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남화를 만나다
나마야, 하고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 내 목소리는 온화해지고 얼굴의 근육들은 부드럽게 이완되며 저절로 미소가 생겨난다. 나마, 격음이나 경음이 없어 센 발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응이나 리을이 많아 달콤하거나 발랄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나마야, 하고 부를 때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느긋해지고 나른해진다. 동그랗고 보드라운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고 수줍으면서도 다정하면서도 사월의 담록같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나마의 본명은 홍남화다. 남화야 남화야 부르다가 나마가 되었다. 나마는 괴산에 산다. 초등학생, 청소년들과 함께 미술작업을 하고 군청에서 맡기는 각종 디자인 작업을 하고 농업생산자들의 상품디자인을 하고 할머니들의 생애사이야기를 책으로 만드는 일을 한다. 텃밭에서 나는 야채로 샐러드를 해먹고 바람부는 들판으로 강아지를 산책시키러 나가고 볕좋은 뜰에서 고양이들과 낮잠을 즐긴다. 한 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람이 소읍의 관계망이라 이런저런 일감과 제안들이 꾸준히 들어온다. 읍내에 나가면 스무 걸음에 한 번씩 아는 사람을 만나 인사를 한다. 종종 엄마와 마카오나 베트남을 여행하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히말라야 트래킹도 다녀온다. 누구나 꿈꾸는, 전원생활을 하면서 프리랜서로 생계를 유지하고 품위를 유지하면서 살고 있다. 괴산 사람 나마, 는 그러나 서울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대학까지 서울에서 졸업하고 첫 직장생활도 서울에서 했다. 1990년생 올해 서른, 나마는 충청북도 괴산에서 때로 바쁘고 때로 게으르게, 시간의 파도를 타고 있다.
어딘 대학 졸업하고 한 일이 뭐였지요?
나마 계원예술전문대 영상디자인과를 나와서 영상을 만드는 회사에 취직했어요. 학교에서는 촬영부터 편집, CG 다루는 거 등을 두루 배웠는데 저는 2D 쪽을 중심으로 공부했어요. 방송에 쓰이는 효과나 자막,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거를 주로 배웠다고 보면 되요, 평면적인 이미지들을 움직이는 거를 생각하시면 쉬워요. 졸업하고는 당연히(웃음) 영상회사에 갔죠. 마지막 학기에 인턴 했던 곳인데 그 회사에 바로 취업을 했습니다.
어딘 어떤 영상을 만드는 곳이었나요?
나마 주로 콘서트 영상을 만드는 회사였어요. 가수들이 공연할 때 배경에 나오는 영상, 그러니까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 그 노래에 어울리는 이미지들을 영상으로 나오게 하는, 무대와 어울리는 영상을 만드는 일을 했어요. 박정현, 김범수, 성시경, 서인국, 빅스 그리고 방탄소년단도 했었고.
어딘 오, 방탄소년단. 그땐 안 유명했을 때였나요?
나마 네 데뷔하고 얼마 안 됐을 때라서. 그때 활동했던 웬만한 가수들 건 다 했어요. 왜냐하면 여럿이 나오는 콘서트를 맡아서 하니까 당시 유명했던 가수들은 다 해봤어요.
어딘 나마는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을 한 거예요? 얼핏 들으면 되게 재밌을 거 같은 일인데.
나마 전 콘서트 현장이 아니라 사무실에서 디자인 소스를 만들어내는 일을 했죠. 이미지들을 제작하고 그걸 움직이게 하고 효과를 넣고. 사실 현장에서 트는 일이 재미있지 사무실에 앉아서 편집을 하면 그냥 공장에서 찍어내는 느낌으로 일을 해요. 조금 하다가 아 이거 진짜 나랑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어딘 그 당시에 일이 많아서 힘들어했던 게 생각나요.
나마 맞아요. 일이 많을 때는 거의 매일 야근하고 주말에도 일을 해야 했어요. 그렇게 1년 반 일하고 나니까 힘들었어요. 일하고 퇴근하는데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숨을 못 쉬겠고 가다 주저앉고. 내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구나를 몸을 통해서 알게 되었어요. 평소에 없던 우울한 감정이 찾아오고. 우울증이 마음으로 오는 게 아니라 몸을 통해 온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어딘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나마 일단 쉬어야겠다 생각했어요.
어딘 원래 잘 쉬잖아요. (웃음)
나마 하하하 맞아요. 많이 쉬어야 해요. 워낙 체력도 없고 잘 지쳐서. 일단 괴산에 내려왔죠.
어딘 언제부터 나마네가 괴산에 살게 됐죠?
나마 원래 집이 서울이었는데, 저희 아버지가 오랜 꿈이었던 귀촌을, 제가 대학생이 될 무렵에 귀촌을 하셨어요. 서울 집을 팔고 가족들이 다 괴산으로 갔죠. 저가 대학에 입학할 무렵이라 저는 분당에 있는 할머니 댁에서 살며 학교를 오갔어요. 회사 다닐 때도 할머니댁에서 다니고. 그래서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갔죠. 시골에 가서 쉬어야겠다가 아니라 ‘가족들이 있는 곳에서’ 쉬어야겠다, 가 그때 생각이었어요.
