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를 만나다
한군이 약관 스물 한 살의 나이로 한 아이의 부친이 되었을 때 나는 세상 모든 청년들이 저 나이 때쯤 아버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아비로서의 자애로움, 생계에 대한 구체적인 책임감, 불현듯 드러나는 조금은 복잡미묘한 표정은 또래 젊은이들의 성마른 표정과는 확실히 달랐다. 사랑을 아는 남자, 라고나 할까. 첫 아이 지음이에 이어 이음이가 태어나고 다시 셋째 바라보음이 태어났는데도 아직 한군은 서른이 안 되었다. 한군은 내 직장동료였던 복태의 남편이다. 재밌는 건 복태는 직장동료처럼 느껴지는데 한군은 웬지 사위 같아서 이것저것 맛있는 걸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다. 두 사람은 뮤지션이다. 세 아이를 기르면서 예술을 한다는 것, 예술을 하면서 세 아이를 키운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한군은 잘 사는 청년인 듯 한데, 예술과 육아, 그게 가능할까?
굵직하게 하는 작업들이 너무 많았어요. 일단 예술인복지재단에서 하는 파견예술인 사업을 했어요. 파견예술인 사업은 예술인들과 기업, 기관이랑 매칭을 해서 그 기관이 가지고 있는 이슈, 문제점, 개선하고 싶은 점을 풀어나가는 거예요. 5월부터 10월까지 활동을 하는데 한 달에 120만원의 활동비를 지원해줘요. 복태랑 저는 구로문화재단에서 활동을 했어요. 구로문화재단에서 우리에게 원한 건 조직역량강화였어요. 먼저 고민을 했죠. 구로라는 지역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니까. 구로는 일단 노동 이슈의 역사가 있는 곳이잖아요. 구로공단, 여공, 가리봉 오거리, 가리봉 시장 이런 키워드들이 있더라구요. 그 키워드들을 조사하던 중에 1970년대 구로에서 공장을 다니던 여자노동자들, 일명 ‘공순이’ 라 불렸던 이들에게 가장 핫한 여가생활 중에 하나가 음악다방이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옛날에 다방이었던 현장도 가보고 당시 유행했던 노래들도 찾아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어떻게 보면 문화재단 직원들이 지금의 구로 노동자들이다. 新구로노동자. 그래서 ‘구로음악다방’ 이라는 디제잉 프로젝트를 기획했어요. 이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격주로 음악다방을 열어야겠다, 점심시간에 밥 먹고 한 시간 반 정도 해피하게 놀 수 있게. 5, 6, 7월은 리서치 하고 8월부터 본격 진행했죠. 다방처럼 꾸미고 차도 준비하고, 대추차, 율무차, 쌍화차 이런 거 준비해서 복고 느낌 나게 하고, 신청곡도 받고 사연도 읽고. 구로음악다방이라는 타이틀로 활동을 했어요. 8, 9, 10 3개월간 다섯 번 정도 다방을 열었어요. 그렇게 10월달에 끝내는 프로젝트인데 너무 재밌어서 후속작업을 한 거예요. 아무도 안 시켰는데 우리가 한 활동을 아카이빙하는 전시를 올렸어요. 과정을 전시하는 게 아니고 잘 취합해서 전시형태로 포맷해서 올려야 하는 건데 엄청 일이잖아요. 으쌰으쌰 하는 분위기에 휩쓸려서 시작했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하지 말 걸, 하는 마음이 열 두 번도 더 생겼어요. 근데 정말 재밌게, 예술가로서 되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였어요. 저는 공연예술 하는 사람이잖아요. 무대 위에서 실시간으로 나의 예술을 보여주고 전달하는 건데 전시는 완전히 다른 장르더라구요. 전시장이라는 무대에다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셋팅해서 전시 언어로 올린다는 건 완전 다른 세계고 다른 맛인 거예요. 전시는 전시대로 되게 재밌었어요. 시트지에 텍스트 뽑아서 붙이고. 내 꺼 완전 멋있어요. 장난 아니에요. 노트북 가져올걸.
아쉬워하던 한군이 핸드폰을 꺼내 보여준 전시 사진에는 1964년 구로공단 착공식 대한뉴스부터 1989년 구로동맹파업의 역사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제대로 예술하는 인간들, 은 언제나 싱싱하다. 넓어지고 깊어지는 중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 을 만나는 일은 늘 경이롭다. 구로동맹파업, 어렵고 딱딱하고 무서운 이야기일 거 같은 역사적 사건이 한군의 전시에서 경쾌하고 명랑하게 되살아난다. 그렇다고 한군이 이 사건의 표면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책과 자료 뿐만 아니라 전대우어패럴 사무국장 강명자씨를 인터뷰하는 등 당시를 재구성하고 재현하기 위해 그가 한 공부는 만만치 않다. 경쾌함과 명랑함은 본질을 이해하고 바닥에 닿은 후 햇빛이 반짝이는 수면을 향해 올라올 때 마음 속에서 퐁퐁 솟아나는 감수성이다.
