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의 큰 사랑
큰애가 여름휴가를 울릉도로 정하고 경상북도 울릉군에 대한 모든 정보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울릉도는 국내 여행지이지만 여간해서 접근하기 힘든 섬이다. 날씨부터도 도와줘야 하고 새벽부터 승선하는 울릉도행 크루즈를 비롯하여 숙소며 그 외 부대비용 부분도 적게 드는 것 같지는 않았다. 큰아이는 이번에 못 가면 언제 갈지 모른다며 일주일 휴가를 몽땅 울릉도와 독도에서 보낼 계획으로 전에 없이 들떠있다. 내 땅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쏟으며 태극기도 챙긴다.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섬 비경이 너무 좋아 나는 나대로 sns를 드나들며 대리만족하던 중에 작은 섬 '죽도'를 배경으로 한 사진을 보게 되었다. 죽도? 죽도... 30여 년 전 세상에서 가장 맛있었던 미역국을 추억하게 한 그 지명! '죽도'였다.
죽도, 추도, 두미도, 추자도, 백령도... 시아버님이 살아생전 두루두루 낚시를 다니던 섬들의 이름이다. 강태공들이 사공과 배를 빌려서 들어갈 수 있는 손꼽히는 낚시 핫플들이다. 작고 사소한 한 사람을 위하여 그때 그 미역국이 이런 경로로 나에게로 왔었구나 싶어서 유일했던 내편 아버님이 그리워진다.
그때 나는 아버님의 둘째 며느리로 두 번째 출산을 하고 시댁으로 들어가서 산후조리를 했다. 그 당시에는 '산후조리원'이라는 곳이 없던 시절이고 친정 부모님은 하루 종일 생업전선에 계셨기에 친정에 머물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당연히 나는 내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기로 내심 야무지게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둘째 출산직후 네 식구 모두(남편, 나, 3살 배기 큰애, 갓 태어난 신생아)가 다 시댁으로 불려 들어갔다. 다행히 주택이고 독립된 별채가 있어서 그곳에서 먹고 생활하며 한 달을 보내고 내 집으로 돌아왔다.
시댁에서의 한달살이로 말하자면 육신은 편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던 내 맘과는 달리, 남편은 본가에서 모든 복지를 해결할 수 있어 신나 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시댁의 든든한 정서적 물질적 후원은 아이를 키우는 내내 큰 힘이 되었다. 며느리 사랑 시아버지라고, 아버님은 나에게 특히나 각별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주셨다. 세상에 하나뿐이었던 미역국의 탄생은 그렇게 며느리 사랑의 결정체가 되어주었다.
산해진미가 눈앞에 있어도 산모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산후조리 중에 맘 놓고 실컷 먹을 수 있는 건 쌀밥에 미역국이 최고의 보양식이다. 출산을 한 다음에는 물에 씻어먹는 김치도 입안이 화하게 맵다는 것을 산모가 되어보고서야 알았다. 출산을 위한 산모의 모태는 아기를 위해 최적화되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세포들의 상호협조가 필요하다.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 아닌가. 아기와 산모의 신체가 하나로 합일이 되는 시점이 있다니. 아기와 산모가 생명 탄생의 순간을 타이머 맞추듯 최적으로 맞춰야만 '응애~'라는 축복의 폭죽이 터진다는 것이 다시금 생각해도 신비롭다.
출산 후 산모의 신체는 모든 것을 제자리로 되돌리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출산의 노고를 만회하려면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어야 한다. 잇몸도 보호해야 하고 뼈와 살, 어느 것 하나 함부로 이 할 수 없다. 쏟아낸 체액의 농도를 맞추기 위해서는 국물을 충분히 먹어주어야 한다. 여기에는 미역국만큼 좋은 건 없다. 그때 나는 산모로서는 세자빈 못지않은 최고의 환경에 있었다. 아버님은 청정바다 '죽도'까지 가셔서 건져온 '감성돔'이라는 물고기로 미역국을 끓여서 '삼시 다섯 끼'로 한 달을 먹을 수 있도록해주셨다. 산지 직송된 생선으로 끓여낸 미역국은 비린맛은커녕 담백하기가 '소고기 미역국', '성게 미역국'에 비길 바가 못되었다. 지방 사투리로 '감시'라고도 하는 이 잘생긴 생선은 낚시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어탁'(일종의 탁본)을 해서 소장하는 어종이다. 청정 바다에서 바로 건져 올린 생선을 미역국으로 먹을 수 있는 확률을 가진 산모가 얼마나 될까? 아버님이 그걸 해주셨다. 최고의 미역국이 아닐 수가 없다.
아버님은 낚시를 즐기셨지만 어탐을 하는 분이 아니셨다. 못 잡으면 빈 쿨러로 돌아오실 줄도 아는 멋진 조사셨다. 다잡은 고기를 놓치더라고 낚시하는 시간을 즐기셨다. 어떻게 그날의 운으로 감성돔을 잡으셨고 며느리의 산후조리에 더없는 큰 선물이 되었었다. 세월이 지나도 그때 그 미역국의 맛을 잊지 못한다. 시원하면서도 따뜻하고 심심하면서도 진한맛이다. 미역은 또 그 자체로 얼마나 믿음이 가는 맛인지...
살면서 식구들의 생일이 되어 미역을 풀면 항상 그때의 미역국맛이 미각에 고인다. 코끝으로 스치는 그 미역의 향이 '산후조리'라는 특별했던 경험과 함께 지난날의 그리움이 되어 동해 앞바다까지 달려 나간다. 그리고 나라는 사람은 세상에서 흔치 않은 미역국으로 몸을 풀고 일어난 복이 많은 사람이었구나 싶어 오늘을 사는 힘이 된다.
추억도 맛도 다시는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나는 산후의 염려 같은 건 할 필요도 없었던 행복했던 산모의 기억을 가졌고, 그때 그 갓난쟁이도 모유로 재생산된 할아버지의 참사랑을 느꼈는지 튼실하게 잘도 자라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역시 미역국은 힘이 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