어딘 가족들이 있는 곳에서 쉬어야겠다, 가족을 많이 사랑하나봐요?
나마 맞아요.
어딘 가족 사랑하기 쉽지 않은데. (웃음)
나마 그러니까요. 저는 일주일에 한 번은 가족을 보고 싶더라고요. 회사 다닐 때도 그게 가장 컸어요. 일주일에 한 번은 엄마 얼굴을 보고 싶은데 회사 다닐 때는 일주일에 한 번도 보러갈 시간이 없었으니까. 네... 아빠 얼굴은 모르겠는데(웃음), 엄마는 보고 싶었어요.
퇴사이유, 엄마 얼굴을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서, 라는 사직서를 받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이거이거이거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구만, 아직 배가 덜 고팠구만, 이런 말을 적어도 나는 할 수가 없다. 내 첫 직장의 퇴사이유가 ‘지하철을 타기 싫어서’ 였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광고대행사에 취직을 했다. 1990년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많은 광고대행사들이 충무로에 있었다. 수유리에 있는 집에서 충무로까지는 4호선을 타면 20분이면 충분히 닿는 거리였지만 당시 지하철은 말 그대로 ‘지옥철’이었다. 지옥의 풍경이 있다면 이러리라고 아침마다 생각했다. 상계 노원 쌍문을 지나며 사람들을 태운 지하철은 내가 탈 즈음에는 이미 발 디딜 틈이라곤 없었다. 푸쉬맨들이 손바닥을 팡팡 두드리며 준비를 하고 있다가 사람들을 안으로 밀어넣었다. 비명이 나왔지만 밀려들어가서는 사방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납작콩이 되었다가 다시 다음 정거장이 될라치면 내리는 사람들에 의해 떠밀려 밖으로 튕겨나왔다. 특히 동대문이나 동대문운동장이 되면 거대한 사람파도가 나를 떠밀기 때문에 발이 공중에 뜬 상태로 쓸려나왔다. 사람쓰나미에 휩쓸려 밖으로 나오면 숨이 쉬어지지 않아 몇 초 동안 바닥에 앉아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렇게 한달 두달 세달, 어느날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 실갱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왜 만지느냐, 내가 널 언제 만졌다고 그러냐, 지금 만지지 않았느냐, 이년이 생사람 잡네, 그 와중에 한 가지 생각이 빛처럼 선명하고 오롯하게 떠올랐다. 내가 이러려고 태어난 거 같지는 않아. 다음날 사표를 냈다. 물론 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지하철이었다. 하와이에 사는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하와이 사람들이 미국 본토에 취직을 하러 갔다가 몇 년 만에 그만두고 오는데 그 이유가 ‘쪼리를 신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했다.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쪼리’를 신기 시작한 사람들이 구두 안에 발을 우겨넣고 사는 일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편안한 ‘쪼리’를 신어본 나는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하지만 지하철도 쪼리도 ‘일주일에 한 번 엄마를 보고 싶어서’라는 퇴사 이유 앞에서는 꼬리가 내려진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퇴사 이유다.
어딘 아 그럼 그 때 괴산에 내려가서 지금까지 살고 있군요. 그렇게 쉬자고 내려간 괴산에서 인생 인생 2막이 펼쳐진 걸로 알고 있어요, 일도 많이 하고. 괴산에서 맨 처음 어떤 일을 하기 시작했나요?
나마 괴산에 문화예술 교육을 하는 선생님들이 계세요. 초중고 아이들 대상으로. 사실 저는 거기에 끼고 싶지 않았어요. 선생님 역할을 하고 싶지가 않아서. (웃음) 저랑 정말 안 맞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서 절대로, 완강히 거부했어요. 괴산에 내려가서 처음 1년은 서울에서 돈을 벌고 괴산에서 쉬고 약간 이런 식으로 살았어요. 주말마다 이태원이랑 홍대 앞에서 열리는 플리마켓에 가서 초상화 그려주는 일을 했어요. 그렇게 돈 벌어서 주말 내내 놀다가 괴산에 가서 좀 쉬다가 또 놀다가 그렇게 1년을 보냈어요. 서울에서 알던 사람들이 일을 보내줘서 디자인이나 영상 편집일도 조금씩 했죠. 가끔 연애도 하고. (웃음) 서울을 왔다갔다 하며 행복하게 살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 수는 없었어요. 학자금 대출도 갚아야 했거든요. 그러던 차에 방과 후 선생님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왔어요. 미술과 관련한. 괴산은 좁으니까 혹시 주변에 이런 일 할 사람 없어? 하고 누군가 물어보면 아 이런 사람있는데 소개시켜줄까? 그런 분위기거든요. 그렇게 저한테 연락이 와서 하게 되었어요. 방과 후 미술, 뭐 큰 일 아닐 거 같지만 저는 정말 큰 용기를 내서 시작한 거예요. 왜냐하면 저는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게 너무 힘들거든요. 목소리도 작고, 아직도 회의할 때 목소리 더 크게 말해달라는 이야기를 듣는데. (웃음) 아무튼 초등학생들 앞에서 이 목소리로 말하면 내 말을 들어줄까 걱정했는데, 막상 앞에 서니까 목소리도 커지고 (웃음) 아이들이랑 말도 잘 통하고. 만들기 수업, 그리기 수업을 격주로 돌아가면서 했는데 아이들이 저를 좋아해주더라고요. (웃음) 거기서 큰 자신감을 얻었어요. 아 애들이 날 좋아해주고 내 말을 들어주는구나. 그건 저에게 너무 중요한 일이었어요.
