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가 떠났다.
마흔둘이라는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현수는 내 마음에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아니 잊지 못할 것 같다. 짧지만 아름다운 그의 마지막 문장을 나는 오늘도 떠올린다.
"살고 죽는 것이 제 뜻대로 되지는 않지만 계속 기도하고 있어요. 그래도 제 진정 속마음은 살길 바래요. 잘 회복되어서요." 이 문장을 마지막으로 그는 보름 뒤 숨을 거두었다. 회복되지 못했다.
그는 1년 반 넘도록 암 투병을 하며 나와 계속 연락했다. 나는 현수를 위해 매일 아침마다 기도했다. 그를 살게 해달라고. 이제 결혼 생활을 시작한 지 겨우 삼 년밖에 되지 않은 신혼부부에게 삶의 기쁨이 계속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빌었다.
나는 그를 10년 전쯤 대학원에서 만났다. 스무두 살이 더 많은 나는 그를 유독 이뻐했다. 그의 젊음이 싱그러워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미소가 나를 너무 편안하고 행복하게 했다.
그는 아버지뻘인 나를 만날 때마다 환하게 웃어주며 인사했다. 그의 언어는 참 부드럽고 정갈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내가 그를 다시 보게 된 것은 그의 사랑의 넓이 때문이었다. 어떤 회사의 노동자들이 굴뚝 농성을 할 때, 그는 그 굴뚝 아래 천막에서 1년 넘게 현장을 지키며 노동자들을 도왔다.
자기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회사였지만 억울한 일을 당한 노동자들의 사연을 신문 기사로 읽고 외면할 수 없어서 농성 현장으로 달려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그들과 함께 있었다. 결국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 결혼했다.
긍정적이고 밝으면서도 정의로운 그는 언제 만나도 싱그러웠다. 나만이 아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친구나 지인들은 나와 같은 말을 했다. 이렇게 좋은 사람이 왜 이렇게 일찍 떠났을까?
나는 장례식장에 가지 못했다. 장례식에서 입관예배에 참여했던 그의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현수의 얼굴이 참 편안하고 아름다웠어요. 그나마 슬픈 마음을 진정할 수 있었어요." 마지막 얼굴 표정이 각자의 삶의 결론일까? 현수가 슬퍼하는 우리를 위로해 주는 듯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 동안 마음이 우울했다. 나의 기도가 무시당했다는 억하심정도 들었다. 하늘에 삐져있었다. 그런데 아침 기도시간에 그가 나를 보며 예의 그 웃음을 던지는 것이 아닌가? 아... 그는 죽었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구나. 그는 살아있구나.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한 신학교 총장님이 부인을 암으로 먼저 보내고 혼자 지내는 외로움과 슬픔을 묵상하다 깨달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분은 죽음의 반대는 생명이 아니라 탄생이라고 했다.
우리의 생명은 영원 전부터 존재해 있었고 각자의 카이로스(운명적으로 정해진 때)에 따라 몸을 입고 아기로 태어나 살다가 또 자신의 카이로스에 따라 몸을 벗고 다른 형태의 생명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우리의 생명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카이로스에 따라 다르게 존재한다는 이야기였다.
총장님 이야기에 따르면, 생명은 파노라마다. 내가 현수를 만난 것은 생명의 파노라마의 한 순간이었다. 그는 지금 파노라마의 다른 순간을 살고 있을 것이다. 영원한 삶을.
나는 지금도 현수가 보고 싶다. 나의 그리움은 그의 미소를 회상할 때 더 커진다. 나는 그의 미소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의 미소 안에서 나는 그를 기억하고 만난다. 그의 환한 미소는 순간과 영원을 이어주는 신비로운 힘이다.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게 해주는 그의 미소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나는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