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를 만나다
흠, 이 시점에서 이슬아에 대해 쓴다는 건 조금 난감한 일이다. 이슬아의 첫 책,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는 출간한 지 이틀 만에 중쇄를 찍고 일주일 만에 3쇄를 돌파했다. 뿐이랴, ‘일간이슬아’를 묶어 독립출판한 『일간 이슬아 수필집』은 사천부가 넘게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 ‘단군 이래 최대불황’이라는 출판계에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영하도 공지영도 유시민도 아닌 신출나기 작가의 책이, 더구나 소설도 자기계발서도 드라마의 원본도 아닌 어쩌면 모호한 장르의 글이, 게다가 『일간 이슬아 수필집』은 ISBN도 받지 않아 공식출판유통망에 진입도 되지 않은 책이니, 이 심상찮은 반응은 의외라 할 수 있겠다. 나름 센세이션한 일이어서 신문이나 라디오 팟캐스트 등 다양한 매체와의 인터뷰도 많고 ‘작가와의 대화’ 같은 이벤트도 계속 열리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시점에서 이슬아에 대해 쓴다는 것은 매일 기록을 갈아치우는 육상선수에 대해 쓰는 것과 같은 일이겠다. 잘 사는 청년보다는 유명해져 버린 청년으로 분류되는 게 지당할 거 같지만 유명해진 청년은 잘 사는지 문득 말을 걸어본다.
일간 이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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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너무 힘들어, 다시 생각해 봐.”
‘일간 이슬아’ 기획을 들었을 때 내가 한 첫 말이다. 글을 써 본 인간이라면, ‘마감’이라는 것을 해본 인간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반응을 했을 것이다. 이슬아는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중이었고 나는 회의를 하러 들어가는 길이라 긴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문득 박경리 선생을 비롯한 당대의 쟁쟁한 작가들이 신문연재를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카톡을 보냈다.
생각해보니 신문연재 하던 작가들이 있었다. 그것도 일간이었지. 맷집이 생기는 작업이었고 그만큼 혹독했지만 그래서 대하소설 같은 대작이 나오기도 했다. 너무 소진된다는 느낌이 아니라면 하고 싶은 대로 언제까지 해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첫 글을 받아보고서야 나는 이것이 혁명의 전조임을 알았다. 아직은 거대한 균열이 일어나진 않지만 머지않아 전체를 뒤흔들. 기존의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사뿐히 배반하며 글이 직거래 되는 현장, 은 소슬하고 오롯했다. 중간유통망을 모두 제거하고 이토록 정면으로 이토록 성큼 마주하다니. 작가와 독자가. 위험하지만 매혹적인 실험이며 모색이었다.
태어나보니 집에는 엄마 아빠 말고도 많은 어른들이 있었고, 내 이름에 한자를 붙여준 건 아빠의 아빠, 그러니까 할아버지였다. 그는 애 이름을 큰 거문고 슬(瑟)자와 예쁠 아(娥)자로 지었다. 몇천 번의 호명 이후 난 스스로를 슬아라고 인지하게 된다. 자신을 슬아라고 믿게 된 나는 십년은 대가족 속에서 십 년은 핵가족 속에서 그리고 칠년은 독립해서 살았다. 그 이름으로 살아온 지 이십 몇 년 만에 문득 의아해졌다. ‘예쁠 아’는 어째서 ‘계집 녀’와 ‘나 아’자가 합쳐진 모양의 한자인가. 그리고 뜬금없이 거문고는 웬 말인가. 여전히 답십리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 제 이름에 왜 거문고를 넣은 거예요?
그는 여느 때처럼 맨손체조를 하다 전화를 받았는지 헐떡이며 대답했다.
너 거문고 소리 들어본 적 있니?
나는 잠시 생각해봤다.
아뇨.
그는 주저 없이 말했다.
그 소리가 인마, 심금을 울려 인마.
- 『일간 이슬아 수필집』 중
‘럭키’하다고 이슬아는 최근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책이 잘 나가는 것도 여기저기 초대받아 책을 홍보할 기회가 생긴 것도 럭키한 일이라 힘들지만 열심히 하고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그렇지요, 럭키한 일이지요 하고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다 문득 그녀의 노동이 떠올랐다. 지난 10여 년 그녀는 한 번도 쉬지 않고 글을 썼다. 일주일에 한 편씩 글을 써서 합평회를 하는 ‘글방’모임에서 이슬아는 가장 성실한 작가였다. 거의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매주 글을 썼다.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도 ‘페이퍼’를 비롯 여기저기에 글을 기고했다. 웹툰으로 등단하면서는 레진코믹스 등의 잡지에도 연재를 했다. 10여 년간 그녀는 주간과 월간과 일간의 마감을 하며 살았다. 인간계에는 마감을 하는 삶과 마감이 없는 삶이 있다. 오죽하면 데드라인이라 했을까. 그 10년 동안 동글동글 몽실몽실 부드러웠던 그녀 몸의 라인은 각이 지고 마르고 조금 딱딱해졌다. 연재노동자,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의 띠지에 그녀는 정말 연재노동자 같은 모습으로 앉아있다. 몸을 갈아내며 마음을 불에 달구고 두드리며 보낸 시간은 대장장이가 단철장에서 보낸 시간에 다름없다. 밤의 내부순환로를 달리며 나는 이슬아가 럭키할 때가 된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슬아 작가라고 소개할 때도 있지만 굳이 연재노동자라고 덧붙이는 이유는 원고를 청탁받아서 썼는데 돈을 못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에요. 글쓰기는 고귀한 예술이기도 하지만 몸과 마음과 시간을 바쳐서 하는 노동이기도 한데 모호한 예술작업으로 여겨질 때는 돈 얘기를 하기가 애매해졌던 것 같아요. 문화예술계 열정 페이. 돈을 똑바로 받고 싶어서 연재‘노동’에 힘을 실어 말했던 것이 첫 번째 이유고요, 여러 매체에 연재하면서 지내보니 진짜 너무나도 졸라게 힘들어서 위에 병나고 어깨에 병나고 등등. 정말 그야말로 노동이어서 그렇게 말했던 것도 있어요.
