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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딘의 우연한 연결 Aug 11. 2022

[어딘글방] '자동차'라는 구원 _ 해일

아버지를 입원시키고 혼자 돌아올 때면 나는 운전대를 잡고 소리내어 울었다. 늙고 병든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매정한 딸년인 나에 대한 자책이 뒤섞여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범벅으로 오열하기에 운전석만큼 알맞은 공간이 있을까. 야근을 마치고 밤의 내부순환도로를 달리며 쇼스타코비치를 듣노라면 아아, 내 인생의 치명적인 순간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이대로 지구의 바깥으로 달리고 싶다, 고 아주 많은 순간 생각했다. 운전을 하지 않았다면 정릉에서 상도동까지 매주 월요일 선생님께 20년 가까이 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운전에 대한 단편들이다. 운전석에 앉는 경험과 운전석의 옆에 앉는 경험은 해일의 글에 의하면 몹시 다르다. 어떤 이는 해일의 글에 공감할 것이고 어떤 이는 불편할 수도 있다. 좋은 글은 논쟁을 촉발하는 글이다. 해일은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자동차’라는 구원


해일



일요일 저녁에 뭐하세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일요일 저녁’이란 지옥을 버텨내야 하죠. 대개 저녁 8시부터 시작되는 이 지옥은 아주 무시무시해요. 차라리 진짜 지옥에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니까요. 당신들처럼 나도 10년째 매일같이, 일요일 저녁과 싸우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 지옥에서 러닝을 해요. 날파리떼의 맹렬한 공격을 받으면서요. 이이제이라고나 할까요. 더 강한 고통으로 고통에 맞서는 거죠. 


러닝을 하는 시간은 중요합니다. 비단 그게 지옥을 견뎌내는 무기이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대부분 그 시간에 무얼 쓸지 결정하거든요. 몸이 덥혀지고 이어폰을 꽂은 귀에 땀이 흐르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면 머릿속의 데이터센터가 가동되기 시작합니다. 이 데이터센터의 가동 조건은 몸이 완전히 감각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알았죠. 인간은 관념이 아니라 몸을 통해 사고한다는 걸요. 꽤 괜찮은 생각이 떠오를 때는 대부분 몸이 기민하게 반응할 때였죠. 몸의 감각 센서를 최대치로 올리려면 이렇게 운동을 하거나 낯선 공간에 가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공간에 가는 일은 제게 매우 중요해요.


이 친구는 새로운 공간에 저를 빠르고 안전하게 데려다주는 친구입니다. 쌍용자동차의 티볼리, 2017년형이죠. 5년 전 2천만원을 지불하고 이 친구를 구매했습니다. 집도 없는데 뭔 차를 사냐고 했지만 그 말을 들은 언니가 일갈했죠. 집이 없으니까 차라도 있어야지. 그래서 덜컥 사버렸어요. 무려 2천만원짜리 충동구매였습니다. 이름은 직바, '직진밖에 모르는 바보'예요. 초보운전 시절 끼어들기에 실패하고 직진만 계속해서 친구가 붙여준 이름이었죠. 이 친구가 제 삶의 궤도를 얼마나 바꿔놓을지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낯선 공간에 가는 걸 좋아하지만 그건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동수단이 확보되어야만 가능했습니다. 태생이 귀차니스트인 전 대중교통이 싫었습니다. 복잡하고, 피곤하고, 성가셨죠. 당시 돈도 없고 면허도 없던 제가 고안해 낸 방법은 차를 가진 남자를 사귀는 일이었어요. 아, 물론 이게 애인을 사귀는 이유는 아니었지만 차가 없는 남자는 만날 수 없다, 가 기초 전제이긴 했습니다. 이 방법은 효율적이었고 또 어느 정도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 그들이, 그들이 가진 차가, 저를 '데려다' 줬으니까요. 


물리적인 위치가 때론 그 어떤 말보다 많은 것을 설명합니다. 남자친구 차에, 조수석에 타는 제가 그랬죠. 남자친구는 다정한 사람도 있었고 아닌 사람도 있었어요. 그러나 그들은 한가지가 모두 같았습니다. 운전대에 오르는 순간 제가 충실한 조수이길 바랐죠. 운전자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건 덤이었습니다. 나의 안전이 그 핸들에 걸려있었으니까요. 아, 20대 초반에 속력을 즐기던 돌아이는 고속도로에서 제게 말하곤 했죠. 스릴쩔지? 스릴이 있긴 했습니다. 2시간 내내 황천길 문앞까지 왔다갔다 해야 했으니까요. 할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그에게서 핸들을 뺏는 것도, 그만하라는 말도요. 그 말이 입밖으로 나오는 순간 가드레일을 들이받을 것 같았거든요. 


