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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Oct 12. 2024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

W. G. 제발트의 『이민자들』

비망록에 적힌 할아버지의 마지막 기록은 성 스테파노의 날(2월 26일)에 쓴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뒤 코즈모는 심한 열병을 앓았지만 차츰 회복되는 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할아버지는 그 전날 오후 늦게 눈이 내리기 시작했으며, 호텔 창가에 서서 찬찬히 내려앉는 어스름 속에 하얗게 떠 있는 도시를 보자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고도 적어놓았다. 그는 나중에 이런 글귀를 추가했다. 기억이란 때로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 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 제발트, 『이민자들』, 185쪽.





  이 문단은 제발트의 <이민자들>에서 발췌한 것이다. 제발트의 <이민자들>은 이방인으로 살아가다 죽음을 맞은 네 명의 사람들, 그들의 삶에 대한 추적이다. 내가 가져온 이 문장들은 그중 세 번째 이야기의 가장 마지막 문단에 해당한다. 이 세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이고, 그는 작중 화자의 어머니의 외삼촌으로, 여기서는 주로 ‘할아버지’로 지칭된다. 그러니까 이 문단은 그 아델바르트 할아버지가 자신의 비망록에 남긴 글이다.


  나는 이 문단에서 마지막 세 문장에 집중했다. 우선 내가 이 문장들에 처음 사로잡힌 이유는 이 구절들이 풍기는 어떤 아이러니 때문이다. 어떤 아이러니일까. 아델바르트 할아버지는 기억이란 때로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비망록에 적고 있다. 비망록은 말 그대로 잊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적어 놓은 기록이다. 기억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고 생각하면서 할아버지는 비망록을 썼다. 그것도 이 이야기를 다 읽어 보면 매우 구체적이고 꽤 오랫동안 써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왜 이토록 기억 때문에 고통받으면서도 기억하고 싶어할까. 그 아이러니 때문에 이 문장들이 책을 덮은 후에도 기억이 났던 것 같다.


  그 다음으로 이 문장들을 다시 읽자, 이번에는 너무나 적절해 보이는 비유가 눈에 띄었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 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에서의 비유이다. 이 문장의 말대로 기억은 우리가 걸음을 한 발짝 한 발짝 걷듯 하나씩 순차적으로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 그 대신 지금까지 살아온 기억들은 몹시 뒤엉켜 우리에게 엄습한다. 그의 말처럼 기억이 한눈에 내려다 보일 때, 보고 싶은 것만 볼 수도, 보기 싫다고 안 볼 수도 없다. 기억이란 꼭대기 탑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그러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그 모든 생애가 한 시야에 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근법을 무시하고 아주 오래 전의 과거와 비교적 최근의 과거, 그 모두가 한꺼번에 뒤섞여 내려다 보이며 우리는 고소공포증에 걸린 듯 머리가 지끈거리게 된다. 정말 대단한 비유가 아닌가.


  한편 내가 주목하는 마지막 세 문장들은 모두 ‘기억’이라는 문장 화제를 공유한다.

기억이란 때로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 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기억’은 제발트의 이 산문 <이민자들>에서 꽤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이다. 그 외로는 잔해, 덧없음, 몰락 같은 단어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아무튼 작가는 이름도 없이 파묻힌 역사 속 개별자를 기억하기 위해 그들을 알고 있는 여러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의 증언을 녹취하고 자료를 조사하고 사진을 수집했으며, 직접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한다. 그 결과로 현실과 허구를 오가며 팩트와 픽션을 절묘하게 결합한 산문이 탄생한다. 어쩌면 이러한 기억의 재구성 과정이 미시사 연구와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을 정도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소설과는 매우 다르다. 이러한 그의 산문은 제발트란 장르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독특하다. 그중 이 <이민자들>은 그러니까 네 명의 주인공들의 과거사와 트라우마를 다양한 방식으로 찾아내고 그 기저에 있는 지나간 상실과 고통의 경험을 추적하는 화자의 기억 찾기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화자와 증언자들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이 글에서 중요한 지점은 아니지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제발트가 이 네 명의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서술한 방식이,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데 있어 가능한 한 가장 윤리적인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유태인들의 삶을 과연 독일인인 제발트가 증언할 수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중간중간에 나오는 화자의 독백을 보면 그가 이 죽은 네 사람들의 삶을 추적하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느낄 수 있다.


