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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딘의 우연한 연결 Oct 25. 2022

[어딘글방] 관세음보살 _ 환희

토요글방에서 만난 환희의 글입니다.


혜진이 몰던 차가 어느새 조그마한 암자로 들어섰다. 한 달 전, 이 절의 주지와 총무가 절 앞마당에서 작은 금동 불상과 구슬을 발견했다며 신고를 해 시작된 발굴 현장이었다. 약사여래 좌상이 있는 절이라 중요한 유물이 나오지 않을까 했던 혜진의 연구소 소장과 주지의 기대와는 달리 아직 나온 게 없었다. 혜진 역시 자기 옆에서 여전히 툴툴대고 있는 후임을 보며 그 못지않게 어서 현장을 덮고 사무실로 복귀하고 싶었다.




관세음보살


환희


선생님. 저 진짜 짜증 나서 말해야겠어요

그래... 말해. 근데 저번처럼 그렇게는 말고 홍주와 혜진이 발굴 현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제가 뭘 어쨌는데요 홍주의 입이 어느새 댓 발 튀어나와 있다. 저번처럼 짜증 내지 말란 소리야 선임을 한번 바라보고는 홍주가 말했다. 이번엔 안 그럴게요 홍주는 자기가 언제 짜증 냈냐고 묻고 싶었지만, 회사에서 자기 말에 귀 기울여 들어주는 건 혜진뿐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근데 그 자식이 짜증 나게 하잖아요.

그렇다고 컵을 내팽개치고 가면 어떻게 해 혜진은 회의 도중, 무리한 업무지시를 내리는 팀장에게 싫은 티를 팍팍 내던 후임이 당황스러웠다. 이건 절 무시하는 거예요. 제가 회의 때 팀장님한테 저랑 상의도 없이 사업 벌여놓은 거 얘기 좀 하자 했다고 이러는 거잖아요. 자기가 괜히 찔려서는 갑자기 보복으로 현장 보내는 거야 뭐야! 날이 더워지기 시작할 무렵, 계약이 끝난 현장 인부들이 빠지며 현장에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혜진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혜진은 팀장이 말없이 홍주를 보낸 건 잘한 일은 아니었지만, 팀장도 어쩔 수 없었던 거라며 길길이 날뛰는 후임을 어쩌나 말을 골랐다. 팀장 한두 번 볼 거 아니잖아. 너 내일 그만 둘 거야? 요령껏 해, 요령껏 자기보다 한참 늦게 들어온 후임을 부단히 타이르며 혜진은 익숙한 길로 차를 몰았다.


혜진이 몰던 차가 어느새 조그마한 암자로 들어섰다. 한 달 전, 이 절의 주지와 총무가 절 앞마당에서 작은 금동 불상과 구슬을 발견했다며 신고를 해 시작된 발굴 현장이었다. 약사여래 좌상이 있는 절이라 중요한 유물이 나오지 않을까 했던 혜진의 연구소 소장과 주지의 기대와는 달리 아직 나온 게 없었다. 혜진 역시 자기 옆에서 여전히 툴툴대고 있는 후임을 보며 그 못지않게 어서 현장을 덮고 사무실로 복귀하고 싶었다. 혜진이 익숙하게 나무 그늘 아래 차를 대고 이왕 온 거 잘 하자 홍주를 타이르며 현장으로 들어섰다. 먼저 온 현장 어르신들이 각각 네모난 유구 속에 들어가 호미와 괭이를 들고 둘을 반갑게 맞았다. 혜진 역시 매일 봐온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홍주와 연장을 챙겨 유구로 향했다. 천막 하나 없는 현장에 쭈그려 앉자 벌써부터 등에 불이라도 붙은 듯 뜨거웠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동안 호미질을 하던 혜진이 잠시 숨을 돌리며 허리를 펴자, 주변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불당은 비어있고, 법당 처마 밑 스피커에서는 녹음된 염불만이 끝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똑같은 염불을 들은 지도 벌써 한 달이 되어갔다. 스님은 어디 가고 스피커만 저리 바쁜지. 혜진이 잠시 땀을 식히며 옆에서 묵묵히 땅만 파는 홍주에게 말을 걸었다. 난 처음에 저거 듣고 밤새운 보살이라 그러는 줄 알았잖아. 홍주가 애써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며 물었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은 무슨 뜻이에요?” 관세음보살이 보살 중에 하나인데, 그분을 부르는 게 우리의 소리를 들어달라는 뜻이래”


