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딘의 우연한 연결 Oct 21. 2022

[어딘글방] 그해 봄 _ 남지

목요글방에서 만난 남지의 글입니다.


“아마도 2교시나 끝났을 거야. 담임선생님이 집에 가라고 하더라고. 학교에서 연락할 때까지 집에 계속 있으라는 거야. 며칠 동안 집에 있어야 하냐고, 시험은 언제 보느냐고 물어보아도 나중에 알려준대. 가슴이 두근거리더라. 갑자기 집에 가라더니 내일부터 학교에 나오지 말라는 것은 뭔가 큰일이 생겼다는 거 아니겠어? 아니면 앞으로 생기거나.”





그해 봄


남지


고백하자면, 나에게 그것은 헬리콥터 소리야. 뭐 타임머신 같은 거지. 어디선가 ‘타다다다다다다’ 하는 소리가 들리면 순간 단발머리 중학생이 되어 하늘을 올려다보지. 이어서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주소를 기억하는 그 집에서 총소리가 들리던 시내 쪽을 바라보게 돼.


그 전에는 시내 중심가에 있는 서동에서 살았어. 서동 집은 우리가 나주에서 광주로 올라와 일곱 번 이사 끝에 처음으로 산 집이었어. 골목에서 1m 정도 내려가는 깊은 집이었지. 6년 정도 지나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사고가 났어. 아버지가 전기공사 현장을 돌아보던 중 뒷걸음질 치다 1층에서 4m 아래 지하실로 떨어지신 거야. 다행히 심한 타박상만 입었을 뿐 부러진 데는 없었지. 아버지 사고로 엄마는 많이 걱정되셨나 봐. 설 새고 초사흘 신수를 보셨는데 이사 갈 수가 나와서 봄이 가기 전에 변두리에 있는 화정동으로 서둘러 이사 갔지. 차가 다니는 길가의 2층 양옥집이었는데 아래층은 세를 내주고 우리는 2층에서 살았어. 화정동 집에서 학교에 갈 때는 송정리에서 출발하는 5번 버스를 탔지. 양동시장, 금남로, 도청을 지나 도청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학교까지는 10분 정도 걸었어.


그해 10월에 대통령이 암살된 후 불안하며 조마조마했던 시간이 지나가고 이듬해 2학년이 되었어. 72명이 복작거리는 교실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 일 없는 일상을 보냈지. 그런데 중간고사를 앞두고 걱정스러운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어. 대학생들이 데모한다는 거야. 데모라는 말도 낯선데 본적도 없으니 상상이 안 됐어. 실감이 나질 않았던 것 같아. 시험을 앞두고 있었으니 그 고민이 더 컸지. 아무튼, 그 날 교실에선 대학가 근처나 시내에 살던 아이들이 구경했다는 데모 이야기로 꽤 웅성거렸어.

아마도 2교시나 끝났을 거야. 담임선생님이 집에 가라고 하더라고. 학교에서 연락할 때까지 집에 계속 있으라는 거야. 며칠 동안 집에 있어야 하냐고, 시험은 언제 보느냐고 물어보아도 나중에 알려준대. 가슴이 두근거리더라. 갑자기 집에 가라더니 내일부터 학교에 나오지 말라는 것은 뭔가 큰일이 생겼다는 거 아니겠어? 아니면 앞으로 생기거나. 교과서와 공책을 챙기고, 먹지 않아서 묵직한 도시락도 다시 가방에 넣었어. 옆 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복도 유리창 너머로 들려왔지. 가방과 책상 서랍을 정리하고 교실을 나서니 복도는 이미 아이들로 복잡하더라고. 교문을 나서서 정류장까지 가는데 근처 고등학교의 학생들도 많이 보였지.


