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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SR Apr 26. 2022

역시 술을 마시지 말 걸 그랬어.

서른즈음에 자살하기 전 #022


 “들어가세요!”,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봐요!”

 예의 헤어질 때 하는 말을 전하고 핸드폰으로 시간을 봤다. 10시. 파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서로 집 가는 방향과 걸리는 시간이 달라 모두 헤어지기로 했다.

 “조금 더 있으면 막차가 끊길 거 같으니까...”

 누군가 중얼거렸다.


 술과 함께 나온 안주는 맛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별로 먹진 않았다. 한 두입 정도. 국물이 있는 음식은 가끔씩 국물 조금. 나는 술을 마시면서 안주를 많이 먹는 스타일은 아니다. 이미 맥주 때문에 배가 불렀다. 그래서 소맥이나 맥주를 선호하지는 않는다. 내게 있어 소맥은 남들을 만날 때만 마시는 술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을 가지만 집과 가까운 역에서 하나 혹은 두 정거장 전에서 내렸다. 술집을 나오기 전 화장실을 다녀왔지만 한번 터지면 멈추질 않았다. 역 안에 있는 화장실에 갔다 온 후 집까지는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과 가장 가까운 곳이 아닌 두 정거장쯤 떨어진 곳에서 내렸냐면, 걷고 싶어서였다. 점점 여름이 오고 있다지만 일교차가 심해 해가 지면 매우 쌀쌀해졌다. 다행히 집까지 걸어가는 데 날씨는 춥진 않았다. 술기운 때문인가, 아이스크림도 생각나는 게 몸에 열이 많이 나는 모양이다.


 술을 마신 후, 집 가는 길을 걸을 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술을 마시는 감정의 총량이 0인 것처럼, 술을 마실 때 느낀 기쁨이 집에 가는 길에는 우울로 바뀌었다. 내 감정이 한 곳으로 쏠리는 걸 싫어하는 걸까? 분명히 재밌게 놀았는데 왜 집에 가는 길은 허무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는지. 내 주사가 그런 걸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20살, 잠드는 것이 나의 주사였다. 그 후에는, 정말 잠깐 동안은 난리를 치는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 상처가, 혹은 물건이 없어진 적이 있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상처는 나으면 되고, 물건은 다시 사면되니까. 가장 싫은 건 기억을 잃는 것과 부끄러운 행동을 한 내가 너무 싫었다. 그건 오래 남으니까. 그 후 나는 주사가 나타나기 전 입을 잔에서 뗐다.


 오늘 만났던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술자리에 모두가 모르는 사람인 것은 아니었다. 지인의 지인, 그런 식이었다. 아예 모르는 사람이면 모를까 연이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 앞에선 예의를 지켜야 했다. 하지만 술이 들어가면 나도 모르게 들뜨게 되었고 분위기를 탔지만, 그건 모두 후회였다. 그러니까 귀가하는 길은 그 후회를 온전히 견뎌야 하는 시간이었다.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상종 못할 사람으로 평가당하진 않을까? 나의 지인마저도 나를 싫어해지는 건 아닐까? 그 시간에 내가 파악할 수는 없었다. 후에 다시 만날 때 나를 대하는 태도로 알 수 있을 테지만 그런 일이 아예 없을 수도 있었다.


 후, 한숨을 쉬었다. 목이 타다고 느껴 편의점에서 이온음료를 샀다. 한두 모금 마시다가 뚜껑을 닫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생각났다. 매번 나타나는 후회는 다양하지만 오늘은 그녀인가 보다. 그녀는 나와 술을 자주 마신만큼 내가 했던 많은 실수를 옆에서 지켜보았다. “술을 마시면 그럴 수 있어”라고 했지만 만약 내가 그녀였다면 정이 떨어졌을 거다. 다행인 건가, 그리 개의치 않아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태도를 보이는 그녀를 보며 마음이 넓다고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면 서로의 세계관이나 인식하는 범위가 넓어진다고 했던가? 그녀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를 보며 뭔가 넓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의 내가 못하는 대부분을 그녀는 하고 있었다. 운전면허도 간신히 따고 장롱에 넣어놓은 나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차를 잘 몰 수 있었고, 늘 사랑을 하고 있었고, 일에 있어서도 말로 할 수 없는 프로페셔널 함이 느껴졌다. 그때의 내가 아직 부끄러워 말할 수 없었던, 야한 이야기들도 잘해 주었다.


 혼자 술을 마시는 게 취미라는 그녀를 보며 어른 같다고 생각했다. 아쉽게도 같이 일을 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일을 하는 업장에 정이 떨어진 그녀는 바로 떠났다. 다행히도 나와의 연락을 끊은 건 아니었다.


 우리는 가끔 연락했다. 몇 개월에 한 번씩. 내가 먼저 연락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녀가 먼저 연락해주었다. 더 가끔씩 만났다. 나는 늘 꾸미고 잘 보이고 싶은 마음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그때마다 남자 친구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나는 그녀에게 주사를 부렸으니까. 신기했다. 분명 나의 이상형과는 잘 맞지 않는 사람임에도 끌린다는 게. 역시 이상형은 믿을게 안되거나 혹은 절대 만날 수 없는 사람이 이상형인 건가?


 그 사건 때문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연락하고 몇 번 더 만난 후 한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나는 과거를 버리기보다 간직하는 사람이지만, 이미, 완전히 떠나버렸다고 생각하는 과거는 모아서 구석에 간직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툭, 다시 연락이 오곤 했다. 그래서 구석 한 곳에 위치했던 그녀는 한동안 이리저리 이동을 반복하다가 정착했다. 그 미묘한 경계선을 타다가 결심했다. 구석으로 두지 않기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후회를 곱씹는 시간이지만, 때때로 그 시간의 초점은 하루가 아닌 인생으로 들어갈 때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인가 보다. 그녀 생각이 나는 걸 보니. 제정신에 마음을 전한 적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늘 가까이 있기보다는 한걸음, 혹은 한걸음 반 정도 떨어져 있을 때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그 경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휘청이는 팽이 아래 있는 종이를 건드리는 것과 같았다. 어려웠다.


 20대에서 30대로 세월이 흐른 건, 강의 상류의 거침이 잦아들고 잔잔해진 것과 같았다. 지금은 누군가를 좋아해도 그런 감정보다는 일상이 더 중요했다. 일상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나타날 시절에는 사랑이 쓸모없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쓸모없는 것과 비슷하게 되어버리니 그런 거친 감정이 그리워졌다.


 집에 도착해 누우며 다시 한번 생각했다. 역시 술을 마시지 말 걸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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