엄마는 나를 가진 날을 정확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1991년의 가을밤이었고, 서울시 동대문구 답십리에 지어진 오래된 주택 반지하의 방바닥 위였다고 한다. 여름 내내 꺼두었던 보일러를 슬슬 돌리기 시작한 계절. 한껏 데워진 방바닥 위에서 엄마와 아빠는 뜨겁게 껴안았을 것이다.
역동적인 수축과 이완.
격정적인 들숨과 날숨.
같은 것을 상상하다가 난 순식간에 피로해져서 관두고 만다. 거의 모든 일에서 구체적인 걸 선호하는 나지만, 부모의 섹스를 상상하는 일에서만은 잠시 흐릿해지는 게 좋겠다. 아무튼 언젠가 아빠가 지나가듯 했던 말에 의하면 엄마는 지나치게 명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소엔 풀어진 얼굴로 천장을 보다가 금세 코를 골며 잠들곤 했는데, 그날 밤엔 이상하리만치 또렷했던 것이다. 엄마는 차분한 목소리로 아빠에게 말했다.
“딸을 가지게 된 것 같은 기분이야.”
- 『일간 이슬아 수필집』 중
글방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어떤 출판사 대표와 모 방송국 PD가 찾아온 날이었다. 글방을 취재하고 싶다고 연락을 해와 비밀결사도 아니었던 터라 그러자고 하여 외부인이 둘이나 참관하게 된 조금 특별한 날이었다. 물론 이슬아도 그날 글방의 주요 멤버 중 하나였다. 늘 하던 대로 7, 8명 정도가 둘러앉아 합평을 시작했는데 크리틱을 하는 도중에 어쩌다 오르가즘 이야기가 나오고 말았다. 당시 글방은 ‘에로의 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종종 글방은 어떤 흐름을 타곤 했는데 그즈음은 어쩐지 매주 한두 편 섹스에 관한 글들이 나왔다. 자세한 이야기가 다 기억나진 않지만 모두 각자가 경험하고 생각한 오르가즘에 대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되었고 어쨌거나 섹스에 대한 욕망이나 감각이 비교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선으로 이야기가 마무리 될 때까지 본의 아닌 후끈한 토론이 되어버렸다. 합평회가 끝나고 늦은 저녁을 먹으러 가는 게 우리의 수순이어서 출판사 대표에게도 방송국 PD에게도 함께 가자고 권했지만 어쩐 일인지 두 사람 모두 손사래를 치며 집에 일이 있어서 이만, 이라며 총총히 사라졌다. 돌이켜보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의 여자들이 그토록 치열하게 오르가즘에 대해 논하는 장면은 TV에는 몹시 부적절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슬아의 글은 성에 대해 몹시 솔직하다. 패션이나 음식에 대해 말하듯 그녀는 섹스에 대해 말할 줄 안다. 탁월한 재능이다. 조선 중기 이후 삭제되거나 은폐된 관능의 DNA가 복원된 거 같아 이슬아 글의 에로틱함은 종종 통쾌하기까지 하다. 몸의 언어를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린 부족은 교감의 통로가 좁아지거나 폐쇄적일 수밖에 없다. 사랑은 말과 몸을 버무려 완성하는 것이므로. 몸의 욕망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나눌 줄 아는 사회는 윤택하고 풍요로운 문화적 토대 위에서 사랑, 을 확장해간다.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 전설은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설명하는 데 이용되었고, 성서의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문화·노동의 발생 근원에 남녀 간의 에로티시즘이 놓여 있음을 상정하고 있다고 다음(daum) 백과사전에는 나와 있다. 열린 담론의 장에서 에로티시즘을 다루지 못할 때 성은 음란마귀가 되어버린다. 이슬아는 일상 속에 섹스가 존재함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줄 아는 드문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이슬아의 삶과 글은 경직되고 편협하며 위선적인 것들을 산뜻하게 즈려밟으며 출발한다. 여전히 여성이 에로티시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떤 오해를 동반하는 터라 이슬아가 다치지 않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쓸 수 있으려면 그녀의 글을 읽어내고 해석해줄 비평가 그룹이 필요하다. 신라나 고려의 후끈한 이야기가 조선에 이르러 단절된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러다 보니 에로의 시대가 회복될 틈 없이 미투의 시대로 진입해버렸다. 서로가 가진 섹시함에 대해 마음껏 찬미할 수 있는 시절을 사회구성원들이 다 함께 누렸다면 이렇게까지 까칠하고 폭력적이지 않았을텐데, 라고 생각하는 건 순진한 오해일까. 큰 용기 없이 여성이 에로티시즘을 논할 수 있는 사회는 말랑말랑하고 다정하고 유쾌할 가능성이 높다에 기꺼이 한 표를 던진다. 도무지 금지와 강박이 없는 유연하고 부드러운 감수성은 매우 드물고 소중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를 구원할.