DJ로서 구로의 과거와 현재를 만났잖아요. 시대적인 변화와 음악적인 변화는 같이 가요. 당대에 알려진 음악이 있고 알려지진 못했지만 주옥같은 음악도 많잖아요. 디제이라는 포지션은 그런 음악들을 제안하고 알려주는 사람인 거고. 그래서 전시를 그렇게 기획했어요. 그 당시 알려진 음악들을 빙산의 일각처럼 위쪽에 배치를 하고 그 아래 쪽에는 알려지지 못한 주옥같은 음악들을 배치한 거죠. 위쪽 벽에는 1960년대부터 2000년대 까지를 상징하는 이미지들을 엮어 콜라주 작업을 했어요. 제가 이미지 작업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뽑기기계를 통해서 랜덤으로 음악을 뽑아서 음악을 듣게 하는 거예요. 선곡은 제가 했죠. 이 뽑기기계가 저의 분신인 거예요. 구로와 시대를 음악으로 훑어보는 작업. 아, 복태는 구로문화재단 사람들의 타로를 봐줬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의 이야기, 고민들을 키워드로 전시를 했어요. 영상작업도 했는데 타로카드의 상징을 카레로 풀어낸 영상작업이에요. 프로젝트 끝내고 10월에 마무리 공유회를 했는데 그때 가상의 식당을 열었거든요. 미술 작업하는 친구가 G밸리 지도 모양을 형상화한 테이블을 만들고 그 테이블로 구로문화재단 전직원들을 초대했죠. 메뉴는 카레, 타로카드에서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색이 노랑색이라는 점에서 착안했죠. 카레를 만드는 과정을 타로카드의 텍스트와 연결해 풀어내는 걸 영상으로 찍어 전시장에서 계속 상영하고 있어요. 이걸 12월 중순에 정신없이 셋업하고 올리는데 와중에 이음이가 독감에 걸리고, 하지만 우리는 일을 해야 하니까 애들을 장모님댁에 맡기고, 5년 만에 음원을 준비하고, 녹음 뿐만 아니라 뮤직비디오도 준비하고 그래서 촬영하는 분, 무용하는 분들도 섭외하고, 날짜 다 조율해서 맞춰서 밤 9시에 만나서 새벽 2시까지 촬영하고. 애들 다 맡기고,
반갑다. 5년 만에 드디어 ‘복태와 한군’의 싱글이 나왔다. 잠시 이야기를 미뤄두고 음악을 듣는다. 기타와 첼로와 목소리. 복태의 목소리는 깊어지고 서늘해지고 온후해졌다. 한군의 기타는 복태의 목소리를 인도하고 지지하고 힘을 보태고, 품는다. 복태의 목소리, 그 질감과 농담과 파고를 가장 잘 이해하는 연주가 이어진다. 복태가 어디로 갈지 한군은 이미 알고 있고 한군이 어디로 갈지 복태도 알고 있다. 두 사람은 하자센터에서 만났다. 복태는 여행학교 로드스꼴라의 교사였고 한군은 유자살롱의 멤버였다. 10년 전이다.
푸른꿈 학교 졸업하고 하자로 왔어요. 보통 기타 쳤으면 대학 가던지 그럴텐데 전 수능도 안 봤고. 왜 우리 엄마아빠는 열 아홉 나한테 아무것도 안 물어봤을까요. 보름 정도 우울하게 짱 박혀 있다가 우연히 인터넷에서 ‘청춘사용설명서’라는 책을 발견하고 주문했어요. 20대 청년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먹고사는 이야기를 담은 책인데 그 책에 라퍼커션의 호영이 있었어요. 그때 되게 인스피레이션(inspiration-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번득이는 착상이나 자극) 됐어요. 마침 학교 다니면서 또라이짓 같이 했던 친구가 서울 가서 퍼커션 배울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서울에 가야할 것 같은데, 해서 서울로 왔어요. 엄마 아빠한테는 서울에서 재밌는 거 하고 오겠다고 하고. 그때 남산 해방촌에 ‘빈집’이라는 공동주거주택이 있었는데 하루에 6천원만 내면 됐어요. 거기서 지내면서 초창기 라퍼커션을 같이 했어요. 첫 서울살이는 되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라퍼커션 멤버들이 너무 끈끈해보여서 못 낀다는 자괴감도 있었고. 그 당시에는 술, 담배도 안했고. 그래서 몇 개월 하다가 그만 뒀어요. 관계 맺는 것도 어렵고 바깥 생활이 너무 어려웠어요. 그래도 집에 내려가진 않고 홍대 근처 ‘나비’ ‘오백’ 이런 뭔가 데카당스한 소굴에서 밤새 늘어져서 음악 듣다 첫차 오면 집 들어가서 자고 해지면 다시 나오고 하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데 전화가 왔어요. 푸른꿈학교에서 제가 스승으로 여기는 선생님이셨는데 하자센터라는 데가 있다, 거기 음악하는 데가 있다는데 가봐라,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갔어요. 그때 307음악클럽이라는 게 있었어요. 유자살롱의 초기 모델.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뭐라도 하자 뭐 그런 분위기였죠. 말할 것도 없이 나에겐 너무 좋은 커뮤니티였죠. 그런데 거기서 본격적으로 음악하는 회사를 차리더라고요. 다시 스승으로 여기는 선생님한테 연락이 왔어요. 거기 취직해보는 게 어떻겠냐. 우리 스승님은 어떻게 그 시골 구석에서 서울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알고 있었을까요. 어쨌든 찾아가서 저 307음악클럽 하고 있고 기타도 치니까 취직시켜 주세요 했어요. 생애 처음으로 면접과 오디션을 봐야하는 순간이 온 거죠. 오디션을 봅시다 해서, 그때 처음으로 자발적인 공부를 시작했어요. 뭔가 저 깊은 곳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올라오더라구요. 면접 준비로 수업 커리큘럼을 만들었어요. 기타를 가르치는 기획안을 만들었어요. 면접장에 그거 가져가서 가르쳤더니 너무 쉽고 재미있게 잘 가르친대요. 그래서 계약서를 쓰자 이렇게 된 거죠. 스무 살에 독립, 을 하게 된 겁니다.