  아무튼 그 세 번째 이야기인 아델바르트 할아버지의 이야기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여기서는 화자, 이모들, 외삼촌, 정신병원의 책임자 등 다양한 인물이 아델바르트를 회상한다. 이외에도 아델바르트의 생애는 해독하기 힘든 여행 기록기와 그의 꿈 이야기, 그리고 화자가 꾼 꿈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조명된다. 아델바르트는 유태인 은행가인 쏠로몬 가문의 관리인으로 일했다. 그는 자신보다 어린 코스모 쏠로몬의 시종이자 동반자로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 이때 코스모는 방탕한 삶을 보내다 신경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아델바르트 역시 말년에 우울증을 앓아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는 병원에서 고문과 다름없는 치료를 받다가 죽는다.


  그런 아델바르트 할아버지의 마지막 비망록에 적힌 것이 아까 본 바로 이 문장들이다. 그 비망록의 내용을 옮긴 것이 이 마지막 문단이다. 이 문단이 구조적으로 독특한 점은 앞의 것들은 간접적인 인용으로, ‘~라고 적어놓았다’ 따위의 문장들로 쓴 반면, 기억에 관한 내용들은 할아버지가 쓴 문장 세 개를 그대로 옮겨 놓았다. 그래서 이 문장들이 마치 화자의 생각과 같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수많은 것들을 겪은 후 정신병원에 입원해 충격요법으로 치료를 받던 할아버지나, 그런 할아버지의 삶을 추적했던 화자가 기억하는 것은 무엇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왜 그들의 트라우마적인 기억을 되짚어가야만 했던 걸까. 아마도 화자는 그들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기억 찾기 과정은 우리들로 하여금 또한 그들의 삶을 추체험하게 만든다. 그렇게 그 네 명의 이민자들은 역사 속에서 몰락했지만 그들의 몰락은 기억된다.


  그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나 또한 기억들에 관해 생각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작년 중반쯤의 날짜부터 쓰인 일기장을 펼쳐 첫 장부터 읽었다. 그 안에는 무척이나 많은 기억들이 담겨 있었다.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 느꼈던 감정들, 방문했던 타지들, 홀로 산책을 나갔던 골목길들, 꾸었던 꿈들, 했던 고민들이 다 써 있었다. 그러면서 아, 나는 그동안 때때로 울기도 했고, 웃기도 했고, 무언가를 쓰기도 했다는 것을 지금의 내 몸 안에 그 많은 날들이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 기억들은 제발트의 비유대로 고랑을 걷듯 가지런한 게 아니라, 높은 빌딩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 아찔하게 뒤섞여 다가왔다.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오랜 세월의 기억을 버티는 것인지 신기했다.


  나는 이 점에서 왕가위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이 떠올랐다. 이 영화에는 ‘취생몽사’라는 이름의 술이 나오는데, 이 술을 마시면 지난 날의 모든 기억을 잊을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양가휘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력 때문이다, 잊을 수만 있다면 매일 매일이 새로울 것이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동시에 이 영화에서 장국영은 이렇게 말한다.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기억난다. 갖지는 못하더라도 잊지는 말자.’ 나는 앞서 기억에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비망록에 적는 아이러니에 대해 말했었다. 잊으면, 비망록을 쓰지 않으면 편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잊지 않기 위해 쓴다. 어쩌면 나는 취생몽사가 있어도 마시지 않을 것 같다. 기억은 역시 우리를 어지럽게 만든다. 하지만 동시에 기억하기 위해 나는 일기를 쓴다. 그러니까 갖지는 못하더라도 잊지는 않기 위해.


  언젠가 누군가와 일기 쓰기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때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내기 위해 쓴다고, 나중에는 기억 안 나는 날들이 많으니까, 기억하기 위해 쓴다고. 그런 기억들로 인해 어지럽지만, 우리는 왜인지 자꾸만 기록하려 한다. 아델바르트 할아버지의 비망록과 같이 말이다. 그래서 기억이란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고 쓴 게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나는 누군가의 일기에 쓰여지고 싶다. 누군가에게 기억하고 싶은 찰나가 되고 싶다.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말을 빌리자면 누군가에게는 탑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사람이고 싶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순간을 온전히 행복하게 누리고 있다. 그리고 내게 그걸 선물해주는 모든 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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