작년 어느 날에는 패션 잡지 <코스모폴리탄>에서 화보 사진을 찍었다. 나의 인터뷰와 사진이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기로 되어 있었다. 스튜디오로 가서 얇은 소재의 아이보리색 바디수트를 입고 몹시 당당해보이는 포즈로 찍혔다. 원피스 수영복과 모양이 비슷한 란제리였다. 당당한 자세로 찍으려고 했던 건 아닌데 포토그래퍼가 자꾸 당당하게 해보자고 하셔서 뭐라도 했다. 몇 주 뒤 잡지를 받아보니 지나치게 자신만만해보이는 내 사진 옆에 이런 문장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유두가 드러나면 어때서요?’ ‘저는 누구보다 저 자신을 사랑해요.’ 나는 그런 말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물론 브래지어를 안 하고 다니지만 인터뷰에서 저런 말을 한 적이 없었고, 누구보다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더더욱 한 적이 없었다. 야하거나 선정적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구린 대사라 견디기 어려웠다.
- 『일간 이슬아 수필집』 중
그런 황과 양은 가끔 만나 목욕탕에 가고 몸보신을 한다. 얼마 전 그녀들은 이틀 동안 함께 대추를 달여 먹기까지 했다. 그녀들이 달인 대추차는 흡사 아마존의 늪에서 건져 올린 액체처럼 걸쭉하고 진했다. 20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황과 양은 각종 일에 치여서인지 기력이 예전 같지 않아 보인다. 특히 양은 최근 몸에 이상 징후가 보인다. 양이 최근 앓는 불행들은 대충만 전해 들어도 눈물이 나는 일들이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요즘 자주 몸이 아프다. 몸과 맘에 낯선 방식으로 탈이 나고 있다. 두 여자애가 모여 자신들의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저녁 내내 대추와 도라지와 황기 등을 솥째 달이는 모습을 상상하면 뭔가 아주 무해한 느낌이 들었다. 애처롭고 귀엽기도 했다.
- 『일간 이슬아 수필집』 중
서희 총명하고 담대한, 윤씨부인 서늘하고 대쪽같은, 투명하고 섬약한 월선, 질투의 화신 강청댁, 생명력으로 충만한 임이네, 욕망으로 빛나는 귀녀, 헌신적인 간난할매, 봉순이, 별당아씨, 임명희, 함안댁, 옥이네, 유인실, 공송애, 임이…. 『토지』를 떠올릴 때면 생각나는 인물들이다. 길상이, 김환, 강포수, 김두수, 최치수, 조준구도 주요인물이지만 『토지』의 가장 매혹적인 인물들은 여성들이다. 『태백산맥』이나 『장길산』,『임꺽정』과는 다른 점이다. 『태백산맥』을 읽고 나서 형형하게 남아있는 인물은 김범우, 염상진, 염상구, 하대치, 심재모, 이현상이다. 소화나 죽산댁도 주요 인물군이지만 아쉽고 찜찜하다. 『장길산』에서도 눈길을 사로잡는 이들은 남성들이다.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5년에 걸쳐 박경리 작가가 쓴 대하소설 『토지』에는 700여 명 정도의 등장인물이 나온다고 한다. 아마 그중에 절반은 여성일 것이다. 그녀들은 욕망하고 투쟁하고 성취하고 좌절하고 질투하고 새로운 세계로 성큼 손잡고 내딛는다. 서희가 봉순이 낳은 딸 양현을 거두어 친딸처럼 키우는 대목에서 나는 여성의 연대를 배웠고, 남편의 성이 아니라 자신의 성을 물려주는 장면에선 호주제폐지 부모성함께쓰기를 훌쩍 뛰어넘는 노작가의 전위를 보았다. 여성작가가 여성등장인물을 통해 여성의 욕망을 드러낸다면 그 작품은 페미니즘의 자장 안에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쾌하고 솔직한 복희, 아프고 아름다운 울, 독특하고 멋진 양, 영민한 댐, 스위스 친구와 할머니, 프랑스에 살고 있는 스승, 아프리카에서 한국인 기업의 찬모를 하고 있는 베트남 여성, 이모와 외숙모….
이슬아의 두 책을 읽고 나면 기억에 남는 인물들이다. 물론 하마도 웅이도 찬이도 쏠쏠한 캐릭터지만 이슬아 책의 주요 등장인물은 여자들이다. 그녀들은 함께 밥을 먹고 서로의 재능을 알아봐 주고 싸우고 시샘하고 징징대고 보살피고 돌본다. 앞으로도 아마 이슬아는 여자들의 서사를 촘촘이 짜내려갈 것이다. 동서를 잇고 고금을 이어 붙여 만든 그녀의 조각보로 세상을 덮는 이불을 만든다면 그 또한 멋진 일이 될 것이다. 늘 그랬듯 그녀의 글에서 여자들은 의문을 품고 후회하고 세상을 직시하고 악악거리고 연대하고 울고 비전을 제시하고 불안해하고 뿌듯해할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하여 마침내,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지극히 정치적인 것임을 알아갈 것이다.