한낮에 집에 가는 기분은 묘했어. 도로엔 버스만 몇 대 다닐 뿐이지 차들도 안 보였어. 버스 안은 조용했지. 도청을 지나고 금남로에 들어서자 거리에 서성이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어. 금남로 3가를 지나는데 대학생들이 계엄해제를 외치며 도청으로 가더라고. 데모를 보는 것은 처음이라 대학생들이 간 쪽으로 유리창에 얼굴을 붙인 채 고개를 쭉 내밀며 한참을 봤어. 버스가 출발하면서 시위대는 바로 눈앞에서 사라졌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는데 이젠 군용트럭이 도로 한가운데 갑자기 나타나더니 뒤 칸에서 군인들이 뛰어내렸어. 모두 동그란 철모를 쓰고 어깨에는 기다란 총을 멘 채 줄을 맞추며 제자리에서 쿵쿵 쿵쿵 구르다 도청 방향으로 뛰어가는 거야. 발맞추는 군화 소리가 그렇게 클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아스팔트 바닥을 힘껏 내딛는 소리가 버스 안까지 울려 나도 모르게 의자 손잡이를 꽉 잡았지. 버스가 양동시장 쪽으로 꺾어지면서 군인들은 눈앞에서 사라졌어.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면서 마구 뛰더라고. 데모하는 모습도 처음이었고 총을 든 군인들도 처음이었지. 하지만 군인들이 대학생들 뒤를 쫓아가는 것이 가장 무서웠어. 대학생들은 어떻게 되지? 군인들이 총을 들었는데. 잘못하면 죽겠구나. 그래서 집에 가라고 했구나. 가는 내내 너무나 걱정되었어.


화정동 집은 광주시 서쪽 언저리에 있었는데 집에서 5분만 걸어도 논밭이 보이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어. 그래서인지 주변에 군사 시설이 많았지. 길 건너에 장교 아파트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국군통합병원과 중앙정보부가, 송정리 쪽으로 3km 정도 가면 군사교육시설인 상무대가 있었어. 사격장도 가까워 평소에도 총소리를 많이 들었지. 영화에서 보는 것 같은 그런 총소리는 아니야. 먼 곳에서 들리는 총소리는 그냥 콩 볶는 거 같아.

그날부터 전화는 먹통이고, 라디오나 텔레비전도 안 나왔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었지. 금남로에서 보았던 군인들이 생각날 때면 불안하고 무서웠지만, 생각보다 조용한 일상을 보냈지.

  “난리가 나도 병원은 건들지 않는단다. 이편이나 저편이나 필요하기 때문이지. 어느 쪽도 여기서 일을 내지 않을 거다”

아버지는 국군통합병원이 옆에 있어 다행이라고 하셨어. 그래도 걱정되어 창문에는 이불을 걸었지. 총알도 이불 솜은 뚫지 못한다고 하더라고. 엄마는 난리가 언제 끝날지 모르니 쌀을 아껴야 한다고 밀가루를 큰 포대로 샀고, 간간이 밥 대신 수제비나 찐빵으로 끼니를 준비하셨어.


다음날부터 헬리콥터가 날더라고. 항상 여러 대가 줄지어 날았지. 한 번은 귀가 멍멍할 소리가 정도로 커서 세어보았는데 10대가 넘었어. 하루 이틀이 지났을까. 어쩌다 신호가 잡힌 라디오에서는 아나운서가 밖으로 나오지 말라며 광주시에 유언비어가 나도니 시민 여러분은 절대 속지 말라고 되풀이하고 있었지.

며칠 뒤 집에 있기 답답하기도 하고 궁금해서 엄마 몰래 버스가 다니는 큰길로 내려갔어. 송정리 쪽 8차선 큰 도로는 깊은 구덩이가 도랑처럼 길게 파여 있었어. 전쟁영화에서 보던 참호가 저런 건가 싶었지. 도랑 너머로 벽처럼 줄줄이 늘어선 탱크를 보자 나도 모르게 건물에 바싹 붙어서 걸어갔지. 하늘에선 헬리콥터가 줄지어 날았어.

  “따다다다다다다”

헬리콥터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어. 용기를 내서 시내 방향으로 좀 더 걸었어. 항상 차로 붐비던 도로는 사람들이 걸어 다닐 뿐 한산했지. 도로 한가운데로 걸으니 늘 보았던 거리가 낯설게 느껴졌어. 큰 사거리에 이르자 유리창이 다 깨지고 커다란 창틀만 있는 버스가 백운동 쪽으로 가는 것이 보였어. 버스 앞에는 ‘비상계엄 해제’라는 현수막이 걸려있고 옆면에는 ‘시민은 도청 앞으로’라고 글씨가 적혀있었어. 태극기를 창밖으로 흔들며 사람들이 힘차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 각목으로 버스를 탕탕 두들기며 말이야. 버스가 아주 작아질 때까지 한참을 쳐다본 거 같아. 사람이 여럿 죽었다는데 버스에 탄 저 사람들은 안 무서울까? 저러면 군인들 눈에 쉽게 띌 텐데. 총에 맞으면 어쩌려고 유리창도 없는 버스를 타고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지? 정말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는지, 유언비어가 맞는지 궁금했지만, 무섭기도 하고 도청은 너무 멀었어. 서동 집에 살았다면 20분도 안 걸렸을 텐데 말이야. 귀를 때리는 헬리콥터 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왔지.


