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이나 기념일에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난감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갖고 싶은 물건이 없었다. 쇼핑을 하러 가면 엄마는 뭐든 더 사주려고 하셨고, 나는 엄마를 말리느라 바빴다. 책을 좋아하지만 그마저도 소유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책은 주로 도서관 대출을 이용해서 읽고, '꼭 사야겠다' 싶은 책만 엄선해서 구매한다. 인간의 유형을 ‘물욕이 있는 인간’과 ‘물욕이 없는 인간’으로 나눈다면 나는 확실히 ‘물욕이 없는 인간’에 속한다.
그런 나에게 처음으로 갖고 싶은 물건이 생겼다. 바늘이살포시 내려앉으면 마법처럼 음악이 흘러나오는 턴테이블! 턴테이블이 갖고 싶었다. 소유에 대한 욕망이 생긴 후, 내 눈에는 턴테이블만 보였다. 세상에는 턴테이블이 넘쳐났다. 턴테이블이 이렇게 흔한 물건이었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인터넷을 뒤져서 가성비를 꼼꼼히 따져보고 가장 마음에 드는 제품을 골랐지만 선뜻 구매할 수는 없었다. 아이를 낳은 뒤로 나를 위해 소비하는 것을 망설이게 됐다. 순전히 나의 즐거움을 위한 지출은 우선순위에서 계속 밀려났다. 구매하는 대신 휴대폰 사진첩에 갖고 싶은 턴테이블의 사진을 담아놓고, 가끔씩 열어보면서 중얼거렸다. ‘이번 생일에 우리 꼭 만나자.’
어느 날 집에 좀 다녀가라는 친정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친정집 거실 한편에 엄마가 나를 위해 준비한 상자가 있었다. 그토록 갖고 싶던 턴테이블이 상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폴짝거리자 엄마의 얼굴이 환해졌다. 얼마 전에 엄마와 함께'악동뮤지션'이라는 가수가 나오는 TV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악동뮤지션의 집에 놓인 턴테이블을 보고 내가 갖고 싶다고 혼잣말을 했던 모양이다.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데 엄마는 흘려듣지 않으셨다. 생전 뭘 갖고 싶다고 한 적이 없던 딸의 혼잣말이 마음에 남으셨단다. 엄마가 사준 턴테이블은 신기하게도 내 휴대폰 사진첩에 담긴 바로 그 제품이었다. 모녀의 취향이 같아서일까, 마음이 통한 것일까?
그러고 보니 내가 그토록 턴테이블을 갖고 싶어 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다. 친정에는 1973년에 발매된 ‘세계 영화음악 전집’이 있다. 영화음악이 수록된 50장의 LP와 영화에 대한 상세한 소개가 있는 책으로 구성된 전집이다. ‘사운드 오브 뮤직’, ‘닥터 지바고’, ‘러브 스토리’, ‘로마의 휴일’처럼 제목만 들어도 탄성이 나오는 영화의 OST가 수록되어 있는데, 엄마가 50여 년 전에 거금을 들여 구매한 것이다. 첫 월급을 거의 다 쓸 정도로 고가의 제품이었지만 엄마는 월급을 타면 LP를 꼭 사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훗날 결혼을 하면 LP를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청소를 하는 모습을 꿈꿨단다. 음악소리로 꽉 찬 집에서 우아하게 총채를 휘두르는 젊은 엄마의 모습이 상상된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허니문 베이비를 낳아 기르다 보니 여유를 가질 수 없었고 LP의 존재는 자연스레 잊혔다.
턴테이블이 생기고 엄마의 ‘세계 영화음악 전집’은 내 차지가 되었다. 이십 대의 엄마가 꿈꿨던 것처럼 요즘 나는 LP를 틀어놓고 집안일을 한다. 세월의 흔적 덕분에 엄마의 LP는 ‘타다닥 타다닥’ 튈 때가 많다. 누군가에게는 잡음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음악의 일부분이다. 때로는 그 소리가 나오는 순간을 숨죽여 기다리기도 한다. 노래가시작되기 전에 깔리는 ‘지지직’ 소리도 사무치게 좋다. 마치음악이 심장에 닿는 소리 같다.빙빙 돌아가는 LP 판을 보고 있으면잡념도 사라진다.
이제 턴테이블이 있으니 LP를 사야 하는 타당한 이유가 생겼다. 나는 여전히 다른 물건을 사는 일에는 관심이 없지만 LP에 있어서만큼은 예외다. 김광석, 산울림, 전람회, 쳇 베이커, 존 메이어...... 갖고 싶은 앨범이 차고 넘친다. 소유의 기쁨을 알아버린 나는, 이제 누군가 선물로 뭘 받고 싶은지 물으면 빛보다 빠른 속도로 대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