유럽에 와서 생각했어. 이 세계가 존나 전쟁 같다는 거. 나에게 팔레스타인은 언제나 먼 이야기였어. 그런데 이제는 난민에 관한 이야기들이 너무 가깝게 다가와. 내가 다닌 어학원에는 시리아를 포함해 여러 나라에서 건너온 난민들이 많았어. 나는 어쩌다가 팔레스타인 남자애를 좋아하게 되었지. 그러자 팔레스타인이란 나라는 나에게 완전히 달라져 버렸어. 네이버 검색창에 매일 팔레스타인을 검색하게 되는 거야. 가자지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몇 명이 다치거나 죽었는지. 한국에서는 제주도에 난민 오백 명 받는 것 가지고도 이 난리가 일어나는데, 세계적인 난민 문제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이란 게 얼마나 협소하겠어. 베를린 전철에서 가끔씩 독일인이 중동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소리치는 걸 봐. 너네 나라로 꺼지라고 다짜고짜 소리를 질러. 그 옆에서 또 다른 독일인이 말려. 그런 말 하지 말라고. 그러다가 독일인끼리 싸워. 그런 걸 자주 목격해.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남자애를 좋아하고 있다고 말하면 얼마 후에 이렇게 물어봐. 그 파키스탄 남자애랑은 어떻게 됐냐고. 그들에게는 다 비슷비슷한 거야. 팔레스타인이나 파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이나…. 하지만 나한테는 존나 다르단 말이야. 그들은 또 이렇게 물어. 독일에 유학 갔는데 왜 독일 남자를 안 만나고 팔레스타인 남자를 좋아하냐고. 난 그게 무슨 이상한 소린지 모르겠어.
- 『일간 이슬아 수필집』 중
연재가 중반쯤 접어들 때 이슬아는 일주일에 한 번 친구들의 글을 보내겠다고 공지했다. 연재가 지치고 힘들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주변에 글 쓰는 동지들이 있는데 그들의 글이 매우 훌륭해 함께 읽고 싶다는 맥락에서였다. 오호라, 그것은 ‘일간 이슬아’가 개인매체가 아니라 젊고 용감한 글쟁이들의 플랫폼으로 도약하는 순간이었다. 더불어 이슬아가 좋은 글을 선별하고 다듬어내는 편집자로서의 자질을 모색하고 실험하는 일이기도 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확장할 줄 아는 사람. 이번에도 여전히.
이슬아 친구 코너를 신설했을 때 반대가 많았어요. 그 소식을 보낸 다음 날 100통의 메일이 뜬 거예요. 메일 박스에 100통의 편지가 와 있으면 일단 커다란 두려움을 느끼게 돼요. 메일 내용은 너무 좋은 생각이라서 응원한다는 말이 반이었고 나머지는 정말 반대한다, 아주 잘못된 선택이다, 친구가 쓴 글 안 궁금하다, 약속한 거에 대한 책임감이 없다 등등이었죠. 그래서 다음날 제가 약속한 스무 편의 수필 플러스알파로 친구들 글을 보내주겠다고 다시 메일을 보냈어요. 사실 그러면 반대했던 사람들도 할 말은 없는 거거든요. 만약에 친구들 글이 안 좋으면 다음 달부터 구독 안 해도 된다는 말도 했죠. 개인적으로는 친구들 글에 자신이 있었어요. 오래 읽어오기도 했고, 글방에서 좋은 글이라는 데 합의가 모아진 글이기도 했으니까. 나중에는 모두 친구코너를 반가워할 거라 생각하고 시작한 거죠. 친구들이랑 서로 힘든 이야기 나누고 위로하는 것도 좋지만 돈이 해결해주는 일이 따로 있으니까 돈을 어떻게 주지, 늘 그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내 생계랑 쇼핑할 돈을 해결하고 나면 나머지로 친구들과 일을 벌이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일간 이슬아’에서 판을 벌려서 처음 신나게 시도를 해봤던 거 같고. 다시 ‘일간 이슬아’를 연재해도 친구코너를 할 생각이에요. 플러스, 친구들이 다 조금씩 인생을 비관하는데 그나마 살고 싶은 애가 저인 거 같았어요. 다들 우울과 무기력을 말하고 있잖아요. 처음엔 개인의 성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많이 늘어나니까 시대의 징후 같다고 느끼기 시작했죠. 그 와중에 나는 왜 기력이 있는 걸까 생각해봤는데 단순무식한 생각이지만 아주 작은 성공들, 성취들이 도움이 되었단 생각이 드는 거예요. 올해 친구의 친구들이 죽는 걸 보면서 너무 이상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고요. 재밌게 살고 있지만 혼자서 잘 사는 거 되게 이상한 일인 거 같아요.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친구랑 같이 하는 영역을 넓히려고 노력하는 거 같아요.
그러고 보면 이슬아는 친구들과 ‘라디오 글방’도 하고 2018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이슬아와 친구들’이란 부스를 차려 함께 운영하기도 했다. 함께 일한다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다. 같은 생각으로 시작한 거 같지만 일을 진행하는 중에 비로소 각자의 머릿속에 다른 그림이 있다는 걸 알게 되기도 하고, 일하는 방식이나 스타일에서 오해가 빚어지기도 하고, 끝까지 함께 하기로 했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만두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몇 번 그렇게 일을 하다보면 어떤 일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한 조직이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누군간 한두 사람의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슬아는 이 과정을 여러 차례 해 본 사람이다. 때로는 후회도 하고 발등을 찍으며 내가 왜 이 일을 시작했을까 혼자 마음고생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아는 도모할 것 같다. 얘들아, 이리와, 내가 이거 하는데 같이 해보자. 왜냐면 말이야, I am because You are, 이기 때문이지.