혜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무를 흔들던 바람이 현장 흙먼지와 함께 법당 안으로 날아들었다. 현장 어르신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이고~ 법당 안으로 흙먼지 다 들어가 분다 뭐 어때요 중놈도 먼지 구덩이에서 구르는 판에 혜진이 그 옆에 앉아 다시 호미질을 하며 대답했다. 혜진과 현장팀이 땡볕 아래 열심히 흙을 파고 나르는 게 일이면, 이 절의 주지는 술에 취해 법당 위에 널브러져 있는 게 일이었다. 나도 시줏돈이나 받고 그렇게 살고 싶네 혜진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자, 그래도 인간이 그렇게 살면 못써 하며 현장 어르신들이 혜진을 나무랐다. 뭐 어때요? 사람들 다 그렇게 놀고먹으려고 열심히 돈 버는 거 아닌가?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혜진을 보며 어르신들이 웃었다. 아니 우리 선생님은 얼굴도 요로코롬 하얗고 머리도 예쁘게 염색해 갖고는 어찌 그리 말까지 잘 할까 혜진 역시 자신을 예뻐해 주는 어르신들에게 되려 너스레를 떨었다. 저 한국인 아닌데 모르셨어요? 어르신들이 혜진에게 한국인이 아니면 뭐냐고 물었다. 어머니도 참, 저 러시아 사람이잖아요. 혜진의 말에 홍주가 한 술 더 떠 러시아어로 한마디 해 드리라고 부축인다. 스파 시바… 주지 스키 개스키 혜진이 중얼중얼 말도 안 되는 러시아어를 하자 현장에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땅에 물을 뿌려도 몇 초 만에 말라버리는 날씨였다. 말라버린 땅처럼 사람들의 웃음이 말라 가는 와중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골프카트가 현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 절의 총무였다. 머리를 곱게 틀어올린 통통한 중년 여성의 하얀 얼굴에 언제나 미소가 가득했다. 혜진은 그 얼굴을 보며 사람들이 말하는 복스러운 얼굴은 저런 얼굴일 거라 확신했다. 밝은 연두색 카라티에 커다란 선글라스를 낀 총무는 언제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총무가 현장 접근금지 테이프 앞에 카트를 세우자 혜진이 반갑게 테이프를 머리 위로 올리며 그녀를 맞았다. 한창 볕이 뜨거울 때 시원하고 달짝지근한 미숫가루며 매실차를 가져오는 총무가 현장 사람들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총무는 여느 때처럼 날도 더운데 이것 좀 들고 해요 하며 혜진이 올려준 테이프 안으로 검은 비닐봉지를 안고 들어섰다. 혜진이 사람들을 모아 총무가 사 온 아이스크림을 배급하는 동안 사람들은 각자 법당 돌계단이며 그늘 아래 앉아 흙 묻은 장갑과 신발을 벗고 잠시 땀을 식혔다. 많이들 먹어요. 이거 우리 스님이 산 거예요 총무가 사람들 사이에 앉으며 말했다. 스님이오? 혜진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묻자, 총무가 멀리 세워둔 카트를 가리켰다. 카트 뒤에 빈 소주 상자가 놓여있었다. 응, 내가 우리 스님이 마신 소주 공병 팔아 이거 사 왔어. 혜진과 사람들이 아이스크림을 흔드는 총무를 말없이 바라봤다. 그래도 그 스님이 옛날에는 참 괜찮았는데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의 시선에 총무가 잠시 사람들의 눈치를 보다 말했다. 옛날에 그 스님 팬클럽도 있었어요. 사람들이 '어머~스님 너무 눈이 사슴 같아요!' 이랬다니까!

