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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Oct 14. 2024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의 ‘하이쿠적’ 특성

신카이 마코토의 <언어의 정원>과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를 중심으로


최근 들어 쌀쌀해진 날씨에, 여름이 이젠 정말 끝나버렸다는 사실을 느낀다.

그리고 여름의 끝을 생각하자 자연히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언어의 정원>이 떠올랐다.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의 ‘하이쿠적’ 특성

- 신카이 마코토의 <언어의 정원>과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를 중심으로 -




  신카이 마코토는 몇 년 전 엄청난 흥행에 성공한 <너의 이름은>과 함께, 한국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생각하면 곧바로 떠올릴 수 있는 감독이 되었다. 이러한 그의 2013년 작품인 <언어의 정원>은 비오는 날 오전이면 공원에서 만나는 두 사람, 구두 장인을 꿈꾸는 15살 타카오와 퇴직 과정에 있는 교사 유키노 선생 사이의 이야기다. 이 영화 속에서 그들은 단카를 읊으며 서로에게 마음을 전하는데, 이러한 특이성으로 인해 영화 <언어의 정원>을 고전 문학과 연결지으려는 시도들에서는 단카 이야기가 주로 등장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화의 소재로서의 일본 문학이 아닌 영화 그 자체로서의 문학성을 보는 관점을 택하고자 한다. 이때 아주 짧은 형식을 가진 하이쿠를, 더 구체적으로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를 활용할 것이다. 이를 통해 영화 <언어의 정원>이 하이쿠적인 것, 그 자체임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이쿠는 렌카의 홋쿠가 독립된 것으로서 5/7/5, 17글자의 매우 짧은 구성을 취하며, “오늘날 일본의 전통문화 중에서 가장 국제성을 띤 문화”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에 따라 하이쿠는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형식 중 하나로서 일본의 자연관, 인생관 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러한 하이쿠의 주요 특징을 설명하는 단어에는 계어, 아와레, 유겐, 와비/사비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찰나성이나 시공간성, 비교훈성 등이 하이쿠에서 두드러진다. (일본의 시가나 구절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무상감은 언뜻 보면 불교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의 불교는 진리로서의 공보다 감상적인 무상감만이 강조되는 경우가 많다는 특징을 지니는데, 이는 일본의 지리적, 기후적 특징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선 하이쿠와 애니메이션의 접점을 논하는 자리에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언어의 정원>을 불러들이는 이유는 이 영화가 계절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계어’는 하이쿠에서 유일하게 하나의 형식으로 정착되어 있다. 이는 하이쿠에서 계절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 짐작하게 한다. 또한 수많은 하이쿠 작가 중에서 미쓰오 바쇼를 선택한 이유는 그가 하이쿠에 예술성을 부여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방랑자로 살면서 세상을 직접 ‘밟는’ 자로서 바라볼 수 있었다. 이에 <언어의 정원>은 바쇼의 하이쿠와 함께 읽을 때 그 미감을 더욱 풍부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어 외에도 존재의 연민을 바탕으로 하여 사라져갈 존재들끼리 지금 함께 있음으로써 생기는 정감인 '아와레', 간소함과 불완전함에 자족하며 그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와비'와 한적하게 녹이 슬어가는 것이 풍기는 정취인 '사비',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속의 찰나를 말하는 '우쓰리가와리' 등의 개념을 통해 <언어의 정원>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계어


  <언어의 정원>은 6월의 장마로 시작한다. 이에 영화 전반부에는 한적한 빗소리와 계곡물 소리, 그리고 비를 맞아 한층 푸르러진 녹음이 두드러진다. 하이쿠에서 ‘장마’, ‘소나기’, ‘그늘’, ‘물방울’, ‘흐린 아침 날씨’, ‘여름철의 무성한 나무 숲’, ‘만록’, 수풀‘ 등은 모두 여름의 계어에 해당하며 이는 <언어의 정원>에서 두 인물이 만나는 공원을 시각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드러난다. 특히 바쇼의 하이쿠에서는 ’여름 장맛비‘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계어가 등장하는 구절에는 “여름 장맛비/깊이 재며 내리네/늘 건너는 강”, “여름 장맛비/다 모아서 빠르다/모가미 강” 등이 있다. 이때 ’여름 장맛비‘는 “인간의 시간이 아닌 자연의 시간”을 보여주며 흘러가는 계절의 이미지 그 자체를 전달한다.