내일은 오래 해온 일을 그만두는 날이다. 오늘 밤은 편지를 쓰며 보낸다. 동이 틀 때까지 약 40통의 편지를 완성해서 리본으로 예쁘게 묶을 것이다. 아침엔 이 편지들을 들고 용산역에 가서 여수행 기차를 타야 한다. 여느 토요일마다 그랬던 것처럼. 2014년 여름에 수업을 시작했으니 햇수로 5년간 여수를 오갔다. 나는 그 수업을 ‘여수글방’이라고 불렀다. 거기엔 나를 기다리는 애들이 40명 가까이 있었다. 10살부터 19살 사이의 아이들이었다. 그들에게 이슬아 선생님이라고 불리며 글쓰기 수업을 해왔다. 열 몇 명씩 세 반으로 나눠 두세 시간씩 수업했다. 여수를 오간 횟수는 백번이 넘는다.
- 『일간 이슬아 수필집』 중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간 적이 있다. 이슬아가 초대를 해줘서 알게 된 건데 일종의 독립출판 엑스포 같은 거였다. 이틀에 걸쳐 노원구에 있는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린다고 했다. 나는 둘째 날인 토요일 오후에 갔는데 완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람들이, 그것도 멋지고 근사한 젊은 여자들이 다 모인 거 같았다. 도착한 시간에 마침 ‘이슬아와 함께 하는 작가와의 대화’ 같은 게 열리고 있었다. 이슬아는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도 무려 ‘힙’했다. 빈자리 하나 없이 객석이 꽉 찼다. 무슨 얘길 하나 구경하는데 아, 진정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나 봐,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PPT로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하더니, 맙소사 이슬아가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무려 세 곡씩이나 그것도 매우 잘. 90%가 젊은 여자들인 관객들은 그 장면을 핸드폰으로 촬영했다. 내가 알던 작가와의 대화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박물관으로 가는 게 옳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출간 이후 이슬아는 여기저기 책 이야기를 하러 다니는데 하루는 한 독서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고 했다.
이슬아 생각해보세요. 제가 겨우 27년 살았는데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겠어요. 그런데 똑같은 이야기를 하기는 죽어도 싫은 거예요. 그래서 그날은 1990년대 중반의 바캉스문화에 대해 준비를 해갔어요. 여름에 동해안 가는 게 웬만한 집의 여름휴가 풍경이었잖아요. 우리 가족 사진 놓고 잠깐 얘기하고 그다음엔 종이를 한 장씩 나눠드렸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번 써보자고.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드리고 그다음엔 발표를 해보자고 제안했어요. 안 하고 싶은 분들은 안 하셔도 된다고 말했는데 놀라운 건 그날 참가한 분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자신의 글을 낭독했어요. 어떤 50대 중후반의 아저씨는 손을 덜덜덜 떨면서 읽으시더라고요. 뭉클했어요. 사실 제 이야기가 뭐 그리 재밌겠어요. 제 글을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해요.
넋두리처럼 한 이야기지만 아아 이토록 창의적인 작가와의 대화라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슬아는 일을 확장하고 변주할 줄 안다. 글을 쓰는 일 외에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도 오랫동안 그녀가 해온 일이다. 처음 그 일을 주선한 사람이 나였는데 외국에서 돌아와 한국어로 글 쓰는 게 힘들었던 초등학생 형제를 가르쳐보겠냐는 제안을 이슬아가 받은 것이다. 그 일을 시작으로 여러 지역의 다양한 초등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쳤는데 그 공과 정성은 놀라웠다. 한 해가 끝날 무렵에는 아이들의 글을 모아 문집을 만들어주었고 함께 팟캐스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문집을 만든다는 건 아이들의 글을 교정 교열하고 편집하고 디자인까지 한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과 시간과 돈을 들여야 하는 일을 이슬아는 기꺼이 했는데 왜냐면 정말이지 그 아이들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이슬아의 창의성은 진정성으로부터 나온다. 선택한 이상 사랑하는 것. 그 사랑으로부터 창의성을 건져 올린다.
낭독이 시작되면 웃을 일이 많았다. 글로 누군가를 웃기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그 어려운 걸 그들은 자주 해냈다. 나는 언제나 가장 먼저 웃는 사람이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웃긴 문장들이 그들 입에서 자주 튀어나왔다. 그들 중 몇몇은 자신이 쓴 글을 낭독하다가 종종 울기도 했다. 우는 걸 보고 곧바로 안아주고 싶은 맘을 참고, 글을 마저 읽도록 기다려주는 것도 사랑임을 나는 배웠다. 아이는 내가 건넨 티슈로 눈물을 닦고 마이크에 떨리는 숨을 내쉬면서 끝까지 자기 글을 읽고 내려왔다. 글을 쓰고 낭독해준 그들에게 매번 다르게 고유한 칭찬의 말을 건네는 게 내가 할 일이었다. 아주 유심히 들어야 했다. 준비된 말이 넉넉해야 했다. 평소에 부지런히 읽어놔야 했다.
- 『일간 이슬아 수필집』 중
복희 나이의 반밖에 안 살아봤는데도 나는 내가 될 뻔했던 내 모습을 자주 그린다. 유치원 때 글쓰기로 칭찬받지 않았다면, 만약 춤추기로 칭찬을 받았다면, 어쩌면 나는 무용수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 같은 것 말이다. 복희도 그런 가정을 할까. 다시 어려진다면 그녀가 어떤 인생을 택하고 싶은지 궁금하다. 그녀의 유년기에 대해 나는 자주 묻게 된다. 뭘 잘하고 싶었는지, 무엇으로 칭찬받고 싶었는지 물어보면 복희는 뜬금없이 그 시절 시골 풍경을 이야기한다.