그들은 하나같이 손버릇이 좋지 못했어요. 차에만 타면 허벅지를, 가슴을, 엉덩이를 습관처럼 주물럭거렸죠. 이 짓을 하려고 나를 차에 태운건지, 아니면 합의된 목적지에 함께 가기를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혼자만 달아오른 미친 질주는 침대에서도 계속됐죠. 차 안에서의 성추행이 마치 삽입을 위한 하나의 전희가 된 듯했습니다. 네. 늘 그렇듯 제 기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죠. 나는 그냥 모든 게 귀찮았고, 성가셨고, 빨리 이 지루한 섹스가 끝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연인이 아니라 이 사람의 노동자란 생각이 들었죠. 끊임없이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노동자요. 아무도 제게 그 역할을 강요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한 일도 아니었죠. 


나는 성실한 직원이었습니다. 콘돔이 없다는 그에게 나가서 사오라는 말도 할 수 없었죠. 그의 주머니에 콘돔이 있는 걸 알았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습니다. 콘돔 실랑이로 그 알량한 분위기를-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기분을-망치기 싫었거든요. 나는 어렸고, 뭘 잘 몰랐고, 그래서 가장 침해하기에 적합한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착하고 예쁘고 말 잘 듣는, 무해한 존재를 연기해야 했죠. 나를 위해 운전을 해주고 호텔비를 결제하는 상대를 위해서, 이 ‘서비스’는 제가 제공해야만 하는 거래의 값이라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그건 그냥 거래였습니다. 예쁜 인형이 아닌, fuckable 하지 않은 여자친구란 것은 애초부터 성립할 수 없는 명제였죠. 높은 구두를 신고 짧은 치마를 입고선 종종거리는 저를 위해 그들은 여유있게 미소지으며 차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에스코트’라고 불렀지만 실은 그 범위 바깥으로 나가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나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어요. 점점 숨이 막혀왔습니다. 나는 아무 때나 주물럭거려도 되는 엉덩이가 아니라, 생각과 의사를 가진 사람이었으니까요. 


좋을 때 좋은 얼굴을 하는 건 너무나 쉽습니다. 중요한 건 나쁠 때였죠. 높은 확률로 나는 그 순간에 상대의 맨얼굴을 봐야 했습니다. 그리고 상대는, 상대보다 덜 중요한-혹은 그래야만 하는-나의 위치를 각인시켰죠. 그 일은 너무나 쉬웠습니다. 불쑥 나타나 강제로 나를 자신들의 차에 태우고,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묻는 나의 말을 가뿐히 즈려밟고 전방 주시만 하면 됐으니까요. 설사 도착한 곳이 마음에 든다고 해도 한시간 동안 벌어진 납치극이 로맨틱코미디로 바뀌진 않았습니다. 슬슬 지겨워졌죠. 조수석에 타는 내가, 언제나 상대보다 덜 중요한 내가, 그의 차를 타고 편안히 돌아가기 위해 끝까지 그의 기분을 맞추려 드는 내가, 신물나게 지겨웠습니다.


직바를 구매하고 드디어, 이 세계에 완전한 안녕을 고했습니다. 직바가 저를 구원했죠. 어떤 구원은 충실한 믿음 대신 자본으로 쉽게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이 구원은 매우 물리적이고 실용적이기도 했죠. 직바는 저를 위협하지도 않고, 제게 이상한 서비스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연료를 때에 맞춰 채워주고, 정기적으로 안전 점검을 받고, 세차를 해주면 됐으니까요. 사고가 났을 때 나를 지켜주는 건 남자친구가 아니라 현대해상 다이렉트 보험입니다. 이걸 알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을 낭비했어요.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라고 했었나요? 이 말은 틀렸습니다. 착한 여자든 나쁜 여자든 자동차가 있으면 걍(그냥) 어디든 가면 돼요.


내가 직바를 만나기 전에 누려왔던 자유는, 어디까지나 의존적인 자유였습니다. 운전자의 허락을 구해야만 하니까요. 여성이 차를 구매하면, 차를 운전하면, 문제는 너무 쉽게 해결됩니다. 우리는 당연한 사실을 가끔 잊고 사는 것 같아요. 우리가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치 않은 곳에 '그냥' 갈 수 있다는 걸요. 직바는 스스로 목적지를 결정하고, 속도와 방향을 결정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내게 알려줬습니다. 또 오랫동안 뒤엉켜있던 나의 두려움을 깔끔하게 몰아낸 친구이기도 해요. 그제서야 알았죠. 그 두려움의 실체는 ‘부탁’이었다는 걸요. 나의 욕망을 누군가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더이상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이, 완전히 나를 해방시켰습니다. 운전 핸들을 쥐고 나서야 비로소 삶의 방향키를 내가 쥐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게 참 묘하지만, 어찌됐든 나는 자유롭습니다. 나의 욕망은 이제 더 이상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치 않으니까요.





발행일. 2022.07.09 | 글감. 잇템(인생템)


해일 (조혜림)


일을 하면서 글을 쓰고 가끔 춤을 춘다. 기꺼이 삶을 떠받치기 위해 좋아하는 일들을 목숨걸고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글을 가장 잘 쓰고 싶은데 늘 마음같지 않아서 고통 받는다. 애써 잘하려는 마음이 망쳐버리는 것들을 글쓰기를 통해 배웠다. 


부디 오래 쓰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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