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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딘의 우연한 연결 Aug 11. 2022

[잘사는청년] 대이야기의 시대를 열며

-양다솔을 만나다

집으로 오라고 했다. 인터뷰이가 자신의 집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하는 건 흔한 일은 아니다. 더구나 20대 청년의 경우라면 공간이 좁기도 하고 살림도 옹색한 편이라 친한 친구들을 불러 놀 수는 있지만 사진작가까지 대동한 인터뷰라면 부담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행복이 가득한 집’ 이나 ‘살림의 여왕’ 컨셉도 아니고 유명 건축가가 지은 집에 사는 것도 아니어서 굳이 집에서 할 필요는 없었지만 다솔은 집으로 오세요, 저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했다. 망원동이예요.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복닥복닥 살아가는 동네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힙’해져 버린 곳. 홍대 지하철역에서 내려 걸었다. 조그만 꽃집을 지나 작은 옷가게를 지나 손바닥만한 밥집을 지나고도 한참을 더 걸어 ‘힙’한 구석이라곤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동네 구석에 자리한 낡고 평범한 빌라에 도착했다. 잠자리날개 같은 옷을 입은 다솔이 조금은 지치고 조금은 환한 표정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앉음뱅이 다탁과 행운목 야자나무 뱅갈고무나무가 방의 절반을 차지하는 있는 ‘다실’, 책상과 책장과 기다란 소파와 옷들이 있는 서재 겸 옷방, 매트리스와 화분이 놓여져 있는 침실, 다양한 향신료로 가득한 부엌,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아놓은 화장실, 써놓고 보니 어쩐지 넓고 호사스런 집 같아 므흣하지만 기실은 10여평 남짓한, 살뜰하게 가꾸지 않으면 누추할 수 있는 해묵은 집이다. 쓸고 닦고 가꾸어 정갈한 다실로 봄날의 빛이 환하게 들었다. 다솔이 차를 내렸다. 물론! 보이차, 였다. 아무튼 시리즈라는 걸 펴내는 출판사가 있는데 제가 쓴다면 아무튼 보이차, 를 쓸 거예요. 그녀를 아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녀와 인연이 있는 지인들이라면 누구라도 다솔이 내린 차를 마셨을 터이니. 비싼 차예요, 웃지도 않고 다솔이 말했다.

 

다솔을 인터뷰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이길보라 감독의 ‘기억의 전쟁’을 보고 난 후의 뒷풀이 자리에서였다. 시끌벅적한 속에 ‘동북아시아구술문화연구원’ ‘스탠드업 코미디’ 같은 말이 들렸다. 귀를 가까이 대보니 다솔 팀이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을 했는데 엄청 재밌었고 소문을 들은 공중파 방송사에서도 찾아와 섭외를 했다는 이야기였다.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팀 이름을 동북아시아구술문화연구원, 이라 지었다는 대목에서 나는 어쩐지 통쾌해서 바로 그거야,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며 웃었다. 시중時中, 때가 왔다. 그녀를 만나 이야기를 들을 때가. 



양다솔  제가 아는 분 중에 뭔가 관심 있는 게 생기면 무조건 모임을 만드는 분이 있어요. 일본어에 관심이 생기면 ‘일본어 배울 사람~’ 이렇게 하여 수업 만드는. 그 분이 어느 날 스탠드업 코미디 모임을 만들고 싶다 재밌겠다고 생각한 사람들 모여라, 이렇게 인스타그램에 올렸어요. 이슬아가 그걸 저에게 전달했어요, 꼭 가보라며. 제가 이슬아 말을 놀랄 정도로 잘 듣거든요. 알겠다고 하고 갔죠.



“양다솔의 이야기를 듣다가 종종 눈물을 닦곤 했다. 너무 웃겨서, 웃느라 배가 아파서. 여럿이 모이는 날이면 나를 포함한 친구들은 모두 자연스레 양다솔의 청중이 되었다. 이야기의 지분을 양다솔이 많이 가져가는 것에 딱히 불만도 없었다. 같은 일을 겪고나서도 양다솔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야, 네가 얘기 해” 왜냐하면 나보다 더 웃기게 더 신나게 더 미친 것 같이 얘기할 테니까. 그 과정에서 양다솔은 습관적으로 사건을 과장하고 인물을 왜곡했는데 양다솔의 그 편집 자체가 지인짜 웃겼기 때문에 친구들은 인상을 쓰면서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그저 듣고 괴성을 지르고 웃고 눈물을 훔치고 복통을 호소하며 기진맥진해질 뿐. 여섯 명이 모이는 작은 글방 정도는 그가 이야기로 휘어잡고도 남을 사이즈였다. 친구들은 진작부터 스탠드업 코미디를 해보라고 했다. 양다솔은 담대한 인간이니까. 게다가 십분 넘게 혼자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도 있으니까.”  
-이슬아, 『일간이슬아』저자



양다솔  스탠드업 코미디 모임이라고 해서 저는 그 날 공연을 하는 줄 알고 준비를 해갔죠. 제가 인생에서 해봤던 유일한 모임이 글방인데, 글방은 글을 가져가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곳이잖아요. 그런데 모여서 각자 좋아하는 스탠드업을 공유하고 공연 영상 조금 보고 우와 재밌다 하더니 우리 그러면 다음에 만나면 대본을 한번 써볼까요, 이러곤 헤어지려고 하더라구요.  발표 안 하냐, 스탠드업 코미디 하자고 모였으면 뭐라도 해 봐야 하는 거 아니냐, 나가서 3분씩이라도 얘기하자, 그랬더니 다들 완전히 카오스가 되어가지고 집에 가겠다 화장실에 가겠다 난리가 난 거예요. 스탠드업 코미디 라는 게 공연 안 하면  무슨 의미가 있냐, 무대공포증 있는 사람들이 뭘 할 수 있냐, 사실 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모르는 사람들이었거든요, 팔짱 끼고 한 마디도 안 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당황한 거죠. 진짜가 나타났다, 뭐 그런 분위기였어요. 저는 준비한 게 있으니 나가서 했죠. 보아라 이게 바로 스탠드업 코미디다, 이렇게 해버린 거예요.  그렇게해서 한 명 두 명 나가서 발표를 하게 된 거죠. 놀라운 건 갑자기 한 것 치고는 다들 너무 재밌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내용도 완전히 다 다르고. 이거 좀 해볼만 하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앞으로 2주에 한번 모이고 공연하자, 2주 동안 무슨 이야기 할까 생각해서 만날 때마다 무대를 하자, 친목 도모 이런 거 할 거면 나는 안하겠다, 무슨 배짱이었을까요.



ⓒ곽소진
























이야기 하나, 스탠드업 코미디



ⓒ양다솔




















양다솔  일단 재밌는 건 우리 팀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출신 성분도 다르고 걸어온 길도 다르고 놀랍도록 고지식한 사람도 있고 명문대 나와 잘 나가는 사람도 있고 진짜 가방끈 긴 사람도 있고. 저는 대기업에 다니는 젊은이를 처음 봤어요. 그런데 그 젊은이가 생각도 있는 거야 심지어. 놀랍다, 대기업 다니면 어쩐지 무시해도 될 거 같았는데, 아닌 거죠. 이 사람들하고 친목으로 만났으면 쓸데없는 얘기 하면서 시간 보냈을텐데 뭐라도 해보려고 만나니까, 진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얘기를 하게 되는 거예요. 무대라는 곳이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고 내가 설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고, 공연이라는 것이 알고보면 누군가의 사간을 뺏어가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얘기를 감히 할 수가 없는, 그런 거죠, 아무리 작은 무대여도. 우리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전문적으로 했던 사람들이 아니니까 일단 가장 훌륭한 청자가 되어주자, 가장 민감한 반응을 해주는 사람이 되자, 그렇게 시작했어요. 서로의 이야기를 끝까지 집중해서 들어주고 피드백 해주고 그런 것들을 했는데 중요한 얘기들을 계속 듣다 보니까, 이 사람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 놓여버린 거예요.