충남 이인면 용성리 잣골 논밭 한복판에 있던 원두막에 관해. 여름에 그 원두막에 누워서 들으면 사방으로 소리가 얼마나 꽉 찼는지를. 무슨 소리가 그렇게 컸냐고 물으면 복희는 자연은 원래 시끄러운 법이라고 대답한다. 무성한 풀과 꽃과 나무에서 나는 소리, 개구리와 귀뚜라미와 새와 소가 우는 소리, 땅에서 나오는 열기의 소리, 일몰의 소리, 시각과 후각과 청각을 다 채우는 그 소리. 자연 속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복희는 자아가 다 흩어지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꼭 내가 없는 느낌이었어. 내가 없는데 아주 충만한 느낌이었어.”
- 『일간 이슬아 수필집』 중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이다.
몰아일체, ‘보글보글 ‘도덕경’을 끓여 후후 불어가며 먹는 복희, 이슬아의 엄마다.
[추신]
복희에게,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나는 당신을 아주 잘 아는 느낌입니다. 아마도 당신의 딸 이슬아의 글에 종종 등장하기 때문이겠지요. 나는 오랫동안 이슬아의 글을 읽었던 사람이라 우연히 당신을 만나게 된다면 ‘안녕, 복희’라고 인사를 하게 되지 않을까 약간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하하. ‘잘 사는 청년’ 이슬아 편을 쓰다가 빙글빙글 방안을 돌아다녔습니다. 글이란 늘 잘 안 써지는 물건이라 그럴 때면 잠시 책상에서 물러나 딴짓을 해보는데 문득, 복희에게, 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복희에게, 어쩐지 그렇게 써보면 재밌을 거 같아 다시 의자에 앉아보지만 역시나 마음대로 잘 안 되는군요. 글의 길, 이 만들어지려면 아직도 요원한 거 같으니 1967년생 동갑인 당신에게 이 시리즈와 관련한 내 속마음이나 털어놔 볼까 합니다.
복희,
나는 말이죠, 그 시절엔 머리를 감으려고 고개를 숙이면 부끄러운 기억들이 후드드득 떨어져 물에 젖은 머리를 다시 쳐들곤 했지요. 사랑과 관련하여 자존심과 관련하여 관계와 관련하여 그토록 격렬하게 그토록 뜨겁게 소용돌이치던 어떤 시절, 이 당신에게도 있었겠지요. 맹렬히 빛나는 거울 속 눈동자를 바라보며 아아 어서 세월이 흘러버려 나이 들기를, 온후한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를, 열망하던 시절, 그 시절이 어쩌면 나의 청년 시절이었겠네요.
그러므로 복희,
나는 잘 사는 청년, 은 거짓말이라는 걸 잘 알지요. 청년이 어떻게 잘 살 수 있겠어요. 그 시절은 그저 견디는 시간이지요. 뻔뻔하고 방자하고 교만하게, 세상과 붙어볼 뿐인 게지요. 세상의 모든 도서관에 불을 질러라, 같은 시를 썼던 것도 그 시절이고, 나는 당대 최고의 시인이 되고 싶다, 같은 시를 썼던 것도 그 시절이었네요 그러고 보니. 미친 거죠. 혼돈과 망설임과 외로움과 분노와 결핍, 이 생의 자양분이라는 걸 알려면 아직도 아직도 아직도 멀어서 잠자리에 누우면 더운 눈물이 귓속을 따라 심장까지 흐르는 시기. 그러므로 잘 사는 청년이 있다면 이미 그는 몸이든 마음이든 청년을 벗어난 사람일 겁니다.
복희,
나는 요즘 종종 내가 원래부터 화가 잘 안 나고 원래부터 삶이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꿈같고 환 같고 물보라 같고 그림자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양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극렬했던 한 시절을 홀랑 잊어버리고 젊은 아이들한테 쓸데없는 잔소리나 늘어놓는 걸 보면 아주 가소롭습니다.
복희,
이슬아는 복희의 딸이면서 참으로 우리들의 딸이지요. 그녀가 내는 빛이 얼마나 세상을 반짝이게 할지 얼마나 다사롭게 할지, 그저 두고 볼 일입니다. 그 또한 얼마나 달콤하고 얼마나 애틋하고 얼마나 사무 친지요. 저 빛나는 젊음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조금 더 훗날 남도의 어느 볕 좋은 담벼락에 앉아 복희, 우리는 세상 모든 딸의 안부나 물으며 산나물이나 다듬다가 조불조불 졸다 깨다, 나비가 나인듯 내가 나비인듯, 그것도 괜찮은 일이겠지요. 잠꼬대처럼.
슬아, 생이란 아흔 아홉 겹 꿈 속의 한 꿈이니, 그 꿈에서 부디 무심히 찬연하기를,
하다 돌아보면, 아이고야 슬아인 줄 알았더니 슬아의 딸이었네요. 저 소녀, 방글방글 웃는.
# 누군가는 알고 싶을 조금 디테일한 대화
Q 일간 이슬아를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A 올해 2월쯤에 목록을 하나 만들었어요. 내가 원하는 만큼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은 발표할 매체가 없어서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만화는 청탁이 들어오는데 글은 청탁도 안 들어오고, 사실 고료라는 것도 먹고 살 수도 없는 돈이고요. 어떻게 하면 왕성하게 쓰는 작가가 될까 하는 생각에 핸드폰 메모장에 내 글을 싣고 싶은 매체, 패션잡지 중에서도 글을 잘 다루는 매체, 몇몇의 신문사를 선별해봤어요. 그간 쓴 글 중에 잘 쓴 글을 골라서 보내볼까 했는데 막상 추려보니까 신문사나 잡지사에 낼 만한 자랑스러운 글이 별로 없다는 걸 알게 됐지요. 내가 아직 준비가 안 됐구나 하고 마음을 접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만화하는 다른 남자 작가를 만났는데 작은 사업 아이템이 있다는 거예요. 말해보라니까 사소한 아이디어인데, 독자를 모아서 자신의 일기를 메일링 해주는 서비스를 생각 중이래요. 듣자마자 이거 하면 좋겠다,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거예요. 저는 후원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일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좀 다르게 시작했어요. 그 작가도 웬만큼 모이고 저도 모였는데, 헐, 충격적으로 엄청 많이 모인 거예요. 좆됐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연습으로 하려고 시도해본 건데, 50만원 이정도 생각했는데. 벌어본 적 없는 수입이 선불로 꽂히니까 완전히 좆 된 거죠. 한 달의 계획을 미리 세울 수는 없었어요. 키워드는 적어보지만 매일 계획을 세울 수는 없어서 그냥 시작한 거 같고 지금까지 왔어요.