당시 하자센터는 사회적기업 인큐베이팅을 맹렬하게 하던 시기여서 한 개성 하는 청년들로 넘쳐났다. 트래블러스 맵, 이야기꾼의 책공연, 영화제작소 눈, 유자살롱, 브라스통 등 우렁우렁한 에너지가 모이는 공간이었다. 그 중에서도 유자살롱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사회적기업이었다. ‘유유자적한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와 음악이 흐르는 공간을 만들어 갑니다’ 그들의 캐이프레이즈였다. 유자살롱의 주요 사업 중 하나는 학교를 자퇴한 뒤 집안에서만 지내며 사회와 고립된 아이들을 불러내 함께 음악을 하고 밴드를 만들어 무대에 세우는 것이었다.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던 아이들이 ‘음악하는 형’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사회성을 회복하기를 바라며 진행한 프로젝트였다. 한군은 ‘음악하는 형’ 중의 한 명이었다.
너무 재밌었죠. 음악 하는 사람들이랑 같이 일한다는 것 자체가 되게 좋았어요. 출근하는 길이 놀이터 나가는 길이었어요. 어디 갈 데가 있다는 것도 너무 행복했고. 가니까 내가 너무 좋아하는 일로 사람들을 가르칠 수도 있고. 근데 돈도 줘. 진짜 좋았어요. 그때 가르치는 기술, 커리큘럼, 자료, 이런 것들을 엄청 고민하고 만들어서 축적을 시켰죠. 어른도 가르치고 아이도 가르치고 다양한 연령에 맞는 교수법을 정리했어요. 20대 초반에. 적절한 시기에 저에게 나타난 꿈의 터전이었던 거죠. 대학보다 훨씬 나았다고 저는 지금도 생각해요. 저는 대안학교 나온 철부지 나부랭이였는데 저랑 같이 음악하는 사람들은 다 대학 나오고 실용음악과 나오고. 근데 그런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이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게 했어요. 이론을 가르치는 건 지금도 힘들어요. 하지만 그걸 가지고 재밌게 놀아 보는게 중요한 거잖아요. 근데 그건 제가 제일 잘 할 수 있으니까. 하자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저한테 배우고 싶어 했어요. 그러다가 제 인생에서 두 가지 큰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 중 하나가 복태를 만난 거예요. 하루는 친구가 생일파티를 ‘오백’에서 열었는데 저는 거기에 축하 노래하러 갔고 복태도 어떤 이유에선지 그 자리에 왔어요. 복태는 이미 인디씬에서 노래를 하고 있는 가수였어요. 복태는 제 노래를 듣고 저렇게 노래하는 사람이 있다니, 저렇게 기타치는 사람이 있다니, 했대요. 저도 복태의 공연을 보고 굉장히 반했어요. 저렇게 음악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라고 생각했죠. 사람 만나는 거 힘들어하는 편이라 제 노래만 하고 나왔는데 웬지 뭔가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다시 돌아갔어요. 그때 복태가 저한테 와서 같이 음악을 하자고 했어요. 그 날 밤 ‘복태와 한군’이 결성되었죠. 둘이 공연을 한 달에 한 번씩 하는데 그러면 연습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자꾸 밤늦게 연습 스케쥴을 잡는 거에요. 이야기하고 연습 하다보면 자꾸 막차가 끊겨. 그렇게 자연스럽게 걸어서 양화대교를 건너게 되고. 그러다가 코가 꿰였죠. 그렇게 연애를 하기 시작했고 그 사람을 통해서 많이 배우고 서울사람이 되어 간 거죠. 지하철 타는 법, 버스 타는 법 이런 거 배웠어요. 되게 큰 버팀목과 지지가 됐어요. 아무것도 없는 제 삶에. 동시에 또 한 가지 중요한 일도 생겼어요. 유자살롱에서 ‘유유자적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이 이야기는 제가 푸른꿈 학교 다니던 시절로 거슬로 올라가는데요. 그 시절 제 스승님의 친구분인 신희경선생님이란 분이 서울에서 심리상담소를 운영하셨는데 제가 기타를 친다는 소식을 듣고 음악을 좋아하는 은둔형 외톨이 청소년이랑 저랑 매칭을 시켜줬어요. 그 친구랑 일주일에 한 번 음악으로 대화를 하고 채팅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유자에 취직을 하고나니 그 친구를 여기에 데리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다행이 그 친구가 용기를 내서 집 밖으로 나왔고 저한테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고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하자를 오가는 친구가 되기 시작했어요. 이 케이스를 본 유자살롱 스텝분들이 그런 친구들의 사례를 조사하고 모집해서 3개월간의 코스를 만들어서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한 기수에 15명 내외 모집해서 음악으로 소통하고 세상과 마주하게 하는 과정을 하게 된 거예요. 어렸을 때는 음악이라는 게 발산의 도구였다면 하자에 와서는 음악의 기능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음악이 즐거울 뿐만 아니라 치유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겠구나, 놀라운 전환이었어요 저에겐. 회복된다는 건 거창한 말이고 그냥 정말 재밌었죠. 아이들이랑 운동장 가서 놀고. 같이 일하던 강사들도 되게 치유가 됐던 거 같아요. 세상에는 문제 많은 어른들도 많잖아요. 유자살롱의 멤버들도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 치유되기도 하고, 저도 정말 많이 배우고.