  이러한 계어는 <언어의 정원>에서 이미지화된다. 일차원적으로 생각하자면, 빗방울이 호수 위에 떨어지는 순간을 포착하여 제시하는 화면은 ’비가 강의 깊이를 재며 내린다‘는 바쇼의 시선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 같다. 이처럼 애니메이션은 대사가 없는 화면으로 하이쿠의 계어를 대체한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지점은 ’여름 장맛비‘라는 단어가 읽는 이에게 공통된 계절감을 불러오는 것과 같이 ’약속‘이라는 계어의 특징과 연결지을 때 생겨난다. 타카오와 유키노 선생은 비오는 날 오전이면 서로를 공원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와 동시에 장마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교점에서 생겨나는 묘한 낭만은, 계어가 여름을 나타내는 것처럼 타카오에게 ’비‘ 혹은 ’비오는 아침‘은 곧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에 ’비를 기다린다‘는 표현은 곧 관객들에세 ’그녀를 보고 싶다‘로 해석된다. 이는 영화와 관객 사이에서 맺어진 약속으로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날씨의 양상은 애틋함을 불러온다. 이러한 구절은 마치 영화에서만 유효한 계어처럼 작용하게 된다.     



2) 와비/사비


  와비가 일본의 미의식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됨은 에도시대의 다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후 와비는 훌륭한 상태보다는 조금 뒤떨어진, 불완전함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반면 사비는 녹슨다는 의미를 내포하며 시간이 흐르며 쓸쓸하게 변해 감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러한 와비와 사비는 인간 세상의 물질적 화려함보다는 자연과 함께 어우러짐을 추구한다. 또한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자연스럽게 삶을 맡기며 덧없음과 무상감에서 아름다움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여름 장맛비’가 등장하는 바쇼의 또다른 구절에는 “여름 장맛비/시 적은 종이 떼어 낸/벽에 난 자국”이 있다. 이때 벽의 자국은 시간의 흐름과 그 흔적을 담고 있으며, 종이가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고 그러한 시간의 자국을 남긴다는 것에서 와비/사비의 정취가 드러난다, 한편 <언어의 정원>에서 느껴지는 와비와 사비는 배경과 인물의 두 방향에서 나타난다. 우선 영화 속의 공원은 날씨와 계절의 변화를 온전히 담고 있었다. 또한 이 공간은 도시에서 저소득층으로서,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으로서 소외되며 살아가는 이들이 서로를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찾아가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공원의 특성은 부족한 그들을 긍정한다는,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가까워짐과 멀어짐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와비/사비의 정취와 일치한다. 그들의 흔적은 ‘시를 떼어낸 자리에 남은 자국’처럼 공원에 남아 있을 것이었다.



3) 찰나성과 변화, 우쓰리카와리


  하이쿠는 그 짧은 형식과 유사하게 찰나성이 강조되는 소재를 많이 활용한다. 이는 재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으며 또한 날씨 변화가 잦았던 일본의 자연적 특성과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찰나성을 드러내는 소재에는 풀꽃이나 풀벌레, 매미 허물 등이 있다. 일본의 하이쿠는 이러한 찰나성과 그것이 내포한 변화를 통해 시간을 느꼈다. 이때의 변화는 “매 찰나마다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생멸’”에 대한 의식, 우쓰리카와리와 관련된다. 그들은 이 순간이 곧 변화할 것을 알았기에 그 아름다움에 더욱 귀 기울일 수 있었다. 바쇼는 또한 “조만간 죽을/기색 보이지 않는/매미 소리”라고 읊는다. 매미가 여름이 지나면 죽는다는 것을 알기에 이 구절은 더욱 눈길을 끈다. 여기서 바쇼는 찰나의 순간을 지금 여기에서만큼은 영원의 아름다움으로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의 정원>에서 타카오는 장마는 언젠가 끝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것은 그에게 곧 그녀를 만나러 공원에 가지 않음을 의미했다. 또한 타카오의 교복을 알아본 유키노 선생은 처음부터 그가 자신과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그녀는 자기에 관한 말을 아낀다. 이처럼 이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정서는 인간 개인이 바꿀 수 없는 자연 혹은 운명에 놓인 무력함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만나고 있는 그 순간에는 서로에게 충실하다. ‘비 따위 오지 않아도 여기 있겠다’는 단카의 화답에서도 그들은 관계에 있어 변화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적극성이 엿보인다. 이에 따라 그들은 학생과 선생이라는, 언젠가 끝나야 함을 아는 관계에 놓여있었지만 유키노 선생의 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타카오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바쇼의 구절에서 매미 소리가 ‘죽을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져 가는 찰나를 그 순간에 있어서 영원히 간직한다.