Q 막상 해보니까 돈도 되고 글도 많이 남는 작업이었나요?
A 원래 쓰는 속도가 빠르긴 했지만 더 빨라졌는데 그게 좋은 건지 모르겠어요. 급할 때 뭐라도 완성하는 건 훈련이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지금의 제가 그걸 더 연습할 때인지는 잘 모르겠는 거죠. 사실 이게 매일매일 쓰면서도 이거 진짜 게으른 방식이라고 느꼈던 거 같아요. 송신하는 방식이긴 한데 이 정도 분량으로 마감해서 보낸다는 게 익숙해지잖아요. 매일매일 중요한 건 하나도 안 건드린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한 방이 없는 가벼운 잽 30번을 한 달 동안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괴로웠던 적도 많아요.
Q 일간 이슬아를 6개월 하고 그 글들을 책으로 묶어서 독립출판의 형태로 출간했잖아요. 공식적인 출판은 오히려 웹툰으로 했는데 웹툰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요?
A 만화가 양영순 작가님이 제 글을 보고 만화 문법에도 빨리 적응할 거라고 하셔서 만화를 한 번 그려봤어요. 임신테스트 하는 만화를 글방에 가져갔었던 거 기억나세요? 인물이 비율이 제대로 안 맞는다는 피드백도 나왔었는데(웃음). 어쨋든 양영순 작가님이 매일 그리면 만화가가 될 수 있대요. 그래서 조금씩 매일 그렸어요. 정확히 1년 하고 레진코믹스 데뷔한 거 같아요. 양영순 작가님이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고 싶다고 소문을 내야 한대요. 그전까지 저는 정확히 반대로 살아왔거든요. 정말 하고 싶은 건 말을 안했어요. 그런데 양영순 작가님이 페이스북에 만화를 하고 싶다고 쓰라는 거예요. 팔로우도 별로 없으니까 스케치 연습을 매일 올리래요. 올리니까 너무 창피해서 만회하려고 내일 또 그리고, 그렇게 했는데 매일 하다 보니 조금씩 느는 느낌도 들더라고요. 생각해보면 나의 서툰 성장기를 구경하는 사람 몇 십 명 덕분에 지속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9개월 즈음, 자고 일어나니까 제 만화를 1.2만 명이 공유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일이지? 생전 처음 본 사람들이 제가 그린 만화에 대해 어쩌구 저쩌구 엄청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공유의 물결이 일었고 친구들이 농담으로 웹툰 작가되는 거 아니야? 그랬는데 정말 다음날 레진코믹스에서 연락 와서 데뷔한 거예요. 웸툰 작가 이슬아는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블로그로 인하여 탄생한 거지요. 페이스북 개발자 마크 주커버그와 인스타그램 사장님에게 감사해요(웃음).
Q 글 쓰고 만화 그리고 가르치고, 학교에 다니면서 그 일들을 한 거죠?
A 그쵸, 어떤 주간에는 일주일에 만화 세 군데 마감, 글 두 군데 마감이었는데 만화는 빨리 못 그리거든요. 작업량이 너무 많아요. 낮에는 학교 가고 오후에는 마감하고 주말에는 글쓰기 수업하러 여수 가고 일요일에는 다른 수업 하고…. 그렇게 7개월 지냈던 적이 있는데 그때 몸이 다 망가졌어요. 쓸개즙이 위로 올라왔고 살도 많이 빠지고 그러면서 보증금을 모았는데 이사하려고 늙어버린 느낌이 들었어요.
Q 보증금 모아서 집은 원하는 대로 잘 구했나요?
A 반전세예요. 보증금에 월세 45만 원. 이 동네에서는 싼 편인데 보통 6,70만 원 하거든요, 투룸이. 지금도 전세 얻으려고 열심히 일하는 거 같아요. 일하면서 몸이 금방 탈이 나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어요. 월세를 안 내면 몸이 아주 힘들 때 일을 좀 쉴 수 있잖아요. 월세를 내야 하는 부담 때문에 일을 쉴 수가 없는 거죠. 전세금 모으려다 몸이 다 나간 거 같아요. 매일 달리기를 해요. 힘이 남아돌아서 하는 게 아니고 너무 걱정되어서 하는 거거든요. 체력 유지하려고. 요즘은 약간 공황장애 같은 것도 있는데 음, 너무 많은 사람들이랑 인터넷으로 연결되고 피드백도 많이 듣고 그런 게 작용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친구들이 독자와 연결되는 징검다리를 하나 두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하기도 해요. 독자들에게 답변할 게 많으니까. 글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문의 이런 거는 중간 역할을 할 관리자를 둘까 생각했는데 누가 나만큼 열심히 할까 그리고 친절함을 잃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서 망설여져요(웃음).