자신이 가진 재능이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복구하는데 쓰일 수 있다는 경험을 그는 이른 나이에 했다. 인간에 대한 통찰과 애정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청소년의 스펙트럼을 워낙 넓게 설정해둔 까닭에 그 역시 후기청소년으로 분류될 수 있는 나이였지만 그는 긴 다리로 성큼 어른의 세계로 이행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세상에는 내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어른이 된 한군은 복태와 함께 새로운 노래를 만들기 시작한다. 오노 요코와 존 레논처럼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사랑만 하면서 살아도 될 것 같았다. 아니 사랑만 하고 살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았다.
모든 것을 그만두고 떠나자! 해서 복태도 로드스꼴라 그만두고 저도 유자살롱 그만두고 진안에 내려갔어요. 빈집이 하나 나왔는데 거기서 살아도 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무작정 내려가 살았죠. 거기서 흙의 왈츠를 만들었어요. 실업급여 받으면서. 텃밭도 가꾸고 노래도 많이 만들고. 진짜 시골이었어요. 먹을 게 없어서 집 앞에서 쑥 캐서 튀김 해먹고. 봄나물 뜯어서 밥 비벼먹고.
그 시기에 나온 노래가 흙의 왈츠다.
복태와 한군 - 흙의 왈츠 https://youtu.be/ryu_yG-XCq0
저는 시골사람이니까 그런 게 너무 그리웠어요. 텃밭 가꾸면서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아빠가 목사님인데 생태적 공동체, 농촌 목회에 뜻을 가지고 계셨어요. 그래서 저는 자연스럽게 시골에서 자랐죠. 전주에서 태어났지만 임실, 오수, 남원, 운봉,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자랐어요. 마을이 워낙 외떨어져서 눈 와서 버스 못 오면 학교 안 가고. 우리 학년은 저 포함 3명 밖에 없었어요. 이미 거기가 대안학교였죠. 그 어떤 학교보다 자유롭고 지원도 많고 직원도 많고. 학교 끝나면 뒷산에서 풀 베다가 염소, 거위, 칠면조에게 주고. 마당이 굉장히 넓은 폐교를 얻어서 아빠가 문화살롱처럼 운영를 했어요. 잔디밭이 다 내 꺼였어요. 비오면 옷 벗고 뛰어놀고, 산에서 음악 들으면서 따라 부르고. 락, 헤비메탈 엄청 들었어요. 그때부터 기타를 치기 시작했죠. 티비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거의 숲에 방목된 상태였어요. 할 게 뭐가 있었겠어요. 아빠가 기타치는 거 보고 어깨 너머로 배웠죠. 그전부터 음악을 좋아하긴 했어요. 초등학교 때 한영희, 송창식, 마이클 잭슨, 장사익의 노래를 들었죠. 엄마가 들었던 노래들인데 그냥 곁에서 들었던 거죠. 어떤 음악적 씨앗이 있었던 거 같은데 이게 기타를 치면서 발아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시골학교에서 밴드하겠다고 장비 사달라 해서 노래 부르고 공연도 하고. 지금도 저는 언젠가 시골로 가겠다, 라는 목표가 있어요.
한군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꽃밭이 생각났다. 엄마의 꽃밭. 해마다 봄이면 모란과 작약이 피어나고 여름이면 붉은 장미가, 가을이면 노란 하얀 보라, 가지가지 종류의 국화로 환하던, 겨울이면 사철나무 위로 하얗게 눈이 쌓이던 엄마의 꽃밭. 시골에 가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은 없지만 언젠가 반드시 내 꽃밭을 갖고 싶다. 그 꽃밭엔 꼭 자주빛 모란과 분홍빛 작약을 심을 거다. 내 기억의 원천이고 내 감수성의 고향이고 내 글의 시원 같은, 엄마의 꽃밭. 한군 예술의 근원은 아마도 숲과 비와 안개와 산봉우리, 길가의 풀꽃들, 오리, 메뚜기, 잠자리, 단풍, 별과 달, 바람, 회오리, 눈꽃, 흙, 시냇물, 송사리, 어쩌면 세상의 모오든 아름답고 정교하고 멋진 것들.