이야기의 본령을 아는 사람, 이다. 사람은 이야기가 쌓여 이루어진 가설이다. 사랑한다는 건 그러므로 그 안에 쌓인 이야기의 결을 감촉한다는 뜻이다. 온도와 질감을 감지하고 측정하고 부비고 만지다보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존재의 본질과 맞닥뜨리게 된다. 여기 이 사람이 오늘 내 앞에 오기까지 몇 만 번의 기적을 거쳐야만 했는지를. 질투는 그 안에 쌓인 이야기가 너무 아름다울 때 피어나는 꽃이고 행복은 그 안에 쌓인 이야기 속으로 진입할 수 있을 때 피어나는 무지개다. 우울은 그 이야기에 접근 금지 당하거나 차단 당했을 때 번지는 안개다. 이야기를 알면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사피엔스에게 주어진 축복이자 딜레마. 그러므로 혁명은 이야기와 함께 온다. 피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이야기다. 천지를 뒤엎는 것은 이야기 먼지로 시작된다.  

 



양다솔  마음에 오래 남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은 뭐랄까 약간 트로트 같은 사람들이예요. 진짜 슬픈 얘기를 너무 재밌게 하는. 엄청 슬픈 가사인데 엄청 신나게 부르잖아요 트로트라는 게. 그러니까 웃기고. 진짜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경험이나 진짜 창피한 얘기 그런 이야길 해요, 모이면. 시답잖게 행복한 얘기 시시하게 웃기는 얘기 다 꺼지라고 해, 이러면서. 그렇게 하다보니 진짜로 고민을 하게 되고, 내가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단순히 이런 경험 했어, 를 넘어서는. 해나 게즈비라는 레즈비언 스탠드업이 있는데 몸집도 크고 남자같이 생긴 분이예요. 레즈비언으로서 자기가 겪었던 삶을 깔깔 웃으면서 풀어내는데, 그 안에 담겨있는 엄청난 고통과 수난과 이런 것들은 다 생략하고, 거의 1시간 동안을 막 정신없이 웃기다가 마지막에는 그대로 울게 만드는, 그런 건 인생에서 딱 한 번만 할 수 있는 이야기, 인 거죠. 그 사람이 보여준 거예요, 어떤 얘기를 어떻게 해야 되나. 첫 번째 공연 준비를 하면서도 계속 우리에게 물었어요. 무슨 얘기를 하고 싶냐, 왜 하고 싶냐.

 


“그 해 연말 양다솔의 공연이 열렸다. 한 번도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을 해본 적 없는 초짜들의 무대였고 웬 오래된 가정집 거실에서 진행됐다. 근데 그 가정집에 100명 넘게 관객이 모였다. 몇 명은 신발장 공간에 서고 몇 명은 아예 입장을 못 했다. 관객수 때문에 무대가 갈수록 좁아졌다. 그 무대에서 양다솔은 다섯 번째 주자이자 사회자였는데, 사회자로 등장했을 때부터 그냥 제자리를 찾은 사람 같았다. 비싸 보이는 투피스 같은 걸 입고 화장을 진하게 했는데 그 옷차림이 양다솔의 미친 것 같은 언변과 매우 대조적으로 보였다. 벼락부자 사모님처럼 보이기도 했고 부동산 사기꾼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튼 등장하자마자 좌중을 살짝 무시하며 그리고 본인 자신과 동료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진행을 했는데 무척 편안해 보였다. 무엇보다 발성이 충분했다. 평소 양다솔이 출연하는 팟캐스트를 들으면 웃기긴 한데 약간 부담스럽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그건 그녀가 무대용 목청과 울림통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었던 거다. 게다가 눈도 크고 입도 크고 팔다리도 기니까 너무 잘 보이고 잘 들렸다.”  -이슬아, 『일간이슬아』저자

 

 

양다솔  저 인천 토박이거든요. 거기 가난한 동네에서 살면서 제가 겪은 수많은 일들이 다른 사람들은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않는 일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어요. 신호등 지나가면 어떤 아저씨가 삼촌이라며 와서 껴안고 더듬었거든요. 빈민가에 있는 이상한 남자들, 실제론 너무나 끔찍한데 한편으론 너무 웃긴, 어떤 면에선 소설보다도 웃기고 영화보다도 웃긴데. 그거 스탠드업 코미디에서 얘기 안 할 거면은, 인생이 진짜 웃긴 거라는 걸 얘기 안할 거면은,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이 드는 거죠. 우리 팀 첫 공연에선 진짜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어요.

 

어떤 사람은 할머니랑 너무 끈끈한 사이예요. 그 할머니가 1930년대부터 사셨던 분이란 말이죠. 어느 날 빨갱이분한테 완전히 반해가지고, 네 너무 잘생기고 똑똑한 빨갱이분한테 빠진 거죠, 결혼했다가 그분이 다른 살림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이혼을 하게 되요. 이 할머니가 엄청 부잣집에 진짜 귀한 딸이었는데 신세 망친 다음에, 네 신세 망친 다음에, 아들 하나를 낳은 거예요, 자기 혼자, 그것도 빨갱이분 아들. 놀라운 건 전혀 좌절하거나 그러지 않고 그 세상 물정 모르던 분이 그 날로 동사무소에 가서 아들 성을 자기 성으로 바꿔버려요. 돈을 쥐여 주고. 그래서 자신도 임씨고 아들도 임씨고 지금 얘기를 하고 있는 손녀도 임씨가 된 거죠. 손녀는 그 전까지 성씨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었대요. 김씨든 박씨든 살아가는데 무슨 상관이예요. 그런데 어느날 할머니가 울면서, 내가 너를 이렇게 근본없는 자식으로 키워서 미안하다 이제 나를 안 봐도 좋다, 하면서 고백을 하시더라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듣고 손녀는 자기 성이 너무 사랑스러워졌다는 거죠. 우리 할머니야말로 진정한 페미니스트구나, 그래서 자신의 삶도 너무 사랑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지금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만약 애를 낳게 된다면 걔는 무조건 임씨다,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재용이란 친구는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결혼하자고 이야길 못하겠다, 왜냐하면 결혼이라는 것이 100%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이 여자에게 완벽히 불리한 계약을 맺자고 하는 거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면 이래도 얘한테 피해가 가고 저래도 얘한테 피해가 가고. 무조건 다 나한테만 이득이 가도록 만들어져 있는 시스템이다, 그래서 나는 도저히 얘한테 결혼하자고를 못하겠다, 이런 얘기를 한다던가.