스님이 저한테 자기는 이슬만 먹고 산다더니 혜진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누군가 이슬이 우리가 아는 그 이슬이냐고 물었다. 총무가 한숨을 한번 쉬고는 말했다. 하여간 그 양반은 술이 문제야, 술이. 그래도 우리 스님 너무 나쁘게만 보지들 말아요. 이렇게 스님 덕에 아이스크림도 먹고. 이게 다 부처님 뜻이려니 해야.

총무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소리쳤다. 술을 마시든 안 마시든 상관없는데, 저희 발굴하는 거 뻔히 알면서 맘대로 현장 들어와서는 자꾸 뭐 나온 거 없냐 잔소리하고, 취해갖곤 여기 법당 앞에 우리 보란 듯이 누워 있고, 우리 여선생님들한테 치근덕대니까 문제죠 홍주가 눈치를 살피다 혜진에게 물었다. 소장님도 이사실 알아요? 혜진이 흔들리는 나무를 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 그저 자기 한몫 챙길 생각뿐이니까. 자기 지내는 동안만 아무 일 안 터지면, 다른 데로 발령 나거나 가버리면 그만이니까


홍주가 주지 덕에 먹는 거면 안 먹을 걸 하며 손에 있던 아이스크림을 바라봤다. 사람들의 원성에 총무는 자기가 죄인이라도 된 양 말했다. “그 사람이 무서운 사람이 없어서 그래. 아주 무서운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모인 처마 밑에 여전히 녹음된 관세음보살 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때, 묵직한 바퀴 소리와 함께 흙먼지를 일으키며 등장한 사람은 이 현장의 총책임자 현철이었다. 법당 문간과 돌계단에 앉아 쉬고 있던 사람들이 후다닥 일어나 그를 향해 인사를 하며 각자 모자와 장갑을 챙겨 다시 땡볕으로 향했다. 누구든 현철에게 꼬투리라도 잡히면 쉬는 시간은 물론 퇴근시간까지 지킬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혜진 역시 팀장님 오셨어요? 하며 현장으로 향했다. 총무와 몇 마디 나누던 현철이 어느새 말없이 땅만 긁고 있는 홍주 뒤로 다가갔다. “어때, 홍주 씨는 할만한가?” 홍주는 현철을 쳐다도 보지 않고 땅만 호미로 내려치고 있었다. 아침 내내 현철 욕만 하던 홍주 대신 혜진이 대답했다. 팀장님 너무 그러지 마세요. 이러다 홍주 도망가겠네!

어휴~ 맨날 사무실에만 앉아있는 애가 뭘 알겠어. 이제 혜진이랑 애들이 현장에서 고생하는 거 십분의 일이나 알려나? 현철 보란 듯이 호미를 더 세게 내리치는 홍주에게 현철은 호미는 그렇게 쥐는 게 아니다, 바위를 붓으로 그렇게 털면 흙만 더 생긴다며 홍주 속만 더 긁었다. 그러는 사이 홍주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현철에게 현장팀 사람 하나가 다가왔다. 팀장님, 어제부터 오수관에서 물이 새는데 흙주머니로 좀 괴어놓을까요? 조사 범위에 해당하는 오수관을 받치고 있던 흙이 빠지며 공중에 아슬아슬하게 떠있던 오수관이 어제보다 확연히 쳐져 있었다. 더군다나 오수관 이음새 부분에서 정체 모를 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니 사람들은 관을 조심조심 넘어 다니거나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현철이 인상을 찡그리며 연구원과 함께 흙주머니를 들고 오수관 쪽으로 향했다. 멀어지는 현철을 보며 홍주가 그제야 고개를 들어 혜진을 보고는 지겹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찰나를 포착한 현철이 소리쳤다. 홍주 이리 와서 좀 도와라!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못 들은 척하던 홍주도 쉬지 않고 현철이 자기 이름을 부르자, 한숨을 쉬며 오수관 쪽으로 향했다.


