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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딘의 우연한 연결 Aug 11. 2022

[로드스꼴라 글방] 마지막을 기리는 글 _ 탐

벚꽃잎이 눈처럼 낙하하는 봄날, 나는 종종 맨발로 꽃사태 난 자리를 걸었다. 차갑고 보드라운 꽃무덤, 아련하고 찬란한. 아카시아 향내는 황홀하지만 위험했다. 치명적인 사랑 속으로 두려움 없이 걸어들어가도록 만들었다. 모란과 작약과 라일락과 목련이 피어나던 엄마의 꽃밭은 내 글쓰기의 정서적 고향이다. 당신이 이 문장들에 반응한다면 홀로세의 호시절을 누렸던 사람이리라. 탐의 글은 사피엔스가 누렸던 봄날에 대한 증언이다. 아찔하게 눈부셨던 사피엔스의 영광의 날들. 탐이 그 마지막 세대가 아니길 부디.





마지막을 기리는 글




All Yesterdays』 라는 책이 있습니다. ‘지금 존재하는 생물종들이 대부분 멸종한 후, 미래에 새로운 지적 생명체가 등장해 <지금의 현생생물>을 복원한다면 어떨까?’ 하는 가정을 주제로 그려진 가상의 복원도들을 엮은 책입니다. 그들이 그린 가상의 복원도는 우리가 아는 동물의 모습과 사뭇 다릅니다. 그것은 마치 뼈와 가죽만 있는 생명체 같습니다. 뼈 위에 근육도 붙고, 살도 붙고, 털도 붙어 동물이 되는 것인데 얇은 거죽이 뼈를 감싸고 있을 뿐입니다. 뼈대만을 가지고 게으르게 상상해 낸 결과입니다.

인간은 참으로 호기심이 많은 존재입니다. 먼 과거에 살던 이들의 유해나 흔적을 보고 나름의 복원도를 그려내지요. 하지만 복원도는 인간의 상상일 뿐입니다. 기술은 끊임없이 발전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공룡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평생 알 수 조차 없습니다. 그저 어떻게 생겼을 것이다, 짐작만 하겠지요.

이 글은 과거를 궁금해할 후예들을 위한 글일지도 모릅니다. 과거를 짐작하며 허무맹랑한 상상을 펼칠 후예들에게 분명 좋은 단서가 될 것입니다. 어쩌면 꼭 후예가 아니더라도, 혹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전혀 되지 않더라도 아무렴 상관 없을지도요. 저는 그저 기릴 뿐입니다.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는 것들을요.



5월의 등나무꽃 지붕


달콤했던 방학을 겨울과 함께 떠나보낸 아이들의 눈앞에는 새 계절이 서 있다. 3월, 새 마음과 새 나이를 가지고 학교로 돌아온 우리를 반겨주는 건 벚꽃을 꼭 닮은 매화였다. 정신없이 학교에 적응 하다 보면 하얀 풍선같은 백목련, 동요로 많이 접한 노란 개나리, 연분홍 빛깔이 화사한 진달래가 차례대로 얼굴을 내밀고 우리를 뒤늦게 반겼다. 목련이 꽃잎을 떨구고 개나리 가지에 여린 새싹이 틀 때  쯤이면 벚나무 가지 끝에 하얀 벚꽃송이가 주렁주렁 열렸다. 깨끗하고 통통한 목련 꽃잎을 주워 끝부분을 톡 따고 그 쪽으로 바람을 불어넣으면 작은 풍선이 됐다. 날리는 벚꽃잎이 바닥에 닿기 전에 잡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우리는 목련 풍선을 만들고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잎을 잡으며 놀았다. 풍선과 첫사랑의 재료가 사라질 때 쯤엔 바람에 실린 달큰한 향이 교정을 가득 채웠다. 교목인 등나무가 피워낸 꽃 향기였다.

교정 중심의 커다란 운동장 옆에는 운동장을 ‘ㄱ’자로 감싸는 스탠드가 있는데, 5월이 되면 연자줏빛 등나무꽃이 그 스탠드의 지붕이 됐다. 그 시기엔 점심을 먹고 나서 꼭 스탠드에서 놀았다. 등나무꽃 그늘 아래에 있으면 그렇게 덥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길게 몸을 늘어뜨린 등나무꽃 아래에서 시덥잖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공기놀이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춤을 췄다. 바람이 살랑 불 때면 등나무꽃들도 일동 살랑, 하며 향을 냈다. 그러면 달고도 알싸한 향이 코 끝에 걸렸다.

그 때부터 십여년정도가 지난 지금, 등나무는 4월에 꽃을 피운다. 3월부터 시작해 차례차례 순서대로 우리를 반기던 매화,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꽃은 이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번에 얼굴을 내민다. 여러가지 봄꽃들이 함께 피어있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지만, 너무 아름다워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데 핀 봄꽃을 가만히 보고있으면 사계절의 꽃들이 항상 피어있다는 꽃밭이 떠오른다. 이 세계에는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래야 할 꽃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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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설화 중 <서천 꽃감관 할락궁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천꽃밭을 지키는 ‘할락궁이'에 대한 설화입니다. 오금까지 오는 뽀얀 물을 지나 잔등까지 차는 노란 물을 건너, 목까지 차오르는 붉은 물의 큰 강을 건너면 끝없는 꽃밭이 나옵니다. 그로부터 삼천리를 더 가면 저승입니다. 죽어야만 갈 수 있는 저승도 이승도 아닌 곳. 그 곳이 서천꽃밭입니다. 누군가는 지상에 없는 꽃들만이 피어있다고도 말하고, 또 누군가는 지상에 없는 꽃들과 함께 사계절의 꽃들이 한데 피어있다고도 말합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인지라, 서천에 가보지 않고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요. 개화시기가 다른 꽃들이 한데 핀 계절, 우리의 세계가 점점 서천을 향해가고 있으니까요.





발행일. 2022.04.13 | 글감. 전승하고 싶은 다섯가지 단어



탐 (정윤지) 


질문하는 사람.

시각언어로 말하는 사람.

글이 가지는 힘을 아는 사람. 

아름다운 것과 재미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손으로 하는 섬세한 작업을 좋아합니다. 그 중 실과 천을 소재로 한 섬유미술을 특히 좋아합니다. 

수영을 좋아합니다. 팔다리로 물살을 가르며 레일을 빙글빙글 돌다보면 명상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디자인을 하며 돈을 법니다. 전하고자 하는 바를 아름다운 시각언어로 풀어내는 일입니다.

디자인 외에 또 다른 좋아하는 것으로도 돈을 벌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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