  또한 영화의 결말부에서 그들은 떨어져 살게 되었지만, 언젠가 혼자 더 멀리까지 걸어갈 수 있게 될 때 다시 만나야겠다고 타카오는 말한다. 일 년마다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찾아오는 계절의 순환과 같이, 이는 사람의 관계 또한 멀어졌다가도 다시 돌아온다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에 결국 죽음으로 끝나게 되는 모든 인간 간의 관계는, 매 여름마다 돌아와 줄기차게 울어대는 매미와 같이 순간순간을 소중하고도 충실히 보내야 한다는 것을 영화는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는 변천에 대한 인식이라는 점에서 우쓰리카와리의 미의식을 함축한다.      



4) 아와레


  하이쿠의 아와레는 감상적인 허무감을 나타내는 일본의 미감인 모노노아와레와 같은 선상에 있다. 이때 아와레는 특히 모든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연민을 바탕으로 하며, “스러져 갈 존재”들끼리 느끼는 “지금 함께 있음의 애틋함”이라고 할 수 있다. 바쇼는 삶의 고단함을 읊으며 “메꽃 옆에서/쌀 찧다 땀 씻는/아와레이여”라고 말한다. 이때 아와레는 고단한 여름날을 살아내고 있는 이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나타내게 된다. 이 하이쿠 속 쌀을 찧는 사람의 이미지는 곧 관객들에게 있어 <언어의 정원>에서 보여지는 여름날 타카오와 유키코 선생의 애환과 겹쳐진다.


  사회의 비주류를 형성하는 이들의 고단함에 귀 기울였던 바쇼의 구절에서처럼, 아와레는 어딘가 조금 부족하거나 쓸쓸한 것들에 대한 세밀한 관심에서 시작된다. 마치 헤어진 남자친구가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던 유키노 선생의 목소리를, 타카오가 이끌어내 준 것과 같다. 이는 타카오 또한 충만한 삶을 살고 있지 못했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엄마와 형이 떠나고 남겨진 그는 혼자 돈을 벌며 방학을 보냈다. 그러한 그와 ‘혼자 걷기’를 연습하는 유키코 선생의 관계는 아와레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5) 밟는다는 것, 그리고 구체적 시공간성


  하이쿠는 교훈적이거나 관념적인 장르가 아니다. 그 대신 ‘지금 여기’에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세심한 관심을 기울인다. 마쓰오 바쇼는 이러한 구체적 시공간을 “방랑지에서 직접 체험”한다. 빗소리, 초록빛의 나뭇잎 등으로써 영화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하이쿠에는 시각, 청각 등의 감각이 많이 활용된다. 그러나 직접 발로 밟는 것의 표현은 보거나 듣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의미를 전달하며 짧은 하이쿠에 더욱 풍부한 의미를 담아낸다. 즉 관조나 상상만으로 경험할 수 없는 ‘지금’의 이 공간은 “행동에 의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유키노 선생은 학교에서 거짓 소문으로 괴롭힘을 받았고 남자친구와도 헤어지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잘 걷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녀를 바라보는 타카오는 그녀가 ‘많이 걷고 싶어질’ 구두를 만들고 싶어한다. 이 구두를 신고 그녀는 세상을 걸으며 수많은 찰나를 경험할 것이다. 바쇼가 밟으며 읊는 세상은 모호하지 않으며 “시간/장소/사물에 의해 형성된 하나의 우주를 가졌”다. 이와 마찬가지로 <언어의 정원> 속 공간을 보는 관객은 그곳에서 어떠한 관념적인 교훈이나 개념을 찾는 대신 인물들이 발 딛고 서 있는 순간,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미래의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6) 덧붙임: 도리아와세