어딘 몇 학년을 맡은 거예요?
나마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어딘 스펙트럼이 넓네요. 그러니까 그 아이들이 방과 후에 모이면 오늘은 이걸 만들어볼까, 해서 같이 만들고, 오늘은 그림을 그려볼까, 해서 함께 그림 그리고?
나마 네 맞아요. 1, 2학년 애들이 막 달려와서 안기는 거예요. 아, 막 사랑스러운 애기들이.그리고 고학년 아이들의 약간 까칠하면서도 다정한 그런 사랑을 느끼며 수업을 진행했어요. 처음엔 아이들의 에너지를 다 받아줄 수 없어서 집에 오면 쓰러졌어요. 네 시간 수업인데 네 시간 하고 와서 바로 기절해서 다음날까지 잤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 중학생 대상 만화수업도 하게 됐어요. 방과 후 교사 하기 시작한 그 이듬해부터 했는데, 미술 하던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어서 만화수업에도 오고. 아이들이 이렇게 커가는 보이잖아요. 너무 신기했어요.
나마가 아이들과 문화작업을 하다니, 놀라운 일이지만 아이들이 그녀를 좋아한다니, 그건 놀랍지 않은 일이다. 나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마가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함께 일을 한 적이 있다. ‘고정희청소년문학상 백일장’ 행사를 진행하는데 자의반 타의반 나마도 스텝으로 참여했다. 나마의 역할은 영상촬영과 편집이었다. 남들 앞에서 말하는 건 진정 못하겠다며 카메라를 드는 일을 맡은 것이었다. 어쩌면 카메라 뒤에 숨어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참 희안하게도 2박 3일동안 해남 미황사에서 열린 당시 백일장에서 나마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하루종일 입 한 번 안 열고 카메라만 메고 촬영만 하는데도 소녀들은 나마가 너무 멋지다며 말을 걸곤 했다. 쭈볏쭈볏 우물우물 망설이며 꺼내는 말들을 귀담아 들으려고 더 나마 쪽으로 몸을 기울이던 소녀들, 이 문득 떠오른다.
나마 벽을 하나 넘은 느낌이었어요. 용기를 내 청소년 수업을 또 하나 맡았는데 중고생이랑 라디오 드라마 만드는 수업이었어요. 로미오와 줄리엣을 각색해서 라디오 드라마로 만드는 수업이었는데, 어쩌다보니 공연까지 하게 되었어요. 그건 더 큰 벽을 넘은 거죠. (웃음) 문화학교 숲, 이라는 청소년 문화교육을 하는 팀이 있는데 청소년을 위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일을 해요. 예를 들어 중학교 국어시간에 들어가서 그림책 만들기 수업도 하고, 토요문화학교 같은 걸 만들어서 영상을 만들거나 라디오 드라마 만들기 같은 걸 하는 거예요. 다양한 문화예술 교육을 괴산에서 지속적으로 하는 그룹이예요. 그 팀과 주로 일을 해요.
어딘 거기서 들어오라는 제안은 없었어요?
나마 있었는데, 제가 출근할 자신이 없어서. (웃음) 그냥 아주 긴밀한 관계로 함께 일하고 있어요.
어딘 라디오드라마도 문화학교 숲의 일이었어요?
나마 아니오. 그건 ‘문화의 집’에서 진행한 프로그램이었어요. 처음엔 역시나 겁이 났어요. 청소년이라기에 뭔가 무서운 청소년들이 생각나서. 대답도 하지 않으면 어쩌지 했는데, 막상 가니까 절 좋아해 주더라고요, 생각보다 말도 잘 통하고. 이 친구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구나 내가, 그런게 느껴져서 되게 좋았던 거 같아요. 미술과 관련 있는 수업만 하다가 이런 수업은 처음이라 재미도 있었지만 시행착오도 많았어요.
어딘 어떤 시행착오가 있었나요?
나마 약간 결과물에 집착을 해서, 너무 선생님의 손이 많이 들어가버린 거죠. 교육의 과정이, 그 과정이 중요하다는 거 아이들에게는, 멋진 결과물이 안 나오더라도 그 안에서 뭔가 성취하고 그런 게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교육활동 하시는 분들이 꼭 멋있는 번지르르한 작품이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걸 이해하게 됐어요. 그 과정에서 제가 가지고 있던 청소년에 대한 편견, 공포 같은 걸 조금 깬 것도 저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어요. 난 이거 못해, 난 이거 무서워, 이런 것들이 깨져서 되게 잘 된 일 같아요. 계기가 필요했는데 자연스럽게 이 기회를 통해서 내가 가진 한계를 극복했다는 느낌이 들어요.