며칠이 지났어. 그동안 헬리콥터는 매일 떠 있었어. 간간이 시내 쪽에서 콩 볶는 소리가 들리고 방송하는 여자 목소리도 들렸지.

  “타다다다다다다”

  “따당 따당 따당 따당”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우리 형제·자매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도청으로 나오셔서 우리 형제·자매들을 살려주십시오.!”


방송하는 목소리가 더 다급해진 날이었어. 밤에도 시내 쪽이 환하고 한동안 총소리가 그치지 않았어. 라디오에서는 여자 아나운서가 앵무새처럼 말하고 있었지.

  “시민은 놀라지 마십시오. 시민은 거리로 나오지 마십시오. 시민은 거리로 나오지 마십시오. 문을 꼭 닫고 집안에 계십시오. 문을 꼭 닫고 집안에 계십시오. 시민은 문을 열지 마십시오.”

그 순간에도 헬리콥터는 줄지어 날고 있었지.


며칠 후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등교 소식을 알렸어. 거의 보름 만에 가는 학교였지. 버스를 타고 창밖을 보는데 금남로에 들어서자 그동안의 흔적들이 보이기 시작했어. 무너진 담과 패이고 깨진 보도블록, 부러진 전봇대와 가로수, 우그러진 셔터, 건물 벽은 사방이 어지럽게 패어있고 공중전화 박스 유리창도 성한 게 없었지,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들 뒤로 창틀마다 오그라지고 불에 그을려서 온통 시커메진 MBC문화방송국도 보았어.

교실에서 우리는 모두 낮은 소리로 이야기했어. 큰 소리를 내면 안 될 것 같았거든. 그동안 다들 창에 이불을 걸었대. 집에 총알이 날아와 항아리가 깨진 친구도 있었어. 선생님도 전혀 말씀 안 하셨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지도 못했지. 물으면 안 될 것 같았어.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

다만, 다시는 이런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어. 금남로에서 총을 메고 발을 구르며 군화 소리에 맞추어 뛰어가는 군인들을 안 보았으면, 군인들이 사람들을 쫓는 것을 안 보았으면, 도로에 늘어선 탱크도 그리고 이제 다시는 하늘을 맴도는 헬리콥터 소리가 안 들렸으면 했어.


*    *    *


얼마 뒤 광주에서 전남 도민체육대회가 열렸을 때 우리는 카드섹션을 준비했어. 수업도 빼고 운동장에 줄을 맞추어 앉아 흰색 장갑을 끼고 하얗고 까만 종이를 지겹도록 들어 올렸지. 팔이 아파 조금이라도 카드를 낮게 들면 교련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졌어. 담임선생님은 카랑카랑한 교련 선생님의 지적에 따라 우리 사이를 정신없이 다니며 처진 손을 잡아 번쩍 올려주셨어. 정말이지 벌 받는 게 나을 정도로 힘들었어, 아마 보름 정도 매일 오후에 카드를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연습을 했던 것 같아. 그 땡볕에서 말이지.


새 시대 새 역사

정의사회 구현


이게 우리가 만들었던 글자야.




발행일. 2022.08.11 | 글감. 고백하자면



남지


쓸모있는 뭔가를 만들어 곁에 두고 쓰는 것을 좋아해서 그동안 온갖 뻘짓을 했다. 10  손목 관절염 덕분에 시작했던 그림이 모여 2015 드로잉전「북카페 사람들」, 2017 고정희 시화전「노래하는 뜰」을 열었다. 2018년에 교직을 그만두고 작업실을 마련하여 손을 달래가면서 본격적인 뻘짓에 매진하고 있다. 글쓰기는 새롭게 시작한 뻘짓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로드스꼴라 글방] 유목민들 _ 보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