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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토아부지 Dec 25. 2024

영웅 아닌 연약한 ‘인간 안중근’…‘하얼빈’이 놓친 것

[영화감]



안중근이 얼어붙은 두만강을 지납니다. 그는 매우 지쳐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자연 속 인간 안중근은 초라해 보이지만,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깁니다. 여기엔 우리가 아는 영웅 안중근은 없습니다. 독립투사의 강렬한 분노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냥 방황하는 인간만 있죠.


우민호 감독의 영화 ‘하얼빈’(24일 개봉)은 대다수 관객들의 기대를 아마도 배반합니다. 안중근은 행동하기보단 고뇌하고, 독립군의 항거는 통쾌함 없이 처절합니다. 신파 하나 없이 차분하고 건조하게 당시 20∼30대에 불과했던 안중근과 독립군 동지들을 응시합니다.


줄거리는 단순합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현빈)이 하얼빈으로 가서 ‘늙은 여우’ 이토 히로부미(릴리 프랭키)를 처단한다는 거죠.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면 그 과정이라도 치밀해야 할 것 같은데, 영화는 그런데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안중근은 우덕순(박정민)을 비롯한 동지들과 조력자 최재형(유재명)의 도움을 받아 어찌어찌 하얼빈에 이릅니다. ‘어찌어찌’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네요. 그 과정에서 안중근의 능력은 부각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간을 믿고 도의를 지키는 그의 성향은 동지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위기를 자초하죠.


춥겠다. CJ ENM 제공


영화가 관심 있는 건 안중근의 영웅적 행보가 아닌 두려움을 느끼는 연약한 인간 안중근의 내면입니다. 자연히 이들이 활약하는 순간보단 어두운 골방에서 토론하고, 번민하며, 서로를 의심하는 순간이 많습니다. 일본군이 밀정을 심었다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첩보물로 발을 넓히죠. 건조하고 차갑지만, 그 안에 잠재된 뜨거운 분노를 담아낸 방식은 프랑스 누아르 거장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나 김지운 감독의 ‘밀정’을 연상시킵니다. 우 감독은 지난 19일 인터뷰에서 "안중근과 독립군 동지들의 마음이 들리지 않는 통곡처럼 느껴졌다"며 "이들의 마음을 묵직하게 담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극단적인 명암 대비가 많아 연극적이라 느껴집니다. 극적 순간을 명암 대비로 살린 카라바조나 렘브란트의 그림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300억 원이라는 제작비로 이렇게 연극이나 그림처럼 찍었다는 점은 놀라워요. 우 감독은 "숭고하게 찍고 싶었고, 한 폭의 명화처럼 보이길 바랐다"고 강조했습니다. 밀정의 존재로 하얼빈 작전이 무산될 위기에서 안중근이 최재형을 붙잡고, 끝까지 작전을 수행하겠다고 절규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방구석 어둠 속에 있던 안중근이 무릎을 꿇고 고해성사하듯 최재형을 설득할 때 창가를 통해 서광이 비칩니다. 영화의 내용과 상관없이 아름다운 순간이에요.


전형적인 그림 같은 장면... CJ ENM 제공



‘하얼빈’에서 안중근은 초인이 아닙니다. 동지들에게 도움을 받고 최재형을 정신적으로 의지합니다. 다만 먼저 떠난 동지들의 몫을 산다는 부채의식과 국권 회복을 위한 집념으로 결국 하얼빈에 다다릅니다. 우 감독은 "이제까진 단독 클로즈업을 자주 썼는데, 이번 영화는 안중근 홀로 두드러지게 보이면 안 됐다"며 "안중근과 동지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많이 담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안중근이 거사의 주역이긴 하지만, 하얼빈 의거 역시 동지들의 피와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영화가 말하려고 했던 지점이기도 합니다.


홍경표 촬영감독이 담은 자연 풍광은 압도적입니다. 동양과 서양이 맞물렸던 세기말의 블라디보스토크를 라트비아에서 찍었고, 만주의 허허벌판을 담기 위해 몽골을 내달렸어요. 그런데 영화가 품은 소박한 진심과 휘황찬란한 배경은 다소 어울리지 않는단 생각도 듭니다. 역시 이 영화 속 안중근과 독립군 동지들은 어두컴컴한 골방이나 기차 안이 어울려요.



얘네가 더 입체적인데 기능적으로 쓰임. CJ ENM 제공



‘우민호 스타일’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하얼빈’을 보며 당혹스러울 겁니다. 상업성 짙었던 기존 스타일과는 반대로 가기 때문이죠. 자극을 쫓던 이야기꾼이 윤리성을 고민하는 그림쟁이로 변모한 듯 합니다.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을 부감(높은 곳에서 내려다봄)으로 찍은 게 대표적입니다. 그 때문에 억눌린 울분을 분출하며 카타르시스를 안겨야 할 법한 하얼빈 서거 장면이 흐지부지 지나간다는 인상을 주죠. 우 감독은 "먼저 세상을 떠난 동지들이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찍고 싶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대중이 좋아하는 연출 스타일을 잘 알지만, 이 작품은 그렇게 찍고 싶지 않았습니다. 숭고하고 품격있게 안중근과 독립군의 정신을 담고 싶었어요."


전여빈 왜 나오는지 잘 모르겠음. 안중근이 러시아어 못해서? 안중근이 폭약 못구해서? 안중근이 마차 못 몰아서? CJ ENM 제공


전형적인 상업영화의 공식을 따르지 않은 선택으로 오히려 엄중한 시국에 어울리는 작품이 된 것 같습니다. "우리 앞에 어떠한 역경이 닥치더라도 절대 멈춰서는 아니 된다"는 안중근의 담담한 내레이션은 관객에 따라 큰 울림을 줄 거에요. 제작진도 영화의 비장한 분위기와 이 시국을 연결짓는 데 적극적인 모습입니다. 영화 관계자는 "계엄 선포 전에 봤을 때와 후에 봤을 때 느낌이 다르다. 관객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우 감독도 "안중근의 말이 이 시국에 위로와 격려가 됐으면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다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안중근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점은 아쉽습니다. 인간 안중근을 조명하고자 했던 영화임에도 정작 주인공 안중근의 내면을 피상적으로 탐구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워요. 우덕순 등 다른 캐릭터들도 기능적으로 쓰였습니다. 공들인 비주얼, 비장한 분위기에 비해 이야기는 비어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영화적 쾌감을 배제한 채 숙연함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지루한 감이 있어요. 영화적 쾌감을 주는 데는 장인 수준이었던 우민호의 작품이라 좀 더 놀랍고, 이 감독을 다시 보게 된 계기가 됐지만, 아쉬워할 관객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톤. CJ ENM 제공



<제 점수는요> ‘안 감’(50%)


순수재미 2.5

영상미학 4.0

숙연함    5.0

종합점수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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