홍주가 조용히 팀장 말을 듣는 걸 보며 혜진이 아침에 자기가 말한 보람이 있었나 생각하는 사이, 언제 온 건지 운동복 차림의 주지가 벌건 얼굴로 법당 앞에 서서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번에 군수인지 누구인지가 왔을 때는 번듯이 법복이라도 입고 있더니 혜진이 행여 눈이라도 마주칠까 다시 땅으로 시선을 돌리자 누군가 흥얼거렸다. “죽지도 않고 또 왔네~” 현장을 둘러보던 주지는 현장에 몇 없는 여자 중 새로운 얼굴인 홍주가 잠시 혼자 있는 틈을 타 그 곁으로 다가갔다. “우리 처음 보는 선생님은 직급이 뭔가?” 혜진이 뒤를 돌자 홍주가 흙을 털고 일어나는 중이었다. 홍주는 이미 혜진으로부터 주지가 직급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사실을 들은 바 있었다. 홍주가 호미를 쥐고 비뚤게 서 물었다. “그걸 스님이 알아서 뭐 하시게요” 주지. 현철 앞에서도 터지지 않은 홍주가 대견하다 생각하던 혜진의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주지도 홍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뭐 기분 나쁜 일 있소?” 들은 채도 않고 홍주가 호미를 허공에 휘저었다. “스님, 여기 발굴 현장입니다. 선 밖으로 나가세요” 그러자 주지도 움찔하며 몸을 뒤로 빼고는 허 참 내! 하며 홍주를 째려보고 다른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혜진은 그런 홍주에게서 어쩐지 팀장 현철이 보였다. 언젠가 발굴 현장에 스님을 찾아온 사람들을 현철은 그렇게 쫓아냈다. 발굴 현장에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들어오자 현철은 “여기 발굴 현장이니까 나가세요!” 하며 소리쳤다. “아, 괜찮습니다. 우리 도청에서 나왔습니다”라는 사람들에게 현철은 “도청이고 대통령이고간에 여긴 아무나 못 들어와요” 하며 사람들을 내쫓았다. 혜진이 잠시 그때를 회상하는데 사람들 곁을 기웃거리던 주지가 어느새 혜진 곁으로 다가왔다. 혜진은 제발 그냥 지나가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호미질에 열을 올렸지만 혜진의 바램과 달리 주지는 쭈그려 앉아 그 등에 손을 올렸다.

“우리 선생님 오셨구먼! 그래, 뭐 좀 발견했는지요?” 주지가 혜진의 속옷 끈을 쓰다듬자, 혜진이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스님이 부처님한테 기도를 덜 하셨나 본데요” 혜진이 주지의 팔을 은근슬쩍 쳐냈지만 주지는 아랑곳 않고 벌건 얼굴을 혜진에게 더 가까이 들이댈 뿐이었다. 진한 술 냄새에 혜진은 더 이상 숨쉬기가 힘들었다. 주지의 손이 혜진의 등에서 아래로 향하더니 어느새 허리를 지나 또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혜진은 마치 커다란 거미나 지렁이가 자기 등허리를 기어 다니고 있는 것 같았다. 혜진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다른 곳에서 비명 같은 고함이 들려왔다. “야 이 자식아!”