 

서새롬양은 보이스피싱 당한 얘기를 정말 흥미진진하게 했어요. 새롬에게 이 사건은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었거든요. 사실 이런 일은 본인 스스로도 다시 생각해보려고 하지 않아요, 너무 끔찍했기 때문에. 친구들도 감히 물어보지를 못하잖아요 아무리 궁금해도. 근데 이거를 하나부터 열까지 분 단위 초 단위로 얘기를 한 거예요. 저는 이게 엄청난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본인에게도 듣는 사람들에게도. 처음 새롬한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말했거든요. 이 얘기를 사람들 앞에서 했으면 좋겠다고. 끔찍한 경험일수록 계속 말하면서 자기 안의 트라우마를 날려버리자고.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 함으로써 새롬에게 그게 지나간 사건이 되기를 바라기도 했고, 사람들에게도 간접 경험이 되기를 바랐던 면도 있었죠. 얼마나 웃긴 얘기예요. 새롬이 얼마나 똑똑하고 영민한 사람인데 그렇게 속을 수 있다는 게. 새롬이 보이스피싱을 당했대, 한 문장으로 들었을 때는 바보 아냐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구구절절 풀어서 들으면 나도 그 상태에서 새롬과 똑같이 했겠구나 알 수 있거든요. 그 얘기를 처음 들으면서 저는 이 특권,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을 나누고 싶었어요.



나도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에 의해 온 가족을 다 잃은 탄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앞으로 열 번만 더 이 이야기를 한국 사람들에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랬는데 진짜 열 번도 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다. 지금 탄 아주머니의 얼굴은 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얼굴이 아니다. 개인의 이야기가 공적 서사의 장에서 인정받고 지지받았을 때 상처투성이 사람도 존엄성을 회복한다. 이야기의 장은 그래서 중요하다. 다솔은 이야기의 힘을 알고 믿고 그 이야기에 사람들을 태우고 달려간다. 날으는 양탄자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 사람은 개미만 하고 인간의 문명은 거대한 자연 속에 귀여운 장난감 같다. 멀리서 보면 속절없이 애틋한 것이 인간이라는 걸, 원근과 시간차가 보여주는 희비곡의 변주곡이 인생이라는 걸, 알아버린 것이다 이 대담大談할 줄 아는 이야기꾼은.


 


양다솔  저는 인천 얘기를 했어요. 인천과 제가 만난 많은 할아버지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면 할아버지들을 어떻게 대처하는 사람이었는지 대한 이야기랄 수 있죠. 저는 할아버지들을 때리거든요. 예를 들면 엄마랑 같이 1호선 지하철을 타고 있는데 누가 엉덩이를 툭 치고 지나가는 거예요. 웬 할아버지였는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평이하게 걸어가는 거죠, 지나가다가 우연히 부딪친 것처럼. 일부러 친 게 아닐 수도 있겠다 생각을 했는데 1~2초 후엔 정확히 알겠는 거죠. 고의적으로 친 거다. 그래서 저도 가서 엉덩이를 팍 때렸거든요. 그 양반이 고의적으로 한 게 아니라면 왜 이래? 하면서 놀라야 되잖아요. 근데 안 놀라고 그냥 움찔 하고 가버리는 거예요. 역시 일부러 그런 거구나. 그런 것부터 시작해서 만원 출근길에 어떤 할아버지가 또 엉덩이를 더듬는 거죠. 너무 화가 나는데 멀리 피해 가는 거예요. 진짜 너무너무 화가 나서 죽일 것처럼 쳐다보면서 너 죽여버릴 거라고, 진짜로 죽여버릴 거라고 눈으로 말했죠. 나중에는 손으로 목을 가르는 시늉도 했어요. 진짜로 죽여버릴 거라고. 그랬더니 그 할아버지가 어이쿠 이러면서 눈을 떨구고. 만약 그때 제 모습을 제가 거울로 봤으면 오줌을 지릴 수도 있을 얼굴이었을 걸요. 또 한 번은 더듬는 아저씨 내릴 때 저도 내렸어요. 뒤에 딱 붙어서 너 죽여버릴 거라고 계속 말했죠. 그랬더니 그 아저씨가 에이 씨 뭐야, 그러는 거예요. 뭐 이 새끼야, 이러면서 주먹으로 막 때렸죠. 이상한 할아버지가 시비 걸면 쌍욕부터 나가고 손부터 나가고 거의 3초만에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된 건 인천에서 어릴 때부터 훈련해서 그런 거예요. 중학교 때도 환승통로 지나는데 어떤 아저씨가 팔뚝을 막 만지고 가는 거예요. 너무 화가 나서 쫒아가서 뒤통수 퍽 때리고 도망갔죠. 그런 것들이 계속계속 쌓이면서 할아버지 아저씨 관련해서는 그 자리에서 바로 이성을 잃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된 거죠. 화라는 걸 도통 내지 않는 사람인데 그럴 수 있는 인간류가 되었다는 게 너무 웃기잖아요. 이부망천, 공연 당시 이 말이 유행이었거든요. 이혼하면 부천 망하면 인천, 제가 인천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인생 망했는데 부천에서 엄마 아빠 이혼하고 서울로 왔는데 회사가 파주라 파주만 다닌다, 뭐 그런 이야기부터 1호선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고나니까 정말 이 모든 얘기가 지금 이 시대여야만 할 수 있는 얘기고 이 시대에 나와야 되는 얘기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마치 한 장의 앨범처럼 어떤 주제로 딱 엮이는 거죠. 그래서 그 때 왔던 분들이 너무 재밌다고 했었던 거 같아요. 저는 사실 재밌다고 생각을 못하고 첫 공연이 끝 공연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고 관객들도 다시 했으면 좋겠다고 그러니까 아 어쩔 수 없군 다시 해야겠군 하고 있는데 코로나 시국이어서 그냥 이러고 있어요.

 


인류가 겪은 최악의 전염병 중의 하나가 페스트일 것이다. 중세 유럽 인구의 1/3이 죽었다니 그 참혹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한가운데서 태어난 것이 『데카메론이다. 이탈리아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의 작품으로, 일곱 명의 여자와 세 명의 남자가 전염병을 피해 교외 별장에 모여 매일 한 가지씩 열흘 동안 이야기를 하며 보낸다는 것이 책의 줄거리다. 실제 이탈리아에서 페스트가 맹위를 떨치던 1350년 즈음에 쓰여진 책인데 놀랍게도 딱 스탠드업 코미디다. 매일 돌아가며 한 명의 사회자를 정하고 그의 지휘 아래 차례로 나온 숙녀 신사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라는 것이 당대의 현실, 날 것 그대로의 세상을 온전히 재현하고 있다. 중세에 페스트라니 뭔가 암울하고 비장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룰 것 같지만 데카메론에는 삐딱하고 음험하고 구리고 야비하고 포복절도하게 웃기고 안타깝고 한심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야기를 읽다보면 ‘당신이 알고싶은 모든 것, 그러나 차마 묻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다 노출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중세 유럽의 금기 욕망 아이러니, 그러니까 섹스 돈 불륜 배신 부패 부정 패륜 위선 같은 것들이 고스란히 실체를 드러낸다. 주장이나 슬로건이 아님에도 이야기를 읽다보면 버리고 태우고 무너뜨려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낡고 부조리하고 부정의한 것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인다. 지키고 보호하고 새롭게 만들어가야 하는 것, 이 무엇인지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펜데믹의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장르는 어쩌면 스탠드업 코미디 일지도 모르겠다. 뉴 노멀, 새로운 질서는 오래된 것들이 무너진 자리에서 만들어질 것인데 붕괴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데 웃기는 이야기만큼 서늘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감히, 차마 웃을 생각을 못하던 대상을 우스꽝스럽게 만들 때 거기서 오는 짜릿하고 상큼한 전복의 힘이 있는 것 같고 그 힘은 그동안 믿어왔던 것들을 흔드는 물결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양다솔에게 스탠드업 코미디를 최초로 권한 이다울의 말이다.