라디오 드라마 만들기의 연장선으로 나마는 청소년들과 영화 만들기도 하고 만화수업도 진행한다. 초등학교 아이들과 놀이수업도 한다. 전래놀이를 하면서 그걸 토대로 연극도 만들고 동화책 만드는 작업으로 연결시켜 일을 확장하기도 한다. 영상 뿐 아니라 나마는 디자인 글쓰기 그림 만화 게임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작업하는 사람이다. 나마를 처음 만난 것도 글쓰기 수업에서였다. 몹시 웃기는 이야기를 조용하고 차분하게 할 줄 아는 이야기꾼이었다. 20대 초반에는 또래집단들과 한 달에 한 번 ‘지誌’ 라는 잡지를 만들었는데 ‘무섭지誌’ ‘외롭지誌’ ‘황당하지誌’ 등을 주제에 맞게 매달 디자인하고 편집한 이도 나마다. 나마가 차곡차곡 훈련하고 쌓은 삶의 기술들이 괴산에서 살아가는 힘이 되고 있는 듯 하다. 사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청소년들과 함께 작업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신기하기도 했다. 아마 서울에 계속 살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일 거 같다. 하고 싶지 않은 일, 할 수 없는 일의 영역으로 남겨놓았을 일을 나마는 괴산에서 하나하나 하고 있다. 아이들이 절 좋아해줬어요, 라고 말하지만 나마에게는 분명 아이들이 좋아할 구석이 있었을 것이다. 강압적이지 않고 위계적이지 않으며 아이들의 말을 신중하게 듣고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는, 젊고 다감한 선생님을 어떤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을까. 자신이 말을 하는 것보다 지지배배 지지배배 떠들며 스스로 어떤 결론에 도달하도록 충분히 들어주는 교사, 아마 그랬을 것이다. 집에 와서 쓰러져 자야 했던 것도 온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다 받아안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마의 마음 속으로 들어와 날개를 펴고 날아다니는 아이들의 이야기, 그 성성한 에너지가 아마도 처음에는 힘에 부쳤을 것이다.
나마 아이들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고 싶고 만나고 싶어요. 그 아이들을 지원하고 싶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어딘 나마가 괴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잘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을 때면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음, 나마가 자기 작업을 했으면 좋겠는데, 라는 생각을 한 적도 종종 있어요. 나마가 가진 예술적 재능을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에만 쓰는 것이 안타까웠다고나 할까, 나는 나마가 그린 그림을 굉장히 좋아하잖아요. 이번에 임꺽정 작업 한다고 해서 매우 좋았아요.
나마 임꺽정 작업은 문화예술 숲에서 문화재청에서 지원받아 하는 사업이예요. 괴산에는 <임꺽정>의 작가인 홍명희의 생가가 있어요. 거기서 임꺽정 공연을 하는데 작가님이 동화처럼 각색해주시면 제가 그림을 그리는 일을 맡았어요. 그걸로 매달 셋째 주 토요일에 공연을 해요. 날이 어두워지면 홍명희작가의 생가에서 커다란 스크린을 걸고 영상을 틀어요. 성우분들이 이야기를 구연동화처럼 읽어주시고 거기에 제가 그린 그림이 나오는 거죠. 지금까지 4회 정도 했는데 언제 끝날지 모르겠어요. 회당 스무장 정도를 그려요.
어딘 회당 20장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니겠네요. 다 끝나면 나중에 동화책으로 내도 되겠어요.
나마 네, 그러려면 더 예쁘게 잘 그려야 하는데, 어쨌든 그림들은 다시 수정을 해서 잘 모아놓고 있긴 해요.
어딘 날이 따듯해지면 홍명희생가에 한 번 가야겠어요. 임꺽정 보러. 이런 일 말고도 또 하는 일이 있다고 들었어요.
나마 지역행사 포스터나 프로그램 같은 걸 제작하는 일도 해요. 어린이날 행사라든지 지역 장터, 농부 시장 등등. 어떨 때 군청에 일이 있어 들어가다 보면 다 제가 작업한 것들이 붙어있어서 웃을 때도 있어요. 그리고 소소하게 브랜딩 같은 것도 하고 농장 로고를 디자인 하는 일도 해요. 군에서 하는 자료집 만들기, 아이들 작업의 마지막 결과물 그리고 그림책 만들기. 가장 많이 하는 건 역시 그림책 만들기네요. 할머니들의 생애사를 그림책으로 엮는 일을 지금까지는 제작만 맡았었는데 올해부터는 이야기 단계부터 같이 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어딘 와, 그 많은 일들을 다 할 수 있어요?남화: 네 할 수 있더라고요. 어떻게든 해내고 있어요.
나마는 목하 수련 중이다. 닥치는 모든 일을 해내면서 손끝을 벼리고 마음을 확장하고 이야기를 쌓으면서 동시에 연결하고 있다. 중요한 일과 시시껄렁한 일을 구별하지 않고 귀한 일과 천한 일을 가리지 않고 이익이 되는 일과 손해가 되는 일을 구분하지 않고 네 일과 내 일을 나누지 않고 다만 정진하고 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 사이에서 망설이지 않고 잘 하는 일과 못 하는 일 사이에서 서성이지 않는다. 수련이란 그런 것이다. 고르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판단하지 말며 의심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으며, 다만 하는 것.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것. 그 끝에 눈은 깊어질 것이고 손은 자유로워질 것이고 마음은 무연히 텅, 빌 것이다. 일이란 닥치면 하는 것, 이다.