그런데 지음이가 생겼어요. 그때부터 제가 할 일은 책임 지고 결혼을 해 내는 것이었어요. 지난한 싸움의 시작이었죠. 양가 부모님들의 반대. 제 쪽은 여자 나이가 너무 많다, 그건 사랑이 아니다, 너는 대학도 안 갔고, 군대도 안 갔고, 아직 품 안의 자식인데 보낼 수 없다, 결혼은 이르다, 뭐 등등. 복태네 집에선 완전히 그 반대였죠. 재밌는 건 말은 똑같은데 해석은 다르게 되는 거죠. 대학도 안 나왔다, 군대도 안 갔다, 나이가 어리다가 우리 집과 복태네 집에서 다른 뉘앙스로 이야기 되는 게 지금 생각해도 웃겨요. 그 와중에 다행이었던 건 그나마 장인어른이 저를 좋게 보신 거예요. 복태네 집을 많이 왔다갔다 했는데 그 시간 동안 저를 지켜보셨던 거죠. 장인어른이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결혼하는 건 문제가 없다, 너희가 잘 헤쳐나가리라 믿는다, 다만 우리 집은 천주교 집안이니 네가 개종을 해와라. 목사님 아들한테.(웃음). 결혼 하지 말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이죠. 이걸 조율하는데 한 달의 시간이 걸렸어요. 매일 울고 매일 작전을 세우고 다른 가족들 설득하고. 모진 폭풍을 뚫고 뚫어서 장인어른이 보좌하던 신부님이 같은 하나님 섬기는 건데 뭐하는 짓이냐, 결혼식 같이 하자 해서 결국 성사가 되긴 했지만 그러고도 갈 길이 구만리였어요. 첫 상견례는 깽판이 나고 두 번째 때 간신히 대타협을 이루어서 1부는 기독교식, 2부는 천주교식으로 하겠다, 근데 또 장소는 어떻게 할거냐, 교회냐, 성당이냐, 결국 성북구청에서 하기로 합의를 봤어요. 1부는 천주교식, 2부는 기독교식, 3부는 뮤지션들이랑 같이 하는 루프탑 파티. 투쟁과 협상과 설득 끝에 승낙은 났지만 문제는 또 있었어요. 양가로부터 한 푼도 안 받고 결혼하자고 결심했기 때문에 결혼자금이 없었죠.
그리하여 ‘은혜 갚을 결혼식’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텀블벅 펀딩을 한다. 텀블벅(tumblbug, 쇠똥구리라는 뜻의 영어)은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중 하나로 독립적인 문화창작자들을 지원하는 소셜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이다. 그러니까 한군과 복태는 결혼을 예술의 장르로 끌어들인 것이다. 180만원이 목표였는데 400만원이 모였다. 그 결혼식의 타이틀이 ‘은혜 갚을 결혼식’이었다. 당시 텀블벅 프로젝트에 나온 글이다.
복태와 한군의 '은혜갚을 결혼식'은 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베푸는 결혼식'이다. 은혜를 갚을 수밖에 없는 결혼식인 것이다. 다행히도 인생을 잘못 살지 않은 두 사람은 그동안 주변에 좋은 인덕들이 제법 쌓여있었고, 하여 그 좋은 인덕들이 두발 벗고 나서 선뜻 그들을 도와주기로 한 것이다. 일종의 품앗이처럼. 일러스트를 하는 친구가 청첩장에 들어갈 그림을 그려주고, 디자인을 하는 친구가 청첩장 디자인을 해준다. 사진을 찍는 친구가 웨딩사진을 찍어주겠다 한다. 한군이 몸 담았던 '유자살롱'에서는 피로연에서 진행될 공연의 모든 진행을 맡아주기로 한다. 음향장비 및 스텝을 선뜻 제공받게 된 것이다. 이 공연에는 친구 뮤지션들이 축하의 의미로 선뜻 축가를 부르러 와준다. 복태와 함께 독립잡지를 만들고 있는 작가들은 피로연에서 보여 줄 '복태와 한군의 연애사' 연극을 준비한다. 그리고 복태와 한군이 이들에게 지불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은혜인 것이다.
복태와 한군은 최대한 환경을 해치지 않을, 자신들로 인해 많은 쓰레기가 발생되지 않을 결혼식을 꿈꿨다. 이왕 사는 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면 좋은 거니까.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친환경 결혼식, 에코웨딩'이었다. 뭔가 그럴싸해보이지만 사실 별 거 아니다. 결혼식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를 줄이는, 최대한 아끼는 결혼식. 자연을 해치지 않을 요소들을 활용하는 결혼식. 하여 복태와 한군은 에코웨딩을 하고 있는 '대지를 위한 바느질'의 도움을 받기에 이르른다. 그들은 이곳에서 100% 자연분해되는 '웨딩드레스'와(한지와 옥수수전분으로 만든), 유기농부페를 선택했고 '대지를 위한 바느질'과 함께 최대한 줄이는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다. 최대한 줄이고 최대한 도움 받는 결혼식이 바로 친환경 결혼식인 것이다.
정말 많은 은혜와 응원과 지지를 받았어요. 되게 재밌는 건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를 응원해주고 지원해주고 심지어 결혼식에 온 거예요. 이런 삶이 있다는 것에 용기를 얻었다는 메일도 받았어요. 그렇게 결혼식을 올리고 그 리워드를 갚아 나가느라 복태는 임신 8개월인데 매일 팥 삶아서 양갱 만들고 보내고. 신혼여행을 오키나와로 갔는데 복태는 천식이 오고. 어쨌거나 망원동에 첫 보금자리를 얻어서 지음이 출산하고 자리를 잡았죠. 저는 다시 유자살롱에 취직해서 강사를 하고. 그렇게 큰 사건들이 마무리되고 다시 삶을 꾸리는 시간들이 시작되었어요. 결혼식 때 받았던 응원과 지지는 아직도 우리 두 사람 안에 온기로 남아있어요. 우리가 보시를 하면서 계속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갖는데 엄청 큰 동기가 됐죠. 우리 큰 삶의 주제이기도 하고. 보시하는 삶.