이야기 둘, 출가



ⓒ양다솔
















양다솔  저는 아빠랑 사이가 되게 가까웠어요. 중학교 1학년 다니다 그만 두고 노리단이라는 대안공간도 다니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에서 영화나 보고 있으니까 어느날, 너 어디 좀 갔다와라 4박 5일 정도, 이러는 거예요. 어딘지도 안 알려주고. 저도 물어보고 싶지도 않은 거예요. 어차피 안 알려 줄 테니까. 아빠가 장난기가 많은 분이시거든요, 저처럼. 그래 알았어, 하고 짐 싸서 갔는데, 문경에서 하는 ‘깨달음의 장’인 거죠. 깨달음의 장은 깨장이라고도 많이 불리는데 정토회라는 불교단체에서 하는 뭐랄까 마음단련 혹은 마음수련 같은 프로그램이예요. 나중에 알게 된 건데 그게 스무 살 이후부터 신청 가능한 과정이었어요. 근데 저희 아빠는 내 딸은 어른이다, 인생 겪을 만큼 겪었고, 이런 생각을 하셨는지 주민번호를 바꿔가지고 신청을 하신 거예요. 공인인증을 할 것도 아니고 게다가 누가 자기 딸 나이를 속여 그렇게 하겠어요. 제 이름 옆에 20 이라고 써 있길래 저는 저대로 그 숫자가 뭔가 순서나 차례 같은 건 줄 알았어요. 일주일 정도 어~어~ 재밌다~ 이러면서 깨장을 마쳤어요. 뭐 심각하게 임하지도 않고. 그게 나이가 많을 때 가야 좋거든요. 왜냐면 자기가 생각하는 어떤 틀을 깨버리는 과정인데 저는 뭐 깰 틀도 없고 해서 그냥 약간 설거지하듯이 쉽게 쉽게 해버렸어요.

 

깨달음의 장 끝나는 날, 언제 이런 데서 한 번 살아보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죠. 문경이 진짜 아름답거든요. 밥은 또 얼마나 정갈하고 맛있든지. 아침에 일어나면 탁 트인 공간에 해가 떠오르고 공기는 청량하기 이를 데 없고, 이런 데 한 번 살아보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지도법사님이 너 할 일 없니? 그럼 여기 와서 살아라, 이러시는 거예요. 그때까지도 제가 스무 살인 줄 알고. 그렇게 해서 백일출가 지원을 했는데 마침내 제 나이가 밝혀진 거죠. 100일 출가는 100일 동안 함께 살아야 되기 때문에 면접을 보거든요. 이 사람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공동수행 공동생활을 견뎌낼 수 있는지를 보고 결정하거든요. 한 번도 스무 살 이하의 사람이 신청을 한 적이 없는데 열 여섯 된 애가 오니까 법사님들도 당황하신 거죠. 근데 깨장도 했어. 얘기 하는 걸 들어보니까 열 여섯 살도 아니야. 너무 늙었어, 영혼이. 그때 제가 지금보다 말을 더 잘했거든요. 허언도 막 하고 생각만 많아가지고. 얘기만 들어봤을 땐 대단해보였던 거죠. 허어 어떻게 이런 애가 있을 수 있냐, 해가지고 정토회에서도 허락을 했는데 들어가자마자 사람들한테 욕먹고 난리가 난 거죠.

 

처음에는 다들 예쁘다 하시다가 저의 본모습을 보신 거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하고. 배려와 협동도 모르고 항상 하고 싶은 얘기 제일 먼저 하고. 나중엔 동네북이었어요. 너는 왜 그렇게 행동하니, 그런 식으로 하면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다, 맨날 욕먹었죠. 저도 제가 충격이었어요. 학교에서 먹던 욕을 여기까지 와서 그렇게까지나 먹을 줄 몰랐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될 지를 몰라서 더 괴로운 거예요. 어떻게 어떻게 100일을 보냈어요. 사실 100일 끝나고 나면 나갈지 말지를 본인이 결정하는데, 같이 생활했던 도반들이 너는 나가면 안 된다 너는 여기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저는 무전여행 하러 나가야 되는데. 10대 시절 내내 무전여행을 하고 싶었거든요. 전 세계에 민폐를 끼치고 다닐 셈이냐 남을 배려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아이고 어찌나 말씀들을 하시던지, 알았다 여기 있겠다, 그렇게 해서 절에 더 살게 되었어요. 진짜 웃긴 건 아무리 힘들어도 집에 가겠다는 얘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거예요. 그런 생각 자체를 한 적도 없고. 여기가 내게 주어진 곳이다, 라고 생각을 하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한 거죠.  

스님들도 맨날 혼냈죠. 보통 사람들이라면 한번만 들어도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복귀 못할 정도의 말을 맨날 사람들 앞에서 들어야 했어요. 그런데 그 얘기 들으면서도 집에 가야겠다 생각을 안했던 거예요. 그거 하나는 칭찬받았어요. 왜냐면 거기는 어른들도 쪽팔리고 자존심 상해서 밤에 도망가고 말도 없이 사라지고 그런 경우도 많았거든요. 수행공동체 생활이 녹록치 않거든요. 나를 내려놓는다는 게 말만큼 쉽지 않아요. 어쨌거나 어떤 말을 들어도 군말 없이 있었어요. 그렇다고 훌륭하게 생활했다거나 그런 거는 아닌데 그냥 딱 하나, 매일매일 절하는 거는 정말 꾸준히 했어요. 개인정진이라고 해서 하루에 300배에서 500배씩 하라고 했거든요. 시간을 따로 주지도 않고 검사하는 사람도 없는데, 다른 건 다 못해도 내가 이거는 한다 해서 2년 동안 하루도 안 빼고 했거든요. 일정이 새벽 2시에 끝나도 절 하고 잠깐 눈 붙였다 새벽 4시 5시에 일어나고. 이거 안하면 나 집에 간다는 마음으로 했거든요. 내가 여기에 있으면서 욕이란 욕은 다 먹지만 이것까지 안하면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런 생각으로  무조건 했어요.  

 

사실 백일 출가 시작할 때 만 배 하거든요. 만 배 할 때 사람들이 다 죽으려고 하잖아요 힘들어서. 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만 배 하는 사람 진짜 많이 봤는데 하다가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꾀병 부리지 마라 이러시거든요. 사실 그냥 몸이 싫다고 하는 거지 몸에 해롭거나 그렇진 않아요. 만 배는 3일 정도 밥만 먹고 절만 해야 할 수 있는데 이틀 정도 하고 나면 진짜 좀비처럼 걸어다니게 돼요. 다 끝나고 나니 스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지금 만 배 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생각이 들었을 거다, 그 자세가 자신이 삶을 사는 자세다. 근데 제가 만 배를 하는 자세가 어땠냐면은 내가 나를 못 믿었거든요. 내가 지금 하나를 꽁으로 센 거 아닐까? 만 배 하면서 한 배 할 때마다 적거든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속이고 하나를 더 쓴 게 아닐까. 나를 못 믿어서 하나를 더 쓴 것 같으면 절을 다시 했어요. 끝나고 나서도 내가 다 한 거 맞아? 아닌 것 같은데, 나 속인 것 같은데. 계속 찝찝한 느낌. 그게 내가 삶을 사는 방식이라니. 나를 계속 못 믿는 거잖아요. 어쨌든 그렇게 만 배 하고 그 후 2년 동안도 매일 삼백 배에서 오백 배를 했어요. 하루도 안 거르고. 아무도 모르겠지만 저는 제가 했다는 걸 알고 있잖아요. 그거면 됐다,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고. 그 후로도 내가 진짜 마음 먹으면 뭐든지 간에 해볼 수 있겠다, 나의 몸에 대한 신뢰가 생기기도 했죠.

