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트리올에서 한 시간 반을 비행기로 날아 대서양을 마주 보는 샤롯타운(Charlotte town)에 도착했다. 이곳은 에드워드 아일랜드(Prince Edward Island) 주의 주도이지만 우리나라 읍내만 하다.
작가 몽고메리 여사의 생가
빨간머리 앤이 살던 집
우리 가족은 공항에서 북서쪽으로 30분 정도 떨어진 카벤디쉬(Cavendish)라는 작은 마을로 달려갔다. 대서양 해변은 끝없는 수평선과 코발트블루 색깔의 바다, 붉은 자갈들과 모래사장이 외롭고 아름다운 가을 분위기를 자아냈다.
우리가 서울에서 비행기를 여러 번 타고 여기에 온 이유는 아내가 소설 속 주인공 빨간 머리 앤이 실제 살았던 삶의 흔적을 맛보고 싶어서였다.
소설의 원 제목은 Anne of Green Gables다. 직역하면 "푸른 지붕 집의 앤"이다. 그런데 일본이 이 책을"빨간 머리 앤"으로 제목을 바꿨다. 주인공 앤이 빨간 머리여서 원제목과 정반대 색깔의 제목을 붙였다. 우리나라 번역가가 일본 책을 번역하는 바람에 원제목보다 일본 번역책의제목을 사용했다.
우리는 Green Gables Heritage Place에 있는 앤이 살던 집을 둘러보았다. 이 소설은 작가인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주인공 앤의 스토리로 풀어가고 있다.
전시실의 벽들은 작가에 대한 정보로 가득 차 있었다. 소설 속 앤의 집은 작가가 살던 집을 배경으로 했다. 이층으로 된 집은 아담하고 사랑스럽고 고풍스러웠다.
나는 아내와 함께 작가가 걸었던 숲 속의 오솔길을 걸었다. 작가의 생가와 그녀가 묻혀있는 무덤을 돌아보았다. 외지인에게는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 시골의 풍경이었다.
그런데 작가의 생가와 오솔길은 묘하게도 영감으로충만했다. 그녀는 어렸을 적 살았던 오래된 농가, 집을 둘러싼 나무와 정원, 안온한 숲길, 사과나무 등 고요한 삶의 환경들이 소설을 쓸 수 있는 영감과 힘을 주고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동기와 원천이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밤에 숲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와 작은 동물들의 울음소리, 사과나무 사이에 비치는 햇빛, 정원에서 자라는 꽃들의 탄생과 소멸을 세세하게 기억하고 사랑했다.
그녀는 "나는 어릴 때 할머니와 함께 살던 오래된 집(old house)을 사랑한다. 세상의 어떤 곳도 나는 그 오래된 집보다 더 사랑할 수 없다"라고 고백했다.
그녀의 소설은 삶의 작은 것들을 항한 애정과 깊은 관심으로 충만하다. 누구든 그녀의 소설을 읽어보면 주변의 사소한 것들이 삶을 떠받들어주고 있음을 느낀다. 매일 보고 만지고 느끼는 것들과 깊이 교감할 때 삶이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를 그녀는 감동적으로 표현했다.
출간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전 세계 사람들이 이 소설을 사랑한다. 매년 수많은 독자들이 오로지 앤을 만나기 위해 멀리 비행기 타고 대서양 해변가 작은 마을을 찾는다.
그녀의 오래된 삶의 흔적과 거기에서 만나고 경험한 모든 사람들과 자연들과 나눈 깊은 사랑은 지금도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주변의 작은 것들을 너무 빠르게 지나쳐버린다. 그것들을 그리고 그 사람들을 사랑하기에는 접촉 시간이 너무 짧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지적한 것처럼, 현대인들은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계속 흘러 다닌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최소시간도 견디지 못하고 늘 새로운 것을 찾는다.
아는 것은 많지만 감동을 주지 않는 것은 자세히 보며 서로를 이해하며 사랑할 시간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머물러야 사랑할 수 있다.
너무 많은 정보를 처리해야 하는 우리는 삶의 감동을 잊어버리고 사랑할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사는 곳의 하늘과 바람과 숲과 길과 사람을 사랑하고 기억할 때 내 삶에서 향기가 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