고함과 함께 혜진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현철이었다. 어르신 중 한 분이 현철의 고함 소리에 놀라 가슴을 쓸어내리는 동안 현철이 곧장 혜진에게 다가가 앞에 섰다. “너 이 자식 지금 뭐 하는 거야!” 현철 앞에 쭈그려 앉은 주지가 멀뚱히 그를 올려다봤다. 안 그래도 180이 넘는 현철은 오늘따라 온통 검은 현장복을 입고 껄렁하게 서있어 마치 뒷골목 건달 같았다. 현철은 대뜸 혜진이 반듯이 다듬어놓은 토층을 가리켰다. “너 이따위로밖에 토층 정리 못해?” 누가 봐도 손댈 대 없는 토층이었다. 현철의 난데없는 고함에 혜진이 “네?” 하고 멀뚱히 현철을 바라봤다. 현철이 말했다. “내 말 못 알아들어? 현철은 여전히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혜진 옆에 앉으며 말했다. 스님 옆으로 좀 비켜보세요” 현철의 우악스러운 행동에 주지가 밀려나자, 현철은 혜진의 옆에서 호미를 뺏어 아주 살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살살 토층을 긁으며 말했다. “이렇게 하라고 이 자식아 이렇게!” 토층 대신 현철을 바라보던 혜진이 “네” 하고 대답했다. 그러는 동안 현철에게 밀려 어정쩡하게 앉아있던 주지가 아는 체를 했다. “아이고~ 우리 팀장님 오셨네” 대답하지 않는 현철에 주지는 아랑곳 않고 물었다. 현장은 어떻습니까?

“뭐 보다시피 나온 게 없네요.” 주지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현철을 지긋이 바라봤다. “이게 다 머리 스타일 때문이에요” 주지의 시선이 흰머리가 중간중간 섞인 현철의 덥수룩한 머리에 향해있었다. 현철이 여전히 들은 채도 않자, 주지는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내가 또 관상을 보잖소. 우리 팀장님 머리 스타일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 머리가 별로라 일이 잘 안 풀리는 거예요 주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번엔 현철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아, 내 머리는 됐고! 스님 머리나 바꾸지 그래요? 스님이 머리 스타일을 좀 바꿔야 우리가 뭐 좀 찾겠는데. 그러면서 호미질을 하던 현철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 참! 스님은 머리가 없구나! 현철의 말에 주위 사람들이 애써 웃음을 감추려 챙 모자를 얼굴 깊이 눌러썼지만, 여기저기서 참지 못하고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사이 주지도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머리 스타일을 바꾸면 우리 팀장님이 5급이 될 수 있으려나? 우리 팀장님 내가 5급 만들어드려야 하는데 주지는 현철이 현장 일을 핑계로 박사 논문을 쓰지 않아 승진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현철은 주지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데 잠시 놀라며, 종종 현장에 들르면 법당에 들어가 주지와 몇 시간을 얘기하던 연구소 소장이 머릿속에 떠올렸다. 승진은 해가 거듭할수록 현철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는 문제였다. 이미 아래에서는 자기보다 어린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고, 위에서는 조만간 자신을 무능한 부하직원으로 생각할 터였다. 더군다나 나이와 직급을 떠나 할 말 다 하고 마음대로 하는 현철을 위에서 좋게 볼리 만무했다. “이렇게 매일 땅이나 파고 있으니 승진을 못하는 건가?” 주지는 그제야 자기에게 무안을 준 현철이 아무 말이 없자 능글맞게 웃었다.


보다 못한 혜진이 현철의 눈치를 살피다가 물었다. 팀장님, 어제 현장 사진 찍은 거 중에 여쭤볼게 좀 있는데요 흙을 털고 일어선 혜진과 현철이 컨테이너 임시 사무실로 향하자, 주지는 다시 여직원들에게 가 얼굴이 검다는 둥, 루즈라도 바르는 둥 추잡스러운 말을 늘어놓았다. 주지의 끝없는 간섭에 여직원 하나가 후다닥 화장실로 향하자 상황을 바라보던 홍주의 시선이 여직원을 따르다 뭔가에 꽂힌다. 잠시 후 홍주가 말했다. 이게 뭐지? 근처에 쭈그려 앉아있던 주지도 고개를 들어 홍주를 바라봤다. 호미를 휘두르던 홍주에게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고 주지가 물었다. 거기 뭐가 있소? 홍주가 들은 척 만 척 여전히 토층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뭔가를 잡아당기며 중얼거렸다.  이거 왜 이렇게 안 빠져. 몸을 요리조리 움직이며 홍주가 있는 구덩이를 들여다보던 주지는 시원하게 보이는 게 없자 답답했다. 한참을 혼자 끙끙대던 홍주가 할 수 없단 듯이 주지를 불렀을 때 주지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홍주에게 향했다. 유구 속에 떡하니 땅에 박힌 기와가 눈에 들어왔다. 주지가 물었다. 이거 기와 아니오? 네, 그런데 뭔가 글씨 같은 게 적혀있는 것 같아서 홍주가 말끝을 흐리자 주지도 유구 속으로 들어가 반쯤 드러난 기와를 열심히 바라봤다. 홍주 말대로 글씨 같기도 하고, 그냥 평범한 문양 같기도 한 흔적이 기와 표면에 찍혀있었다. 주지는 반쯤 나온 기와를 손에 쥐고 생각했다. ‘이게 만약 명문기와면... 역시, 우리 절이 엄청난 곳이었을 줄 알았어.’ 