Q 일간 이슬아 연재에 대한 피드백이 많이 오나요?
A 네. 메일 뿐 아니라 인스타그램, 블로그, 페북으로 메세지가 많이 와요. 이런 케이스도 있어요. 메일을 사용하지 않는 50대 엄마한테 제 글을 카톡으로 캡쳐해서 보내다가, 저한테 미안해서 만원을 더 보내준 거예요. 근데 엄마에게 좋은 포맷으로 변환하는 일은 그 사람이 하는 거니까 제가 5000원만 보내라고 했어요. 반값만. 그래서 첫 달부터 만오천 원씩 보내는 사람이 있고. 어느 시골 마을 분교에서 받아보는 구독자가 있어요, 반 학생이 두 명이래요. 국어 선생님인데 가끔 제가 보낸 글을 수업시간에 읽는대요. 진짜 짱이다 생각이 들죠. 해외구독자도 좀 있고. 외로운데 한국어책을 못 가져가니까 유학 생활을 일간 이슬아 글과 함께 하는 경우도 있고. 이런 건 뷰티풀 스토리고 사실 겪어내야 할 힘겨운 일들도 많아요.
Q 글쓰기 수업도 꽤 오랫동안 해오고 있지요? 10대, 20대와도 하고 중년도 하고, 중년 글쓰기 모임은 어떻게 하게 되었지요?
A 어떤 중년 여자 분께서 전화를 걸어 말씀하시길, 몸이 녹슬었다는 걸 확인하지 않으면서도 호르몬의 변화로 인한 우울감과 무력감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하다가 글쓰기를 생각해내셨대요.
어린이 글쓰기 수업을 할 때 제 수업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수업방식대로 글쓰기 모임을 열어달라고 문의가 와서 시작하게 됐어요. 네 명이서 시작했기 때문에 저희 집에서 하자고 제안했어요. 처음엔 너무 떨렸어요. 나보다 인생을 더 산 사람 앞에서 내가 무슨 이야길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첫 모임에서는 정말 좋은 차와 맛있는 음식을 듬뿍 준비했어요. 그리고 그냥 열심히 이야기를 들었어요. 1년 반 정도 했는데 그 와중에 한 분은 취직하시고, 한 분은 결혼하시고, 한 분은 애 낳으시고, 한 분은 이혼하시고, 한 분은 동거를 시작하셨어요. 인생의 중요한 일들을 이 글쓰기 모임하면서 거의 다 목격한 것 같아요. 우연히 창비 출판사 측에서 저희 모임을 알고 초대했어요. 어쩌다 낭독회를 열게 된 거죠. 한 번도 무대에 서 본 적이 없는 선생님들이 홀에서 낭독하는데 관객이 6, 70명이 온 거예요. 선생님들이 평소보다 밝은색 옷을 입고 온 점이 너무 웃겼어요. 화장도 하고. 어떤 선생님은 극도의 무대 울렁증이 있어서 에이포 용지 출력을 해온 거예요. 그 뒤에 자기 그림을 그려서 자기 얼굴 보지 말고 그림을 봐달라고. 원고 여러 장 뒤에 새로운 그림 바뀌는 거 보면서 읽었던 생각 나요. 재밌었어요. 지금도 하고 있어요.
Q 글쓰기는 굉장히 오래 훈련했지요?
A 중학교 때 글쓰기 선생님부터 이야기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분은 지금도 만나면 혼내요. 일간 이슬아, 생계에 대한 책임감은 갸륵하지만 아직 너무 아쉽다, 중요한 것에 하나도 닿지 못하고 있다, 계속 과녁을 겨누고는 있지만 맞추지 못하는 활쏘기 같다고. 너무 속상해요. 동창들 앞에서 그런 얘기를 해요. 칭찬 왜 하나도 안 해주는 거야 생각이 들지만 지나고 나면 맞는 말이라서 더 짜증 나고(웃음). 그다음은 어딘글방을 7년 다녔죠. 어딘은 글 쓰지 마라, 우아한 독자로 남아라, 같은 말만 하고(웃음).
Q 원하든 원하지 않든 중학교 때는 글쓰기 훈련을 받았고 어딘글방에서는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함께 글을 객관화하는 과정을 했고, 페이퍼 등 매체에 가서는 현장을 경험한 거네요. 내 글을 편집자가 어떻게 보는가, 이런 경험을 한 거죠. 부단히 글쓰기 수련을 해온 건 사실이네요.
A 신문방송학과에서 스트레이트 기사를 쓰기도 하고 소설창작 수업도 다니고 있어요. 고전을 면치 못하지만(웃음).
Q 앞으로 써보고 싶은 글은?
A 지금까지 엄마 이야기 주로 썼으니까 이제 아빠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아빠의 직업을 그냥 순서대로만 얘기해도 어떤 이야기가 될 거 같아요. 아빠는 블루칼라잖아요. 원래 글을 전공했었는데 글과 상관없는 걸 하는 거고. 대학 안 나온 남자가 전전하는 직종을 다 해본 중년 남자의 이야기. 아빠는 몸이 유능한데 제일 중요한 장점이 안 다친다는 거예요. 그 몸이 어떻게 움직이면서 노동 현장에 있었는지 쓰고 싶은 마음이 일단 있고. 지금 그 정도 생각나요. 사실은 당분간 안 쓰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커요(웃음).
[잘 사는 청년]
I am because you are
-이슬아를 만나다
인터뷰어. 어딘
인터뷰이. 이슬아
글. 어딘
발행일. 2018.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