어딘 돈도 많이 벌겠네요?
나마 엄청 많이 버는 건 아니지만 서울에서 회사 다닐 때보다는 많이 버는 거 같아요.
어딘 서울에서는 한 가지 일을 집중적으로 한 데 비해 괴산에서는 굉장히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네요. 이 일의 차이는 뭐고 나마는 어떤 게 더 잘 맞아요?
나마 음... 일의 효율로 봤을 때는 한 가지 일을 하는 게 속도도 빠르고 더 많이 할 수 있는 거 같아요. 그런데 제 스스로가 너무 힘든 거죠. 답답하고. 반면에 괴산에서의 일은 내가 잘 하는 일을 할 수 있고, 무엇보다 필요로 하는 일을 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나의 쓸모를 느끼면서 일을 하게 되니까 뭔가 좀더 열심히 하게 되는 거 같아요. 그리고 직접 사람 만나서 하는 일이 대부분이잖아요. 영상 편집 일은 컴퓨터만 보고 일을 했다면 여기선 뭐든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의논을 하고 그렇게 일을 만들어가요. 그래서 뭔가 에너지를 얻으면서 일을 하는 느낌이예요.
어딘 예를 들어서 그 공방만 하더라도 우리는 이런 목적을 갖고 이런 일을 하고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데 어떤 식의 로고가 나왔으면 좋겠다, 이렇게 둘이 만나서 얘기를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일을 하는군요. 서울에서의 일이 만나보지도 못한 아이돌이나 가수들의 영상을 기술적으로 편집만 했다면 여기서는 내가 아는 이들의 일을 하는 거군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잘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막 생기겠어요.
나마 네. 또 자주 보게 되는 사람들이니까. 다 이웃인 거죠.
어딘 다 이웃이라, 그 말 참 좋으네요.
나마 다 이웃인 셈이죠. 다 자주 만나니까. 돌아다니다 보면 만나니까.
어딘 괴산의 인구가 얼마나 되요?
나마 한 3만 5천 쯤 될 거 같아요.
어딘 그 중 한 500명은 알겠네요?
나마 그럴 거 같아요. (웃음) 아이들은 절반은 아는 거 같아요.
얼마 전 새로운 모임을 시작하면서 직책에 대한 이름들을 새롭게 붙여보는 자리가 있었다. 학당의 장을 무엇이라 부를까, 이 학당에서 배우는 청년들을 무엇이라 부를까, 이 학당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을 무엇이라 부를까, 학당의 장이니 당장이라 부를까,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가 생각나 등등 브레인 스토밍의 자리가 늘 그렇듯 온갖가지 이야기가 나오다가, 우리에게 중요한 사람이니 줄여서 우중이 어떨까, 라는 말이 나왔다. 우중, 우리에게 중요한 사람, 나는 그 직책의 이름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사람, 이라니. 그 직책을 맡으면 절로 어깨가 으쓱해지고 자부심으로 코가 드높아지고 어떤 일이든 신명나게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나마야말로 괴산의 우중이 된 거 같다. 군청에서 농장에서 학교에서 모두 나마를 필요로 한다. 우필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 어쨌든 나마는 괴산의 우중이면서 우필이 된 거 같다.
어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요?
나마 음... 매일매일 다른데요, 수업이 없는 날에는 하루종일 집에 있어요. 일하고 싶을 때 일하다가 개나 고양이랑 놀다가 하며 하루를 보내죠. 개랑 고양이가 도합 여덟 마리가 있어요.개들은 다 마당에서 살고 고양이들은 왔다갔다 하고.
어딘 처음 나마가 괴산 갔을 땐 가끔 서울에 와서 놀고 싶어하기도 하고 서울에 가서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작년부터는 아, 이 양반이 괴산에 완전히 눌러앉는 느낌인데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지금은 괴산 사람 다 된 거 같아요.
나마 네 맞아요. 사실 전 원래 시골에 대한 동경도 없었고 전원생활을 꿈꿔 본 적도 없어요. 오히려 도시가 더 익숙하고 편했죠. 재미있는 것도 많고. 괴산에 와서 가장 크게 느낀 건 나의 쓸모, 였어요. 내가 이렇게 쓸모있는 사람이었나, 느껴서 사실 되게 자신감이 생겼어요.
어딘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나마 뭔가 에너지를 많이 얻은 거 같아요, 제가 생각보다 굉장히, 아니 보시는 것처럼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좀 무기력한 편인데 괴산에서 사람들 틈에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 나도 쓸모 있는 사람이구나, 무엇보다 내가 괴산에 소속되어있는 느낌, 괴산이라는 동네의 주민이 된 느낌이 들어요. 여기에 내 일도 있고 집도 있으니까.
어딘 그게 괴산 사람인 거지요. (웃음)
나마 동네 사람들도 다 알고.