한군과 복태의 신혼집에는 아마존이 있었다. 테라스에 작은 상자텃밭을 일구면서 각종 허브와 가지가지 야채를 심어두고 그곳을 일러 아마존이라 불렀다. 첫아기 지음이를 안고 그들은 매일 아마존을 드나들었다. 마음에 아마존을 품고 사는 사람들, 집이 아무리 작아도 테라스 따위가 좁아도 그들의 영혼은 거대한 원시림에 닿아 있고 지구의 허파와 함께 호흡하며 살고 있다. 삶의 매 순간을 창의적으로 사는 사람들, 위기와 절망의 상황을 예술적으로 관통하는 사람들, 슬픔과 좌절의 순간을 응시하며 노래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 가운데 한군과 복태도 있다.
사실 지음이는 생각도 안 했어요. 임신 사실을 알고 껴안고 울고 서울역에서도 울고 버스정류장에서도 울고 지하철에서도 울고. 진짜 둘이 방황했어요. 그 와중에도 책임을 지고 애기를 잘 키우자, 내 청춘을 육아에 바칠 테니까 같이 해보자, 라고 속으로 다짐했던 게 생각나요. 지음이 태어났을 때는, 울었죠. 너무 경이로워서. 첫 아이 때는 조산원이란 걸 몰라서 산부인과에서 낳았는데 진짜 최악이었어요. 형광등과 쇠침대와 산모를 대하는 태도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둘째 때부터는 조산원에서 애기를 낳기 시작했죠. 우리가 원하는 음악, 원하는 분위기 속에서 애기를 낳으니까 편안하더라고요. 조산원은 아빠에게도 너무 좋아요. 애기 낳는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고 손을 잡아주고. 둘째 때도 또, 대성통곡을 했어요. 애기가 나오는 장면은 너무 놀라워요. 다짐하죠. 잘하고 싶다. 같이 잘 놀고 싶다. 친구가 하나 새로 오는 거잖아요. 받들어 모셔야 할 친구분이 저 멀리서 오는 건 너무 경이로운 일이죠. 초반엔 내가 돌보고 키우겠지만 얘네가 크면 나보다 훨씬 대단해질 거고. 영혼의 나이로는 저보다 더 많은 억겁의 윤회를 했을지도 모르는 거고. 일단은 어린 몸으로 태어났으니까 그 친구들이 자랄 때까지 돌봐주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애기들은 씨앗이잖아요. 그 씨앗이 좋은 땅에서 잘 싹을 틔우고 성장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뿐이죠. 그들 생에 개입하거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애들한테 짜증 엄청 내고 화 엄청 내요. 너는 왜 옷을 안 입는 거야, 밥은 앉아서 먹어야 한다 뭐 그런 일 가지고. 놀라운 건 이음이랑 저랑 성격이 상극이거든요. 그런데 소름 돋는 게 음악 듣는 취향이 저랑 너무 똑같아요. 내가 느꼈던 감동의 포인트를 그대로 얘기하는 거예요. 짜장면을 먹다가 아빠, 이거 소리 들어봐, 소리 되게 좋지 장난 아니지, 이래요. 내가 어렸을 때 느꼈던 것들을 그대로 느끼는 거예요. 그게 너무 신기해요. 나한테 있던 어떤 코어가 이 친구한테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정말이지 놀라워요. 괜찮은 친구들인 거 같아요. 지음이도 훌륭해요. 얼마 전에 제가 연극 작업 때문에 먼저 나가고 복태가 짐을 챙겨서 합류하는 일정이었는데 제가 중요한 모자를 놓고 나갔어요. 복태가 정신없이 짐을 챙기는 와중에 지음이가, 이거 아빠 모자인데 이거 필요할 거 같으니까 가져가, 해서 챙겨 보낸 거예요. 어떻게 알고. 마음이 텔레파시로 간 것처럼. 어떨 때는 제가 아이들한테 보살핌과 챙김을 받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 전환도 놀라워요. 지음이는 보음이를 같이 돌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지음이한테는 제가 줄 수 있는 모든 걸 다 줬다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런지 지음이는 사랑이 많아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온기가 있고 애정이 있고 사고가 유연하고. 아님 말고 이런 태도. 제가 고등학교 때 배웠던 중요한 키워드였거든요. 아님 말고. 좀 가볍게 살 수 있는 키워드잖아요.
1991년생, 올해 나이 만 28세. 한군이 생명에 대해 갖는 생각이다. 한 아버지가 자신의 자식들에 대해 갖는 철학이다. 아랫배가 따뜻해진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 를 알 것 같다. 지음이와 이음이와 보음이는 스스로를 살리고 이웃을 살리고 뭇생명을 살리는 사람으로 살아갈 거 다. 한군 같은 사람을 아버지로 두어서. 그는 고결하지 않고 숭고하지 않지만 맑고 자유롭고 근사하다.
