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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젊은최양 Feb 05. 2024

잃어버릴 것을 흘러가도록 보낼 용기

독립출판물 서평 포스팅(1) - ≪Un autre ailleurs≫

나는 그저 눈에 띄는 파란 머리를 하고,
매일 같은 길을 걸어 어제의 내일로 가려고 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결국 죽음으로 덧없이 흩어지게 되어있고,
우리 모두 결국엔 죽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니 말입니다. 

Un autre ailleurs≫는 서간문 형식의 소설 ≪더 깊은 우주에서의 한불대역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겪은 후 죽음에 관한 숱한 질문을 던지던 한 소년이 빈센트라는 존재를 찾아 헤매며, 그를 향한 그리움과 여전히 머리맡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변치 않는 사랑에 대해 솔직한 고백을 담은 17통의 편지로 구성된 짧은 소설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이 있다면, ≪Un autre ailleurs≫의 화자에겐 빈센트가 있다. 데미안은 <데빌맨>의 아스카 료처럼 악마적인 것으로 상대를 매료하여 싱클레어의 관점을 넓혀주는 반면, 빈센트는 ≪Un autre ailleurs≫의 화자에게 있어 훨씬 다정한 어미새이긴 하지만 말이다. 또한, 싱클레어와 다르게 이 책의 화자는 이미 삶의 끝, 죽음이라는 어두운 면에 대한 경험으로 어찌 보면 성숙하다 말할 수 있다. 아니, 성숙하다기보다는 이 세계의 밑바닥을 너무도 깊게 느껴 초연한 상태다. 그의 마음은 텅 비어있기에 우울감에 너무 빠지지 않도록, 우울감에 이미 깊게 빠져있더라도 기색을 내비치지 않도록, 일반적인 삶을 영위해갈 수 있도록 양팔을 허수아비처럼 벌리고 서서 균형점을 발견할 때까지 한없이 비틀거리고 있다. 살아내려고 발버둥치는 화자에게 빈센트는 평안을 말한다. 평안을 위한 투쟁을 말한다. 싱클레어는 어리숙함을 뛰어넘기 위해 고뇌하며 투쟁하고, 이 책의 화자는 요동과 끝없는 슬픔을 잠재우기 위한 투쟁을 한다. 둘 모두 알에서 깨어나기 위한 투쟁을 하는 것이다.



"너는 아무도 만족시킬 수 없어. 심지어 네게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는 나마저도, 너는 결코 만족시킬 수 없지. 다행히도, 개인의 궁극적 용도가 타인의 만족은 아니야. 하나의 인격은 그런 식으로 소모되어서는 안 되고 소모될 수도 없어. (중략) 저 달은 지구를 기쁘게 하기 위해 그 주위를 하릴없이 맴도는 게 아니야. 설령 달이 지구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해도 달은 그를 기쁘게 하는 것엔 토끼 똥만큼도 관심이 없다고. 존재 자체로 인정받는 것은 모든 별의 권리이자 사명이야."




이러한 투쟁을 모두 '사춘기'라는 것으로 통칭할 수 있을 것인가?

얼마 전, 10살 딸내미가 있는 동료에게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애니 존≫을 선물했다. 이 책은 사춘기 반항심과 부모로의 독립, 성장의 내밀한 심리를 다루고 있다. ≪애니 존≫의 한국어 번역본을 출간한 출판사 문학동네는 이 책에 대해 '서인도제도의 앤티가섬에서 나고 자란 애니가 사춘기를 통과하며 부모에게서 자립하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로 이젠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부모의 불가사의한 요구가 더해진, 성장이라는 사건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아이의 혼란을 강렬한 언어와 생동감 있는 이미지로 포착했다.'라고 설명한다. 진실로 싱클레어의 시야의 확장, 애니의 부모에게서의 자립, 그리고 ≪Un autre ailleurs≫ 화자의 고독과 우울의 직시를 모두 '사춘기'라는 하나의 말로 어긋매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사춘기의 끝은 어디라고 정의해야 할까? 사실은 사춘기는 인생 번뇌의 시작점은 아닐까? 유별난 시기가 아니라 사실은 그 '유별'이라는 게 시작되는 시기, 자신만의 고뇌가,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이 개막되는 시기가 아닐까?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이, 애니에게 그웬, 레드걸, 힐러린, 그리고 엄마가, ≪Un autre ailleurs≫ 화자에게는 빈센트가 그 시작점을 함께 했다.



나는 가능한 한 당신의 모든 말에 주의 깊게 귀 기울이며, 당신이 있어 나만큼은 진리를 찾아 헤맬 일이 없겠노라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모든 문제에 관한 모든 해답을 가진 듯했으니까요.

(중략) 사춘기를 관통하던 작은 영혼이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든 것만큼 중요하고 또 고귀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트리거

하지만 앞서 말했듯, ≪Un autre ailleurs≫의 화자에게 유별의 시작을 알린 트리거는 다름 아닌 '죽음'이었다. 단순히 육체적, 정신적 변화나 부모와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관계의 영원한 끊어짐'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심도는 스스로도 모를 만큼 암흑이다. 나는 누군가를 잃었을 때의 감각을 안다. 이를 안다면 유별이 시작되는 시기에 얼마나 치명적이었을지 가늠할 있으리라. 다만 그때의 내 감각을 안다고 한들, 당장 암흑을 직시하고 있는 타인의 자극과 반응의 정도는 길이 없다.



결국엔 그렇게 다들 쉼 없이 일렁이는 마음의 높고도 낮음을 구경하다, 저도 모르게 삽시간에 집어삼켜지는 게 아닐까요?

(중략) 그리움은 저물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무는 것은 힘없는 추억입니다.



산 사람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산 사람은 다시 살아가는 겁니다. 처음부터. 완벽히 다른 세상에서.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는 지독한 전제하에 말입니다.




소의

무심한 듯 살리는 행위를 하는 이들이 있다. 감사의 표상이자 선망의 대상이다. 건조하게 내뱉는 말에 촉촉한 무지개가 피어오른다. 잃어버릴 것들을 흘러가도록 보낼 용기를 준다.



소의와 나누는 아침은 새벽의 강처럼 한적합니다. 어두우나 평온합니다. 그 한적함 속에서 당신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커먼 물살 아래로 이것저것을 떨어뜨리게 됩니다. 그게 뭐가 되었든 다신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어쩌면 일찌감치 잃어버렸어야 하는 것들일지도 모릅니다. 이미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렸어야 했을 것들.




화자는 언젠가 괜찮아질 거다. 어떤 이유로든 유별은 시작되었고, 슬픔을 굳게 다질 때 멀리 간 상대도 웃을 수 있으리란 걸 알게 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빈센트라는 무존재의 대상을 인지했고 끝없이 의존만 할 수는 없다는 걸 바로 보고 있다. 깜깜한 암흑을 깨고 너무 밝아 아픈 눈을 비비며 빛에 직면하고 있다. 마침내.





"해당 도서는 독립출판물 온라인 서점 인디펍으로부터 서평 작성을 위해 무상으로 제공받았습니다."

https://indiepub.kr/product/un-autre-ailleurs/6202/category/31/display/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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