로 나타난다. 「질주」에서는 ‘새벽을 기다리는 일 외에 그가 할 일은 없었다(76쪽.)’고 말하며 그의 달리기는 아무 실천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와 같이 현실을 탈출하고자 하는 ‘재헌’이 가고자 욕망하는 ‘온종일 해가 지고 있는 나라(165쪽.)’는 그가 얼마나 빛을 절실하게 갈망하고 있는지 암시하지만, 그것이 ‘저녁빛’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여수의 사랑』 속 인물들의 욕망은 다소 무기력하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너는 음지에서 자라는 꽃과 같다(237쪽.)’는 구절은 이들이 이후 밝은 곳으로 나아가리라는 희망을 말한다. 그들이 현 상황과는 다른 ‘새벽’을 인식한다는 것 또한 한강의 작품세계에서 앞으로 갈 길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빛과 어둠에 대한 인식은 이후 한강의 다른 작품들에서 보다 실천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인물들은 『여수의 사랑』에서와는 달리 배반도 아니고 자기파괴도 아닌 다른 방식으로 그 고민을 해결해가려 몸부림친다. 이는 육체의 한계를 벗어 던지고 기억과 하나되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한강은 『여수의 사랑』에서 무엇 때문에 그들이 탈피 욕망을 갖게 되었는지 드러낸 후 이후 작품들에서 어떤 발전적인 방식으로 빛을 향해 갈 수 있을 것인지 고민했던 것이다.
대면한 삶에서 벗어나 빛 속으로 가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은 『여수의 사랑』에서 시작되며 한강의 이후 소설로 갈수록 그 주제 의식은 인간의 신체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적으로 변주된다. 이때 육체가 중요한 이유는 한강 소설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혐오감 때문인데, 폭력에 대한 혐오는 이후 작품들에서도 아버지, 가부장적 상징질서, 군인 등에 대한 것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때 육체를 매개로 자기 자신 또한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할 때, ‘나는 어쩌지 못할 인간이다(79쪽.)’라는 인식에서 자신 또한 스스로가 혐오하는 인간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여기에서 탈피하여 빛을 찾아가려는 한강 소설의 흐름은 시작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채식주의자』를 거쳐 『소년이 온다』에 이르러 육체의 모든 가능성의 소진이 만들어내는 잠재성을 실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빛을 향해 출발하여 이후 도달한 상태는 들뢰즈의 이론을 빌리자면 모든 가능성이 소진된, 따라서 무한한 잠재성을 가진 상태로, 생각될 수 있다. 여기서는 『여수의 사랑』과 함께 『검은 사슴』, 「내 여자의 열매」,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흰』을 간단히 살펴봄으로써 『여수의 사랑』에서 시작된 한강의 작품세계가 어떻게 반복되며 확장되어 오고 있는지 논하고자 한다.
앞서 『여수의 사랑』에서 상실의 경험을 한 인물들이 어둠에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이를 인식함에 따라 빛의 세계로 탈피하고자 하는 욕망을 보인다고 이야기했다. 이러한 빛과 어둠의 대비는 『검은 사슴』에서도 부각된다. ‘의선’의 고향이 해가 잘 들지 않는 ‘어둔리’라거나 어두운 탄광 안에 갇히는 모습은 『여수의 사랑』에서 미래를 상실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그들은 모두 ‘탄광’ 밖 세상, 빛이 쏟아지는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욕망한다. 그러나 ‘의선’은 『여수의 사랑』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육체를 벗어던지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은 「내 여자의 열매」, 『채식주의자』로 이어지며 실천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 두 작품을 『여수의 사랑』의 연장선에서 본다면 여성보다는 인간이라는 더 넓은 범위에서 한강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성 인물들의 식물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앞서 자각했던 육체의 한계에서 벗어나 빛의 세계에 조금 더 가까워지려는 몸짓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들은 식물이 되어 오직 촉각만을 가지며 일반적인 인간과는 다른 양태로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폭력을 행하는 인간의 육체에서도, 자기를 기만하는 시각과 청각에서도 벗어난다.
나아가 『소년이 온다』에서는 영혼이라는 또 다른 존재의 방식이 나타난다. 영혼은 식물로서의 인간이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던 촉각마저 잃어버리며 육체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이는 마치 과거 한강이 관심을 가졌었던 불교적인 사고방식과도 맞물리는 듯 보인다. 이처럼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에서부터 보여진 탈피 욕망은 결국 육체에서 벗어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에 따라 죽은 이들의 영혼은 군인의 육체가, 혹은 아버지의 육체가 행했던 폭력에 대한 혐오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육체가 없으므로 폭력적일 수 없었다.
이때 한강 소설에 만연한 상실은 『소년이 온다』에서 본격적으로 애도되기 시작한다. 한강은 인터뷰에서 이 소설을 쓰는 동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애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때 일반적으로 애도가 죽은 자를 잊는 것인 반면, 한강의 애도는 기억하고 하나되는 방식으로,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애도를 위해 한강은 수많은 촛불을 밝히고 인칭과 여러 서술자의 목소리를 뒤섞는다. 동시에 애도는 상실을 겪은 이들이 죽은 자와 함께 빛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식이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소년이 온다』, 213쪽.)’ 바란다고 말하는 것, ‘장막을 걷(『흰』, 109쪽.)’고 ‘대낮의 태양(『노랑무늬 영원』, 305쪽.)’이 되려는 것은 모두 그러한 욕망의 표출이다.