아, 스님 그렇게 하면 안 돼요. 호미로 살살 주변을 긁어내야 해요! 놀란 홍주가 주지를 말리며, 손에 작은 호미를 쥐여줬다. 비좁은 유구 속에 주지와 홍주가 기와 주변을 긁어낸다. 그 둘의 뒤로 추욱 처진 오수관에서는 여전히 정체 모를 물이 떨어지는 중이었다. 이거 괜찮은 거요? 주지가 흘끗 오수관을 바라보고 물었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괜찮을 겁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홍주는 호미를 오른손으로 들었다, 왼손으로 들었다 하며 말했다. 스님, 둘이 여기 있는 건 좀 좁으니까 저는 위에서 한번 해볼게요 그러면서 유구 속이 비좁다는 듯 홍주는 연장을 유구 밖으로 꺼내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기와에 집착하고 있는 주지를 두고 다리를 들어 유구 밖으로 오르던 홍주는 주지 눈치를 한번 보고는 뒷발로 툭하고 오수관을 받쳐놓은 흙주머니를 건들었다.


처질대로 처져있던 오수관은 홍주가 차 놓은 흙주머니가 빠지자,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연결 부위가 틀어졌다. 연결 부위가 빠진 오수관에서는 악취와 함께 오물이 터져 나왔고, 순식간에 주지가 앉아있는 구덩이로 흘러들었다. 아악, 이게 뭐야!! 주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에 놀란 현철과 혜진이 컨테이너 밖으로 나와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제가 잘 못 봤나 봐요. 기와에 명문이 적혀있는 줄 알고 홍주가 꺼내 든 기와를 들고 얼버무리자 현철은 여태 구박 거리만 찾던 홍주와 주지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말했다. 그래! 뭐 처음 발굴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주지가 현철과 홍주를 째려보고 있자 현철이 말했다. 스님 드디어 현장에서 뭐가 나오긴 나왔네요. 거 들어가신 김에 정리 좀 하고 나오시지요. 우리는 회의 좀 해야겠네" 현철이 웃으며 나머지 팀원들을 데리고 컨테이너로 향하다 멀뚱히 주지를 바라보고 있는 홍주에게 말했다. 뭘 해. 너는 시내 가서 오수관 막을 테이프 안 사 오고. 홍주 옆에 서있던 혜진이 홍주와 함께 아침에 차를 세워뒀던 그늘로 향한다. 아침에 뾰로통한 얼굴로 조수석에 타있던 홍주가 애써 웃음을 참으며 조수석에 앉는다. 혜진의 차가 절을 빠져나가는 동안, 사이드 미러로 비친 법당 속 부처가 웃고 있다.




발행일. 2022.05.28 | 글감. 싸움의 기술


환희


고고학 현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쓴다.

지역과 발굴 현장이라는 일상이 되어버린 세상을 소설로 다시 짓는다. 일하며 매주 한 편의 글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중이다. 이 이야기가 어디로 향할지, 모여 무엇이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알 수 없어서 힘들 때도 있고 즐겁기도하다. 계속 쓰고 끝을 내고 싶다. 앞으로 더 자주 여행하고 공부하며 많은 이야기를 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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