 

나올 때도 제가 나가겠다고 한 게 아니라 스님이 대학교 가라고 나가라고 하셨어요. 앞으로 네가 사회에서 뭔가를 하고 싶을 때 이렇게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사람은 알아봤자 그때 되면 다 늙고 죽어버리니까 너의 동지가 없다, 근데 대학교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면 나이가 다 섞이니까 친구를 만들 수 있는 환경과 기회가 없다, 그러니까 네가 마지막으로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기회다, 공부 할 필요 없고 그냥 가서 애들하고 얘기하고 친구 되고 공감하고, 그래서 네가 나중에 뭘 할 때 같이 할 수 있는 애들을 만나라, 그런 얘기를 하셨거든요. 사실 절에서 먼저 나가라고 한 게 제가 처음이거든요. 누가 나가겠다고 하면 불러서 말리는 편이지 나가라고 한 적은 없어요. 그래서 저 쫒아내는 거냐고 물어보니까, 네가 앞으로 잘 살면 우리가 보내준 거고 네가 못 살면 쫒아낸 거다, 그러시는 거죠. 나가겠다는 얘기 한번도 안했는데, 나가라고 해서 나온 거예요. 열아홉 살 여름 무렵이었어요. 열 일곱에 들어가서.

 


바리데기의 길을 가고 있구나. 부모를 살리려는 일념으로 팔만 사천 지옥을 지나 무지개다리 너머 저승강 건너니 무장승이 길을 막고 길 값으로 삼 년 나무 해주고 삼 값으로 삼 년 불 때 주고 물값으로 삼 년 물 길어라 하길래 바리데기 그 시간을 견디고 생명수 있는 곳을 가르쳐달라 했더니 그동안 그대가 길어 온 물이 서천 서역국 약수요, 그대가 나무하러 가서 베어 온 풀이 개안초요, 뒷동산에 있는 나무 세 가지가 숨살이 뼈살이 살살이 삼색 도환생꽃이니 이것을 가지고 가서 부모를 살리시오, 했다더니 양다솔이 그 길을 가고 있구나, 감각을 버리고 마음을 해체하고 계를 넘나드는 훈련을 혹독하게도 마치고 이리 활짝 웃으면서 내 곁에 왔구나 우리 곁에 왔구나.







이야기 셋, 법륜키즈



ⓒ곽소진





















양다솔  대학교를 어떻게 가지? 스님이 대학을 가라고 나가라 하셨으니 대학을 가야잖아요. 저는 정시 수시 같은 것도 몰랐거든요. 제가 아는 대학이 딱 두 개 있었는데 성공회대랑 연세대였어요. 연세대는 연세우유 때문에 알고 있었고, 엄마 아빠가 대학교는 쓸모없다, 라고 했다가 만약에 혹시라도 대학에 가게 되면 성공회대에 가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왜냐면 본인들이 좋아하는 지식인들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검정고시를 봐야 하나 싶어서 일단 입시학원에 갔는데 이과 문과 어디 가고 싶냐고 물어요. 이과 문과가 뭐냐고 물어봤더니 엄청 저를 무시하고 웃는 거예요. 대충 이과는 수학 과학 어쩌고저쩌고 문과는 어쩌고저쩌고다 그러시길래 어 나 수학 좋아하는데 이러니까 그분이 웃음을 참으면서 어디까지 기억나냐고 물으시는 거죠. 그래서 원기둥이 살짝 기억난다 이랬더니 아하하하하 원기둥, 이러면서 엄청 웃더니 중학교 수학 문제집을 가져와서 풀어보라는 거예요. 풀다가 모르겠다 하니까 초등학교 문제집을 갖다주시는 거예요. 그거를 겨우 어떻게 풀고 좀 틀렸어요. 그랬더니 지금부터 여기에 5년을 꼬박 나오고 그러고 나면 지방 2년제 전문대를 넣을 수 있겠다 이러시는 거예요. 여기를 5년을, 그것도 아침 일곱 시부터 저녁 일곱 시까지, 그것도 한 달에 백만 원도 넘게 내면서. 아 그렇구나, 하고 나왔어요.

어쩌다 수시란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저희 엄마가 5 · 18민주화유공자 뭐 그런 거가 돼서 그 전형으로 넣어볼 수가 있대요. 검정고시도 겨우겨우 봐서 어쨌든 수시라는 걸 한번 해 보기로 했어요 연습 삼아서. 마침 성공회대 준비하는 친구가 있어서 너도 같이 한 번 넣어보든가 해서. 사실 그 친구가 말했을 때가 접수 일주일 전이었거든요. 자소서 쓰고 면접을 봤어요. 면접 타이밍이 좋았던 게 제가 마지막 순서여서 저 혼자 들어가서 봤어요. 보통 면접에서는 그 시기의 사회정치적 문제나 그런 거를 물어본다고 해서 나름 준비를 많이 해갔거든요. 근데 제 자소서가 너무 이색적이니까 그것만 얘기하다가 원래 면접 시간이 끝난 거예요. 다행히 내 뒤에 대기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교수님들이 여유가 좀 있으셨던 거죠. 대학에 오면 뭘 하고 싶냐고 물어보시길래 통일운동하고 싶다고 했어요. 제가 법륜키즈여서 통일에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있거든요.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어요. 이래저래 이래저래 이래저래서 통일은 무조건 되야 된다, 남북의 단절을 극복해야 새로운 상상과 비전이 열린다, 뭐 그런 말을 하니까 사회과학부 교수들이 완전 좋아하셨죠. 그래서 합격했어요. 일주일 준비해서 붙은 거예요. 내가 법륜스님 팔아가지고 대학교 갔구나, 내가 엄마랑 법륜스님 팔아서 대학교 갔구나, 학교 입구에다가 삼배 올렸어요 합격 날.

 

법륜키즈 라는 말은 이슬아가 붙여줬는데 소개할 때 법륜키즈입니다 이렇게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제 마음 어딘가에 법륜스님이 계시는 느낌, 그런 거예요. 뭔가를 생각할 때 내 근본을 더 들여다보게 되는 거, 어떤 문제에 부닥쳤을 때도 항상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그런 기본적인 것들은 법륜스님에게 배운 거 같아요. 통일문제에 관심이 많고 육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엄마가 되고 싶어 하는 것도 그 영향인 거 같구요. 저는 윤회라든가 신화적인 불교는 잘 알지도 못하고 경전도 잘 모르지만 불교가 가진 기본 철학에는 공감을 하거든요.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에게 돌아오는 거라든가,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게 세상이 된다는 거라든가. 불교는 아주 자명하고 단순한, 냉정하고 이성적인 철학이라고 생각해요. 수처작주隨處作主, 내가 있는 자리에서 주인이 된다, 그 말을 새기죠. 뭘 해야 할지는 알고 있지만 행동에 못 옮길 뿐, 살면서 뭘 해야 할지를 모르진 않았어요. 인생이라는 게 한 가지 얘기잖아요. 어떤 질문이냐에 따라서 변주될 뿐이지.