  하이쿠는 17자라는 매우 짧은 글자들로써 아름다움을 표현해야 한다. 이에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을 읽는 이가 스스로 상상하게 만드는 여러 기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중 도리아와세는 “표면적으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소재를 엉뚱하게 연결”하는 기법이다. 영화에서 관객이 도리아와세로 느끼는 것은 공원에서 유키노 선생이 매일같이 들고 오는 맥주와 초콜릿이다. 이 둘은 일상적으로 상상할 수 없었던 조합으로서 관객에게 의아함 혹은 일종의 단절을 불러 일으킨다. 그런데 이 맥주와 초콜릿은 미각을 상실한 유키노 선생이 유일하게 맛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에 영화는 하이쿠와 유사하게도 그녀의 장애를 비논리적인 단절로써 드러내며, 이로 야기되는 관객 내면의 빈 공간은 완벽하지 않은 유키노 선생의 모습을 일면 감각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상으로 살펴본 것이 하이쿠와 애니메이션 <언어의 정원>이 가지는 접점이다. <언어의 정원>을 포함한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은 많은 일본 애니메이션들과 마찬가지로 희망, 사랑, 용기, 도전 등으로 충만해 있는 디즈니의 애니메이션과 언뜻 보아도 다름을 알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차이에 내재된 일본 하이쿠의 근원적 특징을 중심으로 하여 <언어의 정원>을 바쇼의 하이쿠 구절들과 비교해 분석해보았다. 이에 따라 변화하는 계절 속 그저 빗소리뿐인 한적한 공간과 인물들의 완벽하지 않은 삶의 단면을 포착해 제시하는 <언어의 정원>은 일본의 전통적 미의식에 근거하며 그중 하이쿠의 형식으로 특정될 수 있었다. 이러한 시도는 마코토 감독의 한 작품을 넘어 전반적인 일본 애니메이션의 미감이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인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시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신카이 마코토, 미야자키 하야오 등 일본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큰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언어의 정원>, <너의 이름은> 등의 작품을 즐겨 보는 관객들도 하이쿠나 혹은 이것의 바탕에 놓인 일본 전통의 미감을 이해하려 하는 경우는 드물다. 본고에서 <언어의 정원>이 가지는 ‘하이쿠적’ 특성을 밝히려 했던 것은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가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는 동안 알게 모르게 접했을 일본 문화의 미학에 보다 체계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애니메이션을 보며 감동을 느끼는 것처럼 하이쿠와 같은 미감을 공유하는 다른 일본의 문화적 양식에 관심을 가지고 여기에서 또한 잔잔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참고 문헌          

1. 단행본     

마쓰오 바쇼, 류시화 옮김, 『바쇼 하이쿠 선집』, 열림원, 2015.

이어령, 『하이쿠의 시학』, 서정시학, 2009.

유옥희, 『하이쿠와 일본적 감성』, 제이앤씨, 2010.          

2. 논문     

김윤·임은혁, 「‘무인양품(MUJI)’에 나타난 전통적 미의식 - ‘와비(わび)’와 ‘사비(さび)’를 중심 으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학연구』 50권, 커뮤니케이션디자인학회, 2015, 52-63쪽.

유옥희, 「마쓰오 바쇼, 하이쿠에 예술성을 불어 넣다」, 『문예운동』 통권 119호, 문예운동사, 2013, 101-119쪽.

      , 「하이쿠의 문화학적 접근」, 『동서문화』 34권, 계명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1, 19-33쪽.

장경렬, 「확대 지향의 시 형식과 축소 지향의 시 형식: 시조와 하이쿠의 형식상 특성에 대한 하나의 비교 분석」, 『일본비평』 제14호,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2016, 222-2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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