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훈자까 May 31. 2024

독서의 이유

대혐오의 시대를 건너는 법

이전 글에서 나는, 현재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의견 표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만 이 형식이 너무 가볍고, 여론에 쉽게 휩쓸리며, 작은 내용조차 쉽게 부풀려질 수 있음을 문제로 지적한 바 있다. 그러면서도 그 해결에 대한 말은 아꼈었는데 그 이유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슈들에 대한 말을 아끼고, 세테를 관망하는 것이 그 해결책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너무 뻔하고 단순한 방법일뿐더러,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하여 돌아가고 있는 슈퍼 미디어 시대에 적용하기에는 구시대적인 발상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소셜미디어가 우리 사회의 큰 흐름을 지탱하고 있는 현 세태에서 어떤 단일한 ‘묘수’를 통해 대 혐오의 시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각각의 개인이 그것을 바람직하게 사고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서 나은 방향으로의 발전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서론이 길었지만 난 각각의 개인이 파편화된 이슈와 선동에 휩쓸리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진정한 소통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통이란 어떤 상황 텍스트에서 화자와 청자가 하고 싶은 ’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소셜미디어에서는 이 ‘메시지’ 자체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듯하다. 화자든 청자든 그 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듯 상관없이 듣는 대로 듣고 하고 싶은 말을 한다. 현 사회에서는 ‘많이 말하는 사람‘이 권력자인 듯싶다. 그리고 주로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정보들은 흥미로운 주제이다. 누군가의 배신 고통 불화 같은 것들. 청자는 없고 화자만이 존재한다. 그래서 쌍방향의 소통을 주창하며 나왔던 소셜미디어는 말하는 사람들의 축제에 불과하다. 망해버린 소설미디어의 댓글창을 보는 우리 또한 진정한 의미의 청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진정한 청자는 없고, 모두가 화자가 되어 한마디 하는 사회, 이 사회에서 내가 권유하고 싶은 ‘소통’ 방식은 누군가의 독자가 되는 것. 우리가 매일매일 접하는 댓글창에서 누군가가 '나쁘다 멍청하다 좋다 호감이다'와 같은 호/불호는 적혀있을지언정, 그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적혀있지 않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건 다른 이야기다.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이해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작가들의 입장에서는 근거 없는 주장은 쓸모없는 종이에 불과하다. '맥락'이 상실된 사회에서 책을 읽는 행위는 그래서 '소통'의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파편화된 정보들이 쏟아지는 사회, 그래서 숏폼만이 각광받는 시대에서 책자에 쓰인 글을 읽는다는 건 미련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독서’라는 매체를 선택하고 다른 쉬운 영상이 아닌 그 ‘글’을 읽는 행위는 책의 ‘저자’와 소통해 보겠다는 그래서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이해해 보겠다는 생기 어린 정성이다. 개인주의 사회에서 그를 이해하겠다는 노력은 결국 단순 언어에 불과했던 글자들이 글에서 맥락을 획득하고, 그 생각에 나만의 ‘의견’이 덧붙여지며 나만의 신념 형성을 돕는다.


어느 날은 누군가에게 이 질문을 들었다. 오랜 시간 독서를 하는 대신 유튜브에 올라온 요약된 교양 채널을 몇 개 더 구독하고 시청하는 것이 더 좋지 않냐고. 지극히 합리적이다.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은 바뀌어왔다. 구전에서 글로 그리고 정보화시대를 거치며 미디어와 방송으로 말이다. 정보획득에 있어 글보다 미디어가 낫다는 건 유치원생도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글의 관점에서 독서는 단순한 정보 습득의 수단보다 스스로의 생각과 논리를 다지는 것에 강점이 있다. 단면만을 보고 인간을 판단하고 호와 불호를 결정하는 단순하고 이원화된 세계에서 독서라는 행위는 누군가의 의견을 끝까지 들추어내고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자 노력이기 때문이다. 난 그래서 몇 백 년 동안 지식전달의 역할을 해왔던 ‘책’이 진행되고 있는 소통의 부재에서 기인한 대 혐오시대를 건너는 몇 안 되는 해결책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임을 기대한다.


좀 더 독서를 해야 하는 세속적인 이유에 대해서도 말해볼까. 독서하는 행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 진입장벽이 높다는 이야기이다. 먹고 살길을 찾다 국어 과외를 결정한 내가 본 독서는 가르치는 학생의 집중력과 큰 연관이 있었다. 소위 요즘 아이들이 푹 빠져있는 숏폼과 소셜미디어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독서를 할 수 없다. 아무쪼록 독서라는 행위는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리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흔들린 집중력으로는 겉으로만 읽는 것이지 그 내용을 이해하면서 읽기는 어렵다. 나도 언제든 숏폼이든 소셜미디어든 혹은 그게 아니더라도 현실세계가 내 마음을 뒤흔들 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책을 꺼내든다. 책을 읽는 건 내게 단순한 정보 습득의 의미를 넘어 하루를 더 집중력 있고 소신 있게 살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독서를 하는 이는 특별한 힘을 얻게 된다. 진입장벽이 높다는 건, 이를 느끼는 것 또한 그것을 아는 이만이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독서는 이것도 저것도 하지 말라는 묻지 마 부정 사회에서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게으름의 단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