 

대학에서 공부를 하는데 너무 재밌는 거죠. 각 잡고 공부하는 거를 진짜 오랜만에 한 거예요. 사실 너무 공부를 하고 싶었거든요. 기회가 안 올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왔으니 너무 기쁜 거예요, 너무 잘하고 싶은 거예요. 다들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는데 다른 애들은 이미 지쳐서 온 거예요. 어쨌든 저는 진짜 드디어 내가 공부를 하는구나 불타올라가지고 강의 하나하나 열심히 들었죠. 그때가 신영복 선생님 돌아가시기 전이어서 교수님 수업을 1년 정도 들을 수가 있었어요. 근데 그 수업 들을 때마다, 제가 눈물을 잘 안 흘리는 사람이거든요, 맨 앞에 앉아서 계속 울면서 들었어요. 법문이에요 법문, 수업이 아니라. 무슨 말인지 너무 알겠고 너무 맞는 말이고 그니까 계속 눈물이 나는 거예요. 혼자서 으흐흐 울면서. 제가 우는 게 티가 잘 안 나서 교수님은 아마 모르셨을 거예요. 근데 옆에 애들은 다 졸고 있었거든요. 저는 너무 행복했어요. 절에서 나왔지만 내가 아직도 법문을 듣고 있구나, 이런 걸 배울 수 있다니 너무 행복하다. 그리고 저희 교수님들 전부 다 수업에 열정적이시거든요. 진도도 많이 나가고 양도 많고. 너무 잘하고 싶은 거예요. 사람 관계에서는 처음엔 긴장했어요. 10대 시절에는 친구들하고 관계가 안 좋고 왕따도 당해서 대학에서도 그럴 수 있을 거라 각오하고 들어갔어요. 근데 절에서 저를 얼마나 눌러놨는지 누가 말이라도 걸어주면 너무 기쁜 사람이 돼 있는 거예요. 친구들이 놀아주다니, 너무 감사한 거죠. 그때부터 친구들을 신줏단지 모시듯 했던 것 같아요. 나를 찾아주고 나를 챙겨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든지. 하루하루가 너무 즐겁고 공부도 너무 재밌고, 사람이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다니 하면서 살았다니까요. 그러다가 아빠 가고 가세 기울고 쓰리잡 하면서 학교 다니고. 그러면서 우울해졌죠.

 

아빠가 갔다는 건 세상을 떠났다는 게 아니라 출가를 하셨다는 거예요, 스님이 되었단 말이죠. 삭발하고 승복 입은 아빠랑 뛰어내린다고 난리 치다 발목 다쳐 휠체어 탄 엄마가 이혼 도장 찍으러 갔어요. 원래 그전까지는 엄마랑 아빠랑 저랑 삼각형 구도였거든요. 균형이 있는 도형이잖아요. 그러니까 둘이 싸우면 한 명이 막아주고 또 다른 둘이 싸우면 한 명이 막아주고 뭔가 이런 식으로 굴러가는 게 있었는데, 엄마랑 둘이 사니까 이건 도형이 아니잖아요. 직선이고 균형점이 없잖아요. 둘이 살면서 너무 안 맞는 사람이란 걸 처음으로 깨닫게 된 거예요. 슬플 때 슬픔을 보듬어주는 게 아니라 할퀴는 스타일이었던 거죠. 같이 있으니까 더 외로워지는 느낌.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심리상담 해주시는 분이 나가 살면 어떻겠냐고 하시는 거예요. 생각해보니 엄마는 화나면 저에게 계속 나가라 그랬거든요. 근데 저는 한 번도 나가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그런 생각도 한 적이 없고. 마치 절에서 그런 생각 안 한 것처럼. 저는 그냥 그 자리에서 어떻게 해보려고 했거든요. 도망치는 거는 답이 아니라고 항상 생각을 했는데 나가서 사는 것도 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딱 결심하고 집 알아보고 나왔어요. 그때부터 혼자 살기 시작하고 생활비 알아서 벌기 시작하고.

 


양다솔은 종종 엄마가 호랑이 상이라는 말을 한다. 양다솔의 엄마는 젊은 날 청계피복 노동조합의 위원장이었다. 호랑이처럼 독재정권과 맞서 싸웠다. 어쩌면 양다솔의 엄마는 동굴을 뛰쳐나온 호랑이의 후예일 지도 모르겠다. 쑥과 마늘만 먹으며 동굴 속에서 백일만 견디면 좋은 날이 올 거라는 제안을 걷어차 버리고 싱싱한 햇빛 속으로 달려나와 마음껏 산야를 누비던 그 호랑이. 성성한 숲의 냄새를 맡고 사냥을 하고 신선한 생고기를 먹으며 놀던 호랑이가 동굴에 가서 말했을지 모른다. 야, 코로나는 인간한테만 해당돼, 우리랑 전혀 상관없어, 산열매들이 얼마나 맛있게 익었게 연어가 돌아올 철이야 얼른 나오라구, 호랑이는 곰도 꼬셔서 같이 데리고 나온 거다. 이쁜 딸도 낳고 알콩달콩 살았지만 곰은 아무래도 다시 동굴로 돌아가고 싶은 거다. 쑥과 마늘만 먹으며 햇빛을 보지 않고 백날이 지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한 거다. 다솔의 가족이야기를 들으며 해본 상상이지만 새로운 신화가 쓰여져야 하는 시절인 것만은 분명하다. K방역이라는 말이 쓰일 적이면 곰과 호랑이의 자가격리가 떠오른다. 한 나라의 개국신화가 자가격리에서 시작되는 것도 재미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이야기로는 무엇이 좋을까. 호랑이와 곰과 사이보그와 AI, 유전자가위, 데이터, 우울한 아이들과 벌과 새와 전염병과 몸 없는 존재가 공존하는 신화, 는 쓰여질 수 있을까.






이야기 넷, 비건



ⓒ양다솔

























양다솔  제가 먹고 입고 공간을 꾸미는데 열정적이거든요. 의식주에 엄청 열중하는 사람인 거죠. 사실 비효율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 시간에 진로를 그렇게 고민하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저는 술을 안 마시고 담배를 안 펴요. 다들 놀라워하죠 이 말을 들으면. 줄담배 피우고 말술 먹는 줄 알았더니 집에 와보면 지리산에코페미처럼 살고 있는 거죠. 어쨌든 둘 다 아니예요. 다만 저는 제 몸에 관심이 많아요. 어디가 아픈지 어디가 안 좋은지를 면밀히 관찰하면서 사는 스타일이예요. 어디가 안 좋을 때 할 수 있는 대처방법도 많이 알고 있거든요. 내 몸에 맞는 식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모르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돈 버느라 진짜로 하기 싫은 일을 하다 보니까 몸이 싫다고 하는 거를 기존과는 다른 어나더 레벨another level로 표현을 하는 거죠.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몸의 상태가 되니까 살짝 겁도 나고 생전 안 가던 병원 같은 데를 가봤는데 그 사람들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거 같았어요. 역류성 식도염이라는 진단을 일단 받았어요. 그게 식습관이 안 좋은 사람들에게 주로 나타난대요. 예를 들면 밥 먹고 눕는다든가. 저는 밥 먹고 생전 눕지를 않거든요.

 

저는 진짜 바른생활 하는 사람인데. 밖에서 밥 사먹지도 않고 편의점도 절대 안 가고 그런데 역류성 식도염이라니. 100% 스트레스구나 생각했죠.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몸의 변화라는 생각도 들고. 기존에 내가 아는 몸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구나 자각이 오니까 단식을 해볼까 생각이 들더라구요. 엄마가 종종 하는 걸 봤거든요. 제가 먹는 걸 너무 좋아하는 사람인데 처음으로 밥을 굶어보니 아, 몸이 가벼운 게 뭔지 알겠더라구요. 단식을 하고 나서 한 두달 정도 로비건raw vegan이라고 해서 풀때기만 먹는 생활을 했는데 어라 너무 즐거운 거예요. 아, 풀때기 먹는 게 이렇게 재밌구나, 그때 로비건에 빠져가지고 전 세계 로비건 레시피 다 찾고 로비건 전문가들 하는 거 다 해 보고. 제가 원래 뭐 하나를 하면 약간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거든요. 옷에 빠졌을 때는 만 벌은 입어본 거 같아요. 화장에 몰두했을 때도 세상의 웬만한 화장품을 다 써봤구요. 어쨌거나 이번에도 집에서 온갖 걸 다 해봤거든요. 로비건 할 수 있는 거 다 해 본다는 느낌으로. 혼자 재미있게 요리하고 먹고 있었는데 어느 날 글방 친구들 모여서 밥을 먹는데 정말 우연히 거기 있는 애들이 대부분 비건을 하고 있는 거예요. 딱 비건이 됐다기보다는 다들 어떤 계기로 고기를 안 먹고 있었던 시점이었던 거죠. 그 자리에서 이슬아가 『아무튼비건을 돌리며 말하더라 구요. 자기는 비건이 되었다고. 청천벽력이었죠.  