어딘 와, 행동거지도 조심하셔야겠어요. (웃음)
나마 그러니까요. (웃음) 말도 조심해야 되고, 행동도 함부로 하면 안 되고.
어딘 지금 나마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삶의 형태인 거 같아요. 대부분의 도시 사람들이 아 시골에 가서 살고 싶어. 이 바쁜 생활 때려치고 싶어, 내일은 꼭 사표를 내고 말겠어,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거든요. 매일 지옥철을 타면서 출퇴근을 하고, 야근하고, 밤늦게까지 회식하면서 술 마시고, 다음 날 술 깨기도 전에 출근해야 하고, 그러면서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를 해요. 시골에 가서 마당 있는 집에 살면서 약간의 텃밭을 가꾸면서 내가 원하는 일을 내 시간에 맞추어 하고 싶다. 그런데 나마는 지금 그런 삶을 살고 있잖아요. 나마는 지금 나마가 꿈꾸던 삶을 살고 있나요?
나마 음... 네 맞아요. 특히 저 같은 사람한테는 이렇게 사는 게 잘 맞는 거 같아요. 저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고 제 취미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작은 공간만 있으면 행복한 사람이거든요. 도시보다 자극이 적은 것도 저는 좋아요. 자극이 적으니까 눈과 귀가 편안해지고 마음이 안정감을 느끼는 거 같아요. 도시에서 살 때보다는 삶의 질이 제 기준에서 높아졌다고 느끼고 있어요.
어딘 삶의 질이라.
나마 네. 아 이게 행복이구나 하는 순간들이 많아요.
하와이에 있는 친구도 그랬다. 삶의 질을 포기할 수 없어 하와이에 정착하기로 했다고. 8시간 근무가 정착되어 있어 출근해서 8시간이 넘어서 퇴근 카드가 안 찍히면 그때부터 야근수당이 붙는다고 했다. 그래서 야근을 하려면 꼭 보고를 해야 한단다. 저는 이런이런 일 때문에 야근해야만 합니다 부디 저에게 야근을 허하옵소서, 이런 분위기란다. 인권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야근수당의 비용이 워낙 높아서이겠지만 어쨌거나 저녁이 있는 삶이 보장되니 좋은 일이라 아니 할 수는 없으리라. 하와이 지역뉴스라며 짧은 영상을 하나 보내준 적도 있는데 동물원에서 새 한 마리가 탈출을 해서 남자 직원 네 명이 뜰채를 가지고 새를 잡겠다고 뛰어다니는 내용이었다. 결국 하와이 친구가 말한 삶의 질이라는 것도 자극이 적고 피곤할 일이 없는 거였다.
어딘 마당도 있고 개도 있고 고양이도 있고. 텃밭 상추로 쌈 싸 먹고. 김장도 그걸로 하고. 그래서 나마는 향후 특별한 일이 없는 한은 괴산에서 더 살아볼 계획인 거군요?
나마 아직 향후 계획까진 없고, 지금 이 상태가 좋으니 이 상태를 유지해볼까, 하는 마음 정도만 있어요.
어딘 괴산에 사는 장점은 나마라는 사람이 갖고 있는 성격에 맞는 환경, 인 거 같아요. 그럼 괴산에서 사는 불편함 같은 것도 있나요? 소읍이잖아요, 아는 사람이 많다는 건 좋은 일이면서도 사실 번거로운 일이기도 하잖아요.
나마 젊은이들이 거의 없어요. 괴산 청년들은 고등학교 졸업하면 도시로 떠나거든요. 학업을 위해서든 취업을 위해서든. 그러다보니 젊은이들을 위한 공간이 없어요. 영화관이야 요즘은 집에 넷플릭스 있으니까 안 가도 되는데, 미술관이든 쇼핑몰이든 젊은이들이 모여서 놀 공간이 없어요. 숲속 작은 책방이 있긴 한데, 너무 많이 들어가야 하고. 술집 말고는 즐길거리가 없는 거, 그건 좀 불편하죠.
어딘 그러고보니 서울에서는 종종 전시를 같이 보거나 영화를 같이 보곤 했군요. 얼마 전에도 운전해서 브라질홀 앞을 지나가는데 재미있는 전시를 하는 거 같더라구요. 담에 나마랑 한번 가야겠다 생각했어요. 작년에도 전시 보고 사진 찍어서 보낸 적 있었죠? 좋은 전시 보면 나마 생각이 나요. 괴산에는 갤러리 같은 게 없나요?
나마 하나도 없어요. 아무래도 노년층 인구가 많다보니 예산도 그쪽으로 많이 배치가 되고 청년 청소년 쪽은 지원이 약해요.
어딘 지역이 갖는 악순환 구도네요. 청년 청소년 인구가 축소되니 예산이 줄고 그러다보니 청년들은 더욱 지역에서 일하기가 힘들고. 이 구조를 선순환으로 돌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할 거 같네요. 나마가 갤러리 같은 거 하나 시작하면 어때요?