연애초기에는 갈등이 생기면 내가 미안하다 했는데 살다보면 그게 안 되잖아요. 이십대 중반 들어 자아가 생기면서는 복태한데 막 대들었죠. 남들 다 십대에 생기는 자아가 저는 이십대 중반에 생기더라구요.(웃음). 와 씨 이건 아니다, 너무 불공정하다, 자기는 다 하면서 내가 하면 다 안 되냐, 내가 사소한 거까지 다 컨트롤 당해야 하나, 복태의 시스템을 벗어나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죠. 난 그게 싫어, 난 이걸 해야겠어, 화도 내고 소리도 지르고, 마침내 합의를 보기까지 지난한 시간을 들였죠. 지금은 대화로 잘 푸는 편인 거 같아요. 저희 두 사람 다 어쨌든 종교의 자장 안에 있고 요가를 공부하잖아요. 사실 생명이란 게 거대한 우주 안에서는 아주 작은 존재잖아요. 우주의 흐름과 질서 안에서 서렌더 surrender, 그냥 맡기는 거죠. 포기하는 게 아니라 어떤 거대한 흐름에 내맡기는 거예요. 너무 힘주면 될 것도 안 되잖아요. 힘을 좀 빼고 사는 거죠. 그렇게 자연스럽게 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잘 살아지는 거 같아요. 저희는 공연자들이나 보니 성수기, 비수기가 있잖아요. 방학 때는 보릿고개고 봄 지나서야 돈이 좀 들어와요. 몇 년을 살다보니 패턴이 보여요. 얼추 통계가 있으니까 우리는 매순간 최선을 다할 뿐인 거죠. 순간을 열심히 살아가면 내년에도 좋은 인연들이 오지 않을까 그런 믿음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요. 물론 우리도 불안하고 예술가로서의 고뇌가 있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두는 거죠. 마음 속에서 이런 게 작용하는 거 같아요. 우리는 뭔가 큰 흐름 안에 있고 보살핌 받고있다는 믿음. 예수도 짱이고, 석가도 짱이고, 다 우리 스승이고 그런 분들이 도와주지 않겠어, 그런 믿음이 있어요. 아이들에게 종교를 넘어선 통합적 영성을, 어떤 느낌을 찾아갈 수 있게 같이 향도 피우고, 요가도 함게 하고. 밤마다 복태가 만트라를 읽어줘요. 이음이는 이제 다 외웠어요.
살아보니 생의 동력은 내 부모가 생후 5년 동안 날 키웠던 사랑, 으로부터 나온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 가장 그윽하게 날 쳐다보던 엄마의 눈, 그 눈빛이 내 살을 만들고 뼈를 키우고 근육을 늘려나갔다. 내 육신에 영혼을 깃들게 하고 자존감을 만들어주고 갈 길을 정해주었다. 나는 엄마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외롭다고 느꼈다
눈물이 흘렀다
아이를 바라보았다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고요히 잠에 빠져드는
고요히 잠을 맞이하는
그 맑은 얼굴을 마주하니
눈물이 멈췄다
복태와 한군 - 아이를 바라보았다 (piano 홍혜림) https://youtu.be/KV-YUIJ1pJ0
‘아이를 바라보았다’, 복태와 한군의 새 앨범에 나오는 노래다. 피아노와 보컬로만 이루어진 단순하고 담백한 노래인데 듣고 있노라면 인류가 쌓아온 켜켜한 시간의 결이 느껴진다. 슬픔이란 말 속에 배어있는 삼라만상, 행복이란 말 속에 녹아있는 눈물과 한숨과 비탄, 그런 걸 아는 사람들이 만들고 부르는 노래, 인 거 같다.
고민이 많았어요. 우리가 뮤지션인가, 애만 키우고 있는 게 아닌가, 다른 뮤지션들이랑 소통을 하나, 우리가 음악에 투자하고 몰입을 하나 등등. 공연을 해도 계속 하던 거 빠듯하게 준비해서 올리고. 음악에 집중하지 못했던 거죠.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기타 레슨을 하거나 예술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건 재미있긴 하지만 사실 생계를 위한 것이기도 하죠. 복태와 저의 가장 근원적인 정체성은 뮤지션이예요. 노래를 만들고 공연을 하지 못하면 무얼 하든 허기가 있어요. 그런데 최근 몇 년간 그걸 제대로 못한 느낌이 있었어요. 투덜거리기만 하고. 위기의식도 생기고 좌절도 했죠. 자꾸 누구랑 비교하게 되고. 누구는 매진되었다는데 전국투어를 돌았다는데 온스테이지 나왔다던데. 그런 생각들에 시달리는 거예요. 소속사에 들어가야 하나, 마케팅과 이미지 메이킹 그런 것들이 있어야 하나, 소속사에 어플라이 했다가 까이면 쪽팔려서 어떡하지, 뭐 그런 고민들을 5년간 계속 했어요. 올해 11월에 음원 작업 들어가면서 느꼈어요. 이렇게 해야 하는 거구나. 연습 엄청 열심히 했거든요. 이렇게 해야 한다. 뮤지션으로서의 시작은 이제부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동안 좀 안일했던 거 맞아요. 다른 뮤지션들이랑 협업하고 긴장하고 자극받고 그러면서 우리 음악을 해나가야죠. 음원 작업 하면서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면서는 엄청 쫄았어요. 모르는 엔지니어 앞에서 식은땀 흘리면서 눈치보고. 우리 둘 다 쫄보거든요. 우리 음악 구린가, 너무 아이 얘기만 하나, 근데 우린 부모잖아 이게 우리 얘기인데 어떡해, 뭐 그러고 있는 우리를 보는 거죠. 사실 이번 음반은 뮤지션으로서 우리들의 존재를 우리 스스로에게 증명을 하는, 작업이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만들어내고, 어디에 내놓아도 창피하지 않고. 이제 자신감이 좀 생기죠. 극복이라고 해야 할까. 무수히 많은 시간이 걸려서 우리 음악이 나오고 있는 거라 생각해요. 5년간 음악가로서 정체되어있다는 느낌 때문에 너무 괴로웠는데 우리 스스로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둘이서만 했다면 힘들었을텐데 주변 뮤지션들하고 협업을 많이 했어요. 특히 김목인씨가 계속 조력해주셔서 힘이 됐어요, 목인씨도 애기 아빠니까 애기랑 같이 와서 함께 수다 떨고. 그렇게 하다보니 힘을 받아서 진행됐거든요. 그래서 고립되면 안 되겠구나, 계속해서 다른 뮤지션들을 만나고 함께 작업해야겠구나 생각하고 있어요. 뮤직비디오 작업도 재밌었어요. 사실 이 뮤직비디오가 발표된 건 저희한테 엄청 큰 사건이예요. 촬영 하루 전날에야 처음으로 다 같이 모였어요. 모두 같은 빌라에 사는 사람들인데 촬영감독도 무용하는 쌤도 모두 육아하는 사람들이라 다 애기 맡기고 밤에 찍었어요. 너무 재밌었어요. 아이 키우는 사람이 공감하는 노래였기에 가능했어요. 거의 뭐 3층짜리 빌라 하나가 통째로 크루가 되어서 앨범 만들고 뮤직비디오 찍었다고 보시면 되요. 앨범 자켓도 1층 아빠가 찍어줬고. 우주의 기운이 한데 모아져서 한여름 밤의 사건처럼 딱. 원테이크로 녹음했어요. 박자 안 맞추고 호흡을 주고받으면서.