이러한 애도의 원형은 『여수의 사랑』에 수록된 단편 중 하나인 「진달래 능선」 속 ‘황씨’의 개인적인 애도의 행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황씨’는 어린 딸을 잃고 나무를 뽑아 태우는 병적인 행동을 보이는데, 이는 그가 ‘이렇게 불태워진 것들이 그 애의 마당에 옮겨 심어질 거라고 믿고 있(208쪽.)’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거실에 촛불을 밝혀 놓는 것 또한 딸을 애도하기 위한 실천의 일부였다. 이러한 행위는 이후 『소년이 온다』의 처음과 끝에서 촛불을 밝히는 것, 『흰』에서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자신의 것을 포함해-초를 밝(109쪽.)’히는 것으로 이어진다.
한강은 그러한 촛불의 힘을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단지 조용하고 평화로운 촛불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사회를 바꾸고 싶었다.’라고 말하며 ‘새로운 순간의 미래를 위해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고 있다’고 했다. 한강이 보기에 그러한 촛불의 힘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이전에 보았던 희생자들을 돕기 위해 줄을 선 사진 속 사람들과 겹쳐지며 그 마음은 인간의 또 다른 면인 폭력성 앞에 그것에 맞서는 숭고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편 『소년이 온다』에서 촛불 밝히는 것 외에도 ‘동호야’라고 반복해 부르는 목소리가 있다. 이처럼 죽은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한강은 끊임없이 그들을 호명한다. 이는 『여수의 사랑』에서부터 시작되는데, 마치 ‘이십 년 동안 한 번도 진규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던 어머니(78쪽.)’가 ‘진규’를 부르기 시작한 것과 같이 곳곳에서 인물들은 죽은 자의 이름을 끊임없이 부른다. 이렇게 소리 내어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마치 초혼 의례를 상기시키는데, 과거에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세 번 부른 뒤에 장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의 이름을 소리내어 부른 뒤에야 애도의 시작이 가능함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여수의 사랑』에서의 호명이 이후 애도의 잠재성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는 곧 빛으로 걸어 나가는 첫 단계였다.
이 글에서는 『여수의 사랑』이 한강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일으켰다는 점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것은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탈피하려는, 그곳으로 고통받는 자들을 이끌려는 욕망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그를 위해 어둠에 해당하는 인간 육체의 폭력성에서 벗어나 불을 밝힘으로써 존엄성을 유지하려는 것이 한강 소설의 흐름이었다. 이는 육체로 인해 자기 자신 또한 어쩔 수 없는 인간임을 뼈저리게 자각한 인물이 일반적인 육체의 형태와 존재 방식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흐름의 시작점에 『여수의 사랑』이 있으며, 여기서는 이후 여러 소설에서 나타나는 촛불과 애도, 그리고 호명의 원형이 나타난다.
한강의 소설은 『여수의 사랑』에서 시작된, 연속적인 애도의 과정이며 그에 따라 육체의 한계에서 벗어나 빛의 세계로 함께 들어가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이는 『여수의 사랑』에서의 발화로써 수행된다. 한강 소설 전반을 볼 때 『여수의 사랑』은 한편으로 인간의 병적인 행위에 대해 묻기 시작하는 문제제기였던 것이다. 이는 90년대 중반, 주로 남성 작가의 소설들의 전형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가령 이청준의 단편에서도 인물들은 병적인 행위를 보이지만, 소리내어 그 원인을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강은 『여수의 사랑』에서 그러한 질문을 던졌고, 그랬기에 이후 소설들에서 그 어둠에서 벗어나기 위한 실천적인 행동들을 보일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한강의 소설은 ‘전혀 신세대적이지 않다’는 평론가의 해설과는 달리 21세기로 넘어가는 시대의 중요한 말하기였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기본 자료>
한 강, 『검은 사슴』, 문학동네, 2013.
, 『내 여자의 열매』, 창비, 2000.
,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 『여수의 사랑』, 문학과 지성사, 2008.
, 『채식주의자』, 창비, 2007.
, 『흰』, 문학동네, 2018.
<국내 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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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혜, 「한강 소설에 나타난 생태학적 양상 고찰」, 『한국문예비평연구』 57권, 한국현대문예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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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자, 「‘5·18 이후’의 문학: 고통과 책임 – 『소년이 온다』(한강)를 중심으로」, 『민주주의와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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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경, 「한강 소설에 나타난 예술(가) 의식 연구 – 『희랍어 시간』과 『노랑무늬 영원』을 중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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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
한 강·Sarah Shin, 「INTERVIEW WITH HAN KANG」, 『THE WHITE REVIEW』, 2016년 3월
인터뷰; https://www.thewhitereview.org/feature/interview-with-han-kang/
한 강, 「While the U.S. Talks of War, South Korea Shudders」, 『The New York
Times』, 2017; https://www.nytimes.com/2017/10/07/opinion/sunday/south-korea-trump-war.html
한강 공식 홈페이지; https://han-kang.net/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