나마 안 그래도 작은 갤러리를 해보고 싶어서 돈을 모으고 있어요. 독립서점을 겸한. 인쇄공방 개념으로 구상해 보고 있어요. 여기서 살다 보니까 어떻게 하면 젊은이들을 데려올 수 있을까를 같이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뭔가 연애를 하려고 해도 데려올 건덕지가 필요한데. (웃음) 뭔가 있으면 젊은이들이 오지 않을까요. 그래도 올해 괴산에 다섯 명 있는 청년들(웃음)과 그림책 만들기 프로젝트를 같이 하게 됐어요. 문화학교 숲에 있는 친구 두 명과 청년인턴 자리에 들어온 친구 두명 그리고 저, 다섯 명이 그림책 만들기 기획안을 냈는데 예산을 받을 수 있게 됐어요. 이걸 하게 된 계기는 문화학교 숲에서 작가와 함께 하는 그림책 만들기 프로그램을 했는데 그 수업을 같이 듣고 자극을 받아서 우리도 한 번 해보자 해서 하게 됐죠. 문화적인 자극을 받는 건 좋은 일인 거 같아요.
나마는 진정 괴산 사람이 다 되어버렸다. 자신이 사는 지역의 고민을 어느 결에 진지하게 하고 있다. 무릇 젊은이들란 도시로 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화려하고 새롭고 다양하고 신나는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은 욕망이 없다면 그것이 어찌 청춘이랴. 그렇게 도시에서 원없이 후회없이 놀다가 어느날 문득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날, 거기 동무와 일자리와 영화관과 아이들을 키울 교육환경과 카페와 쇼핑몰과, 동지들, 이 있으면 된다. 그러면 누구나 돌아갈 것이다. 나마가 구상하는 공방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괴산 읍내에 이쁘고 다정한 공방이 열리면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하나 둘 찾아올 것이다. 기웃기웃 구경하던 사람들 중에 누군가는 말을 걸어올 것이고 시간이 흐르면 옆자리에 와서 일을 같이 할 수도 있겠지. 군청에서도 오고 농장에서도 오고 도시생활에 지친 친구들도 오고 그러다보면 왁작왁작 복작복작, 그러다 또다른 공간을 옆에 만들고. 그 시작이 나마의 공방이 되었으면 진정 좋겠다.
어딘 엄마나 아빠는 나마가 괴산에 있는 것보다 도시에서 커리어를 쌓기를 원하거나 바라진 않나요?
나마 음... 엄마 아빠는 안 그러시는데 저는 살짝 고민을 했었어요. 그런 거 있잖아요, 20대인데 더 도전해보고 그래야 하지 않을까, 벌써 시골에서 안주하려고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강박 같은 거. 그런데 30대가 되니 뭔가 편안해지는 지점이 있어요. 20대 땐 누가 강요하진 않았는데 뭔가 숙제를 안 한 느낌이 계속 들었거든요.
어딘 젊은이여 꿈과 야망을 가져라 이런 거?
나마 네. 아무도 나한테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부담스러운 뭔가가 있었어요. 그래서 빨리 할머니가 되고 싶단 생각도 들었어요. 아무도 나에게 뭔가를 요구하지 않는, 그냥 존재 자체만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는 할머니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전 나이 드는 게 좋아요. 다들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게 힘들다고 하는데 저는 되게 자연스럽고 편안했거든요.
어딘 생각해보니 나도 가장 자유로웠던 때가 20대 후반 30대 초반이었던 것 같네요. 신기하지, 나도 빨리 늙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늙어보니까 기운이 없고 자꾸 아프고. (웃음) 그래서 그렇게까지 빨리 늙을 필요는 없는 같아요. (웃음)
나마 지금은 많이 편안해졌어요.
어딘 도전이나 야망 같은 말에 나마가 어떤 부담이 있었다고 했는데 나는 사실 나마가 큰 도전을 했다고 생각해요. 남들이 모두 이 길로 가고 어른들도 그 길로 가는 게 정답인 거처럼 말하는 과정에서 나마는 정반대의 길을 갔잖아요. 어떻게 보면 나마가 괴산으로 내려간 거 자체가 큰 도전이었던 거죠. 너는 대학까지 나온 젊은 애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니, 라는 말을 안 하는 훌륭한 부모님이 계셨던 것이 나마가 괴산에 터를 잡는데 큰 역할을 한 거 같네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뭐가 있어요?
나마 아까 말씀드린 인쇄공방. 인쇄공방은 꼭 해야되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누구나 와서 자기 책을 만들 수 있는 곳.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들어와서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하면 쓸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책을 만들어 드리는 거에요.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쓴 책이 모이면 그 안에 괴산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거죠. 타지에서 놀러 온 사람들도 괴산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는, 그런 재미있는 공간을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그냥 이미지로만 있는데, 할머니가 되어서 혼자 사는데 그림을 그리고 게임도 하고. (웃음) 집을 잘 짓고 시골에서, 그림 그리고 게임하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 이미지를 갖고 있어요. 근데 할머니가 돼서도 게임을 할 수 있을까요? 눈이 잘 안보여서 못할까요? (웃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주인공 소녀가 갑자기 할머니가 됐는데도 전혀 놀라지 않는 장면이었다. 나마가 내일 할머니가 되어 있어도 나는 전혀 놀랄 거 같지 않다. 머리가 하얗게 센 나마는 더 멋진 그림을 그리고 더 신나게 게임을 하고 더 따뜻한 그림책을 만들 것이다.