한여름밤의 꿈, 연인들과 동네 사람들, 숲 속의 요정들이 떠들썩하게 꿈과 환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진실한 사랑을 위해 벌이는 한바탕 소동극. 사랑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걸 안다면 생은 축제와 마법의 시간이 되리라.
올해 했던 일 중에 ‘개러지(garage) 오케스트라’라는 걸 있어요. 문방구에서 파는 교육용 악기들 있잖아요. 조율 안 된 바이올린, 우쿨렐레 이런 걸로. 음악의 1도 모르는 중학교 애들 15명 데리고 오케스트라 해서 공연을 올렸어요. 울면 안돼, 전국 노래자랑, 악어떼를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편곡했는데 정말 뽕삘 나고 간지 안 나고 병맛인데, 거기에서 나오는 그 어떤 힘. 뭔가 없어 보이고 빈티나는데 애들은 엄청 진지하고 엄청 열심히 하고. 이걸 성북구 행사에 올린 거예요. 그걸 보고 멘붕을 한 거죠 성북구 담당 공무원들이. 이런 건 처음이니까. 근데 음악이 되고 충분히 들을만하니까 혼란스러운 거예요. 보통 청소년 음악교육은 뻔하잖아요. 하모니카 팀, 오카리나 팀. 그 뻔한 걸 다 깨부순 거잖아요. 다음에도 부르겠다고 하고 동네에서도 파급력이 생겼어요. 학교에서 배우는 음악 너무 재미없잖아요. 너무 어려운 느낌이고, 음악에 벽을 만들잖아요 오히려. 근데 아무것도 못해도 각자가 자기 맡은 파트에 충실하면 충분히 멋진 음악을 할 수 있게, 이론 같은 거 필요 없이 그렇게 콘텐츠를 셋업을 한 거죠. 내년엔 베토벤이나 스타워즈 OST를 해보려고요. 음악을 계속 가르치지만, 중요한 키워드는 음악은 졸라 재밌는 거다. 절대 어렵게 하지 않아도 음악을 행복하게 즐길 수 있다, 이게 핵심인 거죠.
한군은
마음껏 놀 줄 안다.
마음껏 살 줄 안다.
마음껏 사랑할 줄 안다.
사실 복태 칭찬을 많이 하고 싶어요. 대단한 것 같아요. ‘때때로 노답’인 나와 애 셋을 잘 건사하면서 가잖아요. 우리 집의 전반적인 큰 그림을 관장하고 경영해요. 그러면서도 엄마로서도 충분히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밤에 애들이 셋 다 저한테 와서 자기는 하지만.(웃음). 바쁜 와중에 모든 걸 컨트롤 하고 지령을 내리고 돌보고. 해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고. 제가 항상 존경하며 모시려고 하죠. 가끔 반항을 하긴 하지만(웃음). 동료이고 선배이고 연인이고 동지이고, 그런 거죠.
한군과 나눈 이야기는 일반적인 청년과의 대화와는 달랐다. 그는 누군가 설정해둔 청년의 컨셉이나 개념 따위 훌훌 벗어던져 버리고 ‘한군’으로 산다. 어떤 카테고리로도 그의 삶을 포획하거나 설정할 수 없다. 아마도 신의 친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에필로그
-주옥 같아서 버릴 수 없는 말
녹음이 제일 어려워요. 녹음은 박제하는 거잖아요. 다시 수정할 수 없어요. 한 번에 최상의 에너지를 담아야 하는 거죠. 그때의 우리를 기록할거야. 라는 마음으로 하면 되는데 욕심을 내려놓기가 힘들죠.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부분에 이 악기를 넣어볼까 계속 더해 보고 빼보고 하는 거죠.
좋아하는 시 중에 자기만의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는 삶이라는 그런 말이 나오는 시가 있는데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거창한 것도 좋지만 일단 내가 가꿀 수 있는 요만큼의 밭이라도. 정원을 돌보는 삶이란 얼마나 멋진가요.
[잘 사는 청년]
한여름밤의 꿈
-한겨레를 만나다
인터뷰어. 어딘
인터뷰이. 한겨레(한군)
녹취 및 정리. 박상희(조개)
글. 어딘
발행일. 2019.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