 

밥을 먹는다는 건 관계의 핵심이잖아요. 밥을 같이 안 먹으면 뭘 할 거예요. 근데 이 친구가 비건이 됐다는 건 나랑 앞으로 밥을 못 먹는다는 얘기거든요. 이거는 빨간색을 좋아한다 노란색을 좋아한다 이런 얘기가 아니예요. 너는 노란색을 좋아하는구나 나는 빨간색을 좋아해 이렇게 공존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고. 나는 이제 고기를 안 먹기로 했어 너가 먹는 것도 못 봐, 이런 얘기인 거예요. 물론 마음을 내서 봐 줄 수야 있겠지만 쌍방간에 마음 편한 일은 아니죠. 관계라는 건 계속해서 같이 행동하는 거에 핵심이 있는 거잖아요. 아 네가 무슨 얘기 하는지 이해해, 가 아니라 진짜 이해하고 공감하면 같이 행동까지 해야 되는 거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함께 행동하지 않으면 그 관계는 과거가 되는 거잖아요. 현재진행형으로 친구이려면 공감하고 같이 할 수 있어야만 되는 거죠. 비건이 된다는 건 어떤 방식으로든 삶의 전반을 뒤집어버리겠다고 선언하는 거라고 저는 이해했어요

 

그때 저 정말 심각했어요. 물론 이슬아야 『아무튼비건을 준 거지 같이 비건이 되자 뭐 이런 말 한 마디도 안 했죠. 저도 그냥 한 마디만 했어요. 어쩔 수 없지 뭐. 그날부터 저는 비건인 거예요. 저는 어떤 면에서는 저보다 제 친구들을 더 믿거든요. 이 친구가 어느 날 뭔가를 한다고 했으면 그거는 분명히 좋은 것이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고 나도 언젠가는 그걸 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사실 비건을 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 많잖아요. 똑똑한 사람들이 이미 얘기는 해놨고 나는 그냥 하면 되는 거잖아요. 안 했을 뿐 하면 된다.  

 

다음날부터 비건을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살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거죠. 어딜 가나 소외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는 거예요. 고기가 모든 것인 세상이었다는 걸 인식하게 되었달까. 모든 음식에 고기를 넣어요 소금처럼. 고기가 들어가지 않으면 밥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고. 안 넣으려면 진짜 굉장한 의식이 필요해요. 맨날 마주쳐야 하는 친구와 절교를 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와 이게 진짜 힘든 거구나 생각을 했죠. 저는 항상 혼자 밥을 먹거든요. 혼자 사니까 혼자 먹고, 회사에도 도시락 싸가서 혼자 먹었어요. 밥값이 너무 비싸서. 그럴 때마다 사무치게 외로웠거든요. 외롭다는 것은 고립감을 느낀다는 얘기고 아무도 나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이잖아요. 근데 비건을 하면서 보니까 누군가 나를 위해 죽은 생명, 을 내가 먹는 거, 더라구요.

 

나를 위해 죽은 거잖아, 정말 나를 위해 태어나고 나를 위해 죽은 거잖아, 그런 생각이 딱 드는데 내가 절대 혼자가 아니었구나 깨달은 거예요. 아 그 많은 생명이 이 몸에 함께 있는데 내가 외롭다고 말을 했구나, 말도 안되는 소리를 했구나, 내가 참 이기적이었구나, 혼잣말을 했어요. 사실 비건을 한다고 해서 그다지 바뀌는 건 없어요. 그냥 뭔가 하나를 뺀 것  뿐이예요. 하루에 세 끼 밥 먹는 걸 그냥 다르게 먹기 시작한 거 뿐인데 내가 혼자가 아니고 지구의 어떤 생명들이 나랑 같이 살고 있구나, 라는 게 여실히 느껴지면서 비건을 선택한 게 자랑스러웠어요. 여전히 혼자 먹을 때가 대부분이지만 외로움에 지배당하는 일은 없어졌어요.

 

비건 하면서 많이 들었던 말이 먹을 게 없어서 어떡하니, 예요. 물론 선택권이 하나 없어진 건 맞지만 뭔가 훨씬 더 확장된 느낌이 들어요.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고기 없이도 가능한 레시피는 많고 많아요. 지구에 생명이 얼마나 많은데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사람의 생명만 이야기했구나, 각성을 한 거죠. 어떤 운동이든 그림자가 있게 마련인데 비건은 그림자가 없다는 느낌이예요. 님이 생명만 갖고 있으면 존중한다는 얘기거든요. 오케이, 퀴어 받고 양성평등 받고 다른 생명까지 받는 걸로. 제가 비건이라고 말했을 때 일면식도 없던 사람이 커밍아웃 한 적도 있어요. 비건이라는 말이 무장해제를 시킨 거죠. 누군가를 해치지 않을 존재, 라고 생각을 하는 거니까.

 

제가 생각하는 비건은 ‘저는 싫어하는 게 없습니다’ 라는 마음, 이라고 봐요. 사실 지금 같은 시대에 저는 싫어하는 게 없습니다, 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게 얼마나 훌륭해요. 내가 비건이라는 건 너를 생각한다는 얘기와 같거든요. 네 모양이 무엇이든 네 생명을 존중한다. 비건은 매일 자신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일상과 맞닿아 있는 전투적인 운동이죠. 저같이 의식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혼자서 하는 일이고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더 잘할 수 있죠. 마이크 잡고 무대에 오르는 일보다 잘할 수 있는 일.

 


아기새 같았다. 지지배배 지지배배 짹짹짹 짹짹짹, 틈이 날 때마다 자신이 겪은 부당함과 세상의 불공정과 부정의한 사람들에 대해 지저귀었다. 아마 양다솔이 열 다섯 살 무렵이었을 거다. 카랑카랑하면서도 윤택한 목소리, 티라미슈처럼 여러겹이 포개져 있는 목소리라 새소리려니 하고 듣기에 좋았다. 어느 날 새소리가 안 들린다 했더니 아는 선생님이 소개해준 화가의 집에 서너달 있다 왔다 했다. 또 어느 날 새소리가 안 들린다 했더니 부모님이 소개해준 된장 만드는 집에 서너달 갔다왔다 했다. 돌아오면 글을 한 편씩 썼는데 놀랍도록 풍성하고 예리했다. 혼자서 다녀온 일본 이야기에는 단단한 통찰이 담겨있었고 무전여행으로 다녀온 유럽 이야기를 읽을 때는 손에 땀을 쥐었다. 지하철 1호선에서 엄마랑 나눈 이야기는 모녀의 정담이라기보다는 두 여자의 서사였고 아빠의 출가 이야기는 독자로서는 흥미진진해서 미안할 지경이었다. 이 모든 이야기는 『간지럼태우기라는 양다솔의 책에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길 바란다. ‘기쁨은 말로 하고 슬픔은 글로 쓰는 것’ 그의 동료 가재가 명언으로 인정한 양다솔의 말이다.