어딘 요즘도 게임 많이 해요? 10대 때 폐인처럼 게임 한 시절도 있었잖아요. (웃음)
나마 네. 근데 그 땐 돈이 없어서 다양한 게임을 해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돈을 버니까 살 수 있는 게임이 많잖아요. 세상에, 어릴 때는 시간이 많아서 할 수 있었는데 그땐 돈이 없었고 지금은 시간이 부족해서 마음껏 못 하고 있다니. 얼른 할머니가 돼서 막 게임을 하고 싶어요. (웃음) 어쨌거나 그래도 저는 돈 벌어서 게임에 가장 많이 써요. 할 시간이 없어도 신작이 나오면 막 사요. (웃음)
어딘 게임 말고 나마 인생에 영향력을 행사한 건 어떤 것들이 있어요?
나마 음...
어딘 혹은 영향을 끼친 인물. 사람.
나마 일단 학교를 나온 거가 시작인가?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도저히 못 다니겠어서, 너무 재미가 없었어요, 부모님께 얘기를 했는데 아빠가 학교를 나와도 된다고 허락했던 것, 그리고 고모의 추천으로 어딘을 만나서 글을 쓰게 된 것, 그 과정에서 다양한 친구들을 만났고 삶에 다양한 길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보게 된 것, 그리고 아빠가 괴산에 내려가 버린 것, 사실 엄마는 반대했었는데 지금은 가장 괴산생활을 잘 즐기고 계신 거 같아요. 플루트도 배우고 난타도 배우고. (웃음)
나마가 청소년 시절에 공공미술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우리 팀이 맡은 일은 신문을 발행하는 것이었는데 어쩌다 주최측과 약간의 갈등이 발생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고 모두 심각한 얼굴로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열띠게 토론했다. 디자인을 맡은 나마와 내가 우리 팀을 대표해 참여했는데 매끄러운 수습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해결을 했다. 끝내고 나오는데 회의 내내 한 마디도 안 하던 나마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딘, 방구가 나올 거 같아 죽을 뻔 했어요. 그 한 마디에 나는 빵 터져서 아하하하하하 길거리에서 배를 잡고 웃었다. 웃고 웃고 웃고 또 웃었다. 그러고나니 회의에서 받았던 스트레스가 모두 날아가버렸다. 열 여덟살 나마,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어른들이 대부분인 회의장에서 배가 부글부글 끓었던 것이다. 나마는 긴장과 갈등을 잘 견디지 못 한다. 혹은 견디지 않는다. 슬쩍 옆으로 피한다. 정면승부만 승부랴, 고수란 꼿꼿하기보단 말랑말랑한 법이다. 연하고 순하고 유연한, 생명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나마야, 하고 부를 때 내 어깨는 문득 부드러워지고 눈은 꼬리를 접는다.
[잘 사는 청년]
달콤한 나마
-홍남화를 만나다
인터뷰어. 어딘
인터뷰이. 홍남화(나마)
녹취 및 정리. 박상희(조개)
글. 어딘
발행일. 2019.04.26
에필로그, 3년이 지난 후 한 컷 [2022.04.18]
그렇다
나는 오늘 아침 주례사를 해달라는 청을 받았다
어딘!
다름이아니라..ㅎㅎ 저의 결혼식 주례를
어딘께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청소년 시절부터 저의 성장과정을
옆에서 지켜봐주신 어딘께 축하의 말을 들으면
큰 행복과 힘이 될것 같단 생각이 들었답니다.
카톡 메세지를 읽으며 나는 혼자
으하하하 웃었다
이런 청을 받을 줄이야
나는 결혼 근처에도 가본적 없이 싱글의 삶을 혁혁하게 살아온 사람이 아닌가
결혼에 대해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으랴
하지만 나마,
나마였다
아침을 먹고 요가를 시작하는데 어쩐지 나마와 보낸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열일곱 겨울인가 열여덟 초봄인가
창의적글쓰기 교실에 찾아온 나마
나마가 아니었다면 창의적글쓰기가 그렇게 오래 지속되었을까
뭉근하고 나른한 표정으로 매주 빠지지 않고 나와 앉아있던 나마
밤새워 편집 디자인을 했던 청주 노인공원 프로젝트
아침부터 밤까지 자전거를 타고 경주를 누볐던 신라여행스쿨
무주에서의 글쓰기 프로젝트
둘이서 했던 일본여행
쿠로가와행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이야기 나누던
나마의 표정들이 떠올랐다 어쩐지, 뭉클했다
내가 아끼는 것들 중에는 나마가 선물해준 것들이 많다 은하철도 999의 메텔인형
초록색 비옷
꽃무늬 파우치
바리데기를 그려준 컵
요가의 마지막 자세를 하며 생각했다
8월엔 하와이에 있을텐데
주례사를 하러 들어와야 할까?
나마,
불러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눈꼬리가 슴슴해지며
입술이 부드러워지는
나마
가 결혼을 한다
반딧불이와 나비를 키우는 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