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느끼는 감정의 정확한 이름
나도 쓸 수 있을 듯 쉽게 쓰인 에세이가 베스트셀러가 될 때, 나도 할 줄 아는 몇 가지 외국어로 유행가 가사를 바꿔 부르는 가수가 인기를 얻을 때, 괜히 마음이 불편해 그것을 보고 듣지 않으려 했다. 나도 기호가 있으니까 그냥 그 사람들을 안 좋아할 수 있지 않나 하고 합리화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열등감 같은 것이리라 짐작했다.
그러다 상담에서 지나가듯 이 이야기를 했을 때, 상담사가 물었다. 왜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질투하느냐고. 보통은 주변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느냐고. 나는 부와 유명세, 내가 도달할 수 없는 능력은 부럽지 않았다. 약속 장소에 나온 친구 손에 들린 명품 가방이나 손흥민의 월클 축구 실력이 질투 나지 않는다. 대신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것, 내가 하고 싶은 걸 누군가 이미 성취했을 때 마음이 불편했다.
겨우 저런 글을 써서 책을 내나, 하는 나의 평가는 겉보기엔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지만서도) 그들을 끌어내리려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너는 왜 저런 글 못 써?'라며 나를 닦달하고 있는 것이었다. 너는 뭐 하고 있었어? 너도 빨리 뭐라도 해야지. 너는 왜 글 안 써? 너는 왜 악기 연주 안 해? 너는 왜 자기 계발 안 해? 모르는 이를 향한 질투는 그들에게 닿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내 등을 떠밀어 패배감의 늪에 빠뜨린다.
상담사는 그것은 자기혐오라고 말했다. 자기 돌봄 없이 밀어붙이기만 하고 계시네요.
부러움은 부러움으로 끝나야 한다. 와 좋겠다, 나도 갖고 싶다. 건강한 사람은 이런 부러움을 투명하게 말한다. 나는 이제껏 이런 감정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간편하게 자기혐오감을 데워 먹었다. 읽으면서 무시했던 그 에세이 작가의 북토크에 가서는 팬이라고 말하면서 책에 사인을 받는다. 세상 음침한 인간. 아, 또 자기혐오했다.
만족 없이 늘 헛헛하고 뭔가 더 해야만 할 것 같은 불안한 마음. 나는 이 마음이 어디에서 온 줄 안다. 사실 상담사가 말해주기 전부터도 알고 있었다. 성격 문제의 대부분은 원가족과 보낸 유년 시절에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어릴 적 정서적 학대 타령을 하며 살 것인가. 그러기엔 이제 나이가 적지 않다. 과거는 이미 끝난 일이고, 나는 그 시절 충분치 못했던 돌봄을 스스로에게 해주어야 한다. 이제 남에게 인정과 지지를 바라는 것을 끝내고 스스로 그 역할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