 

최근 한 잡지에서 외국의 셰어하우스 관련 기사를 읽었다. 층층이 자기 집이 있고 공용공간도 넓고 쾌적했다. 공용공간에서는 요일마다 모임이 열린다고 했다. 예를 들면 월요일엔 책 읽는 모임이라거나 수요일엔 영화 보는 모임이라거나. 그 중 한 요일에는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이 열린다고 했다. 거주자 중의 한 명이 인터뷰를 했는데 그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날엔 꼭 내려온다고 했다. 그 기사를 읽으며 나도 그 날엔 내려가겠는데 생각을 하면서 아,  외국에는 이게 굉장히 일반적인 거구나 이마를 쳤다. 그 기사를 읽기 전까지 스탠드업 코미디 라는 걸 특정한 어떤 사람들이 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다. 코미디언이나 개그맨들 혹은 연예인들이 하는 거라고 생각을 했지 평범한 사람들이 저녁 먹고 모여서 하는 거라고는 상상을 못 했던 거다. 







대이야기의 시대로 웃으며



ⓒ곽소진





















양다솔  우리나라는 동네에서 뭔가를 하는 ‘로컬’이 없잖아요. 최고를 보려면 어디로 가야 되고, 그건 선별된 사람들만 할 수 있고, 브라운관에 나와야 되고. 브라운관은 일반인은 갈 수 없고. 물론 요즘은 유튜브가 있긴 하지만 그건 우리가 원하는 거랑은 좀 다른 거 같아요. 개인이 갖고 있는 탤런트 자체로 뭔가 될 수 있는 작은 단위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저는 좀 회의적이었어요. 셀럽이 되고 싶지도 않고 개그맨이 되어 TV에 나가고 싶지도 않고. 사실 스탠드업 코미디라는 게 판로가 없고 그걸 소비할 줄 아는 대중도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우리나라는 소강연은 엄청 많잖아요. 마을회관에서 강연해, 도서관에서 강연해. 그런데 뭐든지 어쨌든 교훈이 있어야 돼요. 교훈이 있는 강연은 많은데, 웃으려고 어디에 가는 것은 어색해 한단 말이죠.

 

지난 번에 방송국에서 섭외가 왔을 때도 너희는 일반인이고 사람들이 너희에게 관심이 없으니까 개인사는 접어두고,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런데 저희의 근간은 바로 그 개인사거든요. 정말 사사로운 얘기인데 남들에게는 그게 너무나 새로운, 저희가 재미있었던 건 바로 그 지점일 거예요. 어쨌거나 그 쪽 재미의 기준이라는 게 우리가 봤을 때는 전혀 재미가 없어서 잘 안됐죠. 사실 지금은 어려운 단계에 있어요. 처음에는 생각없이 뭔가를 했는데 이제 생각이 생긴 거죠. 열정은 넘치지만 직장인들이라는 한계도 있구요. 당장의 보상도 없고 미래의 보장도 없는 뭐 그런 일에 에너지를 쏟고 있는 중인데, 쉽지는 않아요. 하지만 저희는 이걸 많은 사람들이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 사람이 데이투데이로 뭘 하는지는 모르지만 이 사람이 어떻게 지내는지, 자기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게 뭔지, 그런 것을 속성으로 알게 돼버렸으니까. 누군가의 속에 있는 말을 들어주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눈으로 존재한다는 게 드문 일이잖아요. 그래서 계속 해 보고 싶은 건데 스탠드업이 라는 것이 기본 20초에 한 번씩은 웃겨야 된단 말이예요. 그래서 말재간이 없으면 안되는 거고. 즉흥성과 현장성도 있어야 하고. 쉽지는 않죠.

 

 

다솔은 플롯을 잘 짜고 썰을 풀 때 강약조절을 잘 했던 거 같다.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어도 자기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능숙한 코미디언들처럼. 누군가를 패러디 하는 것에 아주 능해서 때로는 위악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애정 어린 것 같기도 하고. 내 생각엔 무언가 헷갈림을 주는 게 코미디언의 한 역할 인 거 같은데 다솔은 그랬던 거 같다.  -이다울, 『천장의 무늬』저자

 


양다솔  사실 대학 나오고 나서는 같이 뭘 해보고 싶은 친구들을 못 만날 줄 알았거든요. 만나기 어렵잖아요. 근데 처음으로 ‘내가 살던 세상’과 관련 없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하고 이렇게 잘 지낼 수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인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이 넓은 세상에서 내가 걷기로 한 길을 정한 거잖아요. 내가 지향하는 가치를 따라 걷다보니 그곳을 같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만난 건데, 너무 잘 정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단 좋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만으로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양다솔은 지금껏 내가 만난 사람 중에 두 번째로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이다. 한 가지 질문에도 네 시간을 말할 수 있는 탁월한 스토리텔러다. 와, 대박, 진정? 맙소사, 하다보면 네 시간이 훌쩍 지나 있다. 저 나이에 어쩜 저런 경험을, 아니 이 나이에 이런 통찰을, 세상에 이런 이야기를 이토록 웃기게. 뭐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나이 타령을 하는 건 전형성에서의 탈주 얘기를 하려다보니. 직선으로 개념화된 시간을 뭉개고 가로지르고 잘라서 다시 붙이고, 범주화된 욕망을 일그러뜨리고 으깨고 오물딱조물딱 나누고 합체 하고 깔깔 웃는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글을 접기로 한다. 그 날 인터뷰의 절반이 남았지만 그 이야기를 다 하려면 오늘도 이 글을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날이 오겠지. 아, 첫 번째로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은 웃기지는 않으니까 웃기면서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으로는 양다솔이 첫 번째다.

 

혁명은 이야기와 함께 오고, 여기가 미래다.

대이야기의 시대를 양다솔과 함께 건널 수 있다니 

그득하고 미쁘다.







에필로그



한 시절 내가 살던 어딘가엔 꽃도

꽃도 이쁜 꽃도 많으니

내 장례식엔

튤립 백합 프리지어 천일홍 백일홍 

고운 고운 것들 가져오고

연두빛 초록빛 분홍빛 빨간빛

비비드한 비비드한 옷도 입고 오고


그 가운데 다솔이

팔도 길고 다리도 길고

눈 검고 깊은

다솔이 스탠드업 코미디를


어쩜 좋아 

눈은 웃고

입은 울며

너의 벗과 나의 동지들이

조금은 슬프고 

많이도 웃겨서

흐르는 눈물을 닦는 동안


나도 나도

네 공연을 보느라

죽은 줄도 잠시 잊고

가다 말고 돌아서서

으헤헤헤

가다 말고 돌아서서

하하하하


맑은 쇳소리로 이승의 다솔이

어딘 이제 가세요 할 거 없어요

긴 팔을 흔들면

온냐 온냐 너도 이제 밥 먹거라

그때는 미련 없이

총총 걸어 총총 

걸어 마흔 아홉 모퉁이 돌아서면


저기 저어기

몸을 벗어난 자리

마음이 해산한 자리

어쩌면 어쩌면

그곳에서도 

빛으로 찬란할

빛으로 푸르를

청춘의 얼굴들 









[잘 사는 청년]

대이야기의 시대를 열며

-양다솔을 만나다


인터뷰어. 어딘

인터뷰이. 양다솔

녹취 및 정리. 박상희(조개)

글. 어딘

발행일. 2020.07.21

발행처. 어딘의우연한연결 <2020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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