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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나영 Jan 17. 2024

거품으로

햇살이 먼지 쌓인 창을 뚫고 들어서는 방에

이젤 앞에 앉아있는 화가가 있었다.

화가가 한 줄기 햇살에 날리기 시작한 먼지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그림 속 하얀 돛의 돛단배가

어디선가 불어오는 마지막 바람에 밀려

수평선 너머로 넘어가고 말았다.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순백의 돛은 아마

파랗게 물들었을 거다.

사실은 투명함을 가득 품은 바다의 색처럼.


하얗게만 보이던 돛은 사실

바람에 쓸리고 높은 파도에 맞아

색이 바랜 지 오래였다.

하얗긴커녕 누런 모습을 마지막으로 떠났단 말이다.


보이는 것만 믿는 화가는 돛단배가 존재하던 것을 잊은 채

거친 도화지를 반으로 갈라 선을 쭉 긋고는

바다를 푸른색만으로 칠하였다.


수평선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선.

선 하나로 끝낼 수 있을 만큼

바다와 하늘의 만남은 쉽지 않다는 걸

그 멍청한 화가는 몰랐다.


나도, 당신도 몰랐다.

그러니 그저 그런 한 줄기 햇살을 보내는

태양 때문에 푸르게 보이는 바다에 속았지.


거친 도화지 가운데에 그어진 그 선 하나는

밤새 하늘이 수많은 구름을 한가득 껴안고

바다가 수많은 파도를 머금고

아침이 되어서야 해변을 산책하는 사람에게

수평선이라고 불렸다.


순 거짓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이.

수평선은 당사자인 바다와 하늘에겐

만나는 장소가 아니었던 거다.

본 적도 없는 허상일 뿐.


그래, 속아 넘어간 화가의 잘못은 아니지.

결국 모든 게 태양의 탓이다.


태양이 보내준 햇살에

날린 먼지에

시선을 빼앗긴 화가의 실수에

하얀 돛단배를 삼켜버린 수평선의 안녕.


아 참, 바다는 푸른색이 맞다.

바다를 꽉 채우는 바닷물이 푸른색이 아닐 뿐.

그래, 속아 넘어간 당신의 잘못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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