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백 희곡 '다섯'
등장인물들은 가,나,다,라,마. 총 ‘다섯’, 신탐라국을 향해 항해하는 배에 탔다. 정확히는 창고에 숨어 탔다. 그래서 경보음과 경보등이 울리면 재빨리 통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긴다. 문득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의 존재를 알아차리진 않았을까 걱정을 하며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며 글은 전개된다. 여기서 경보음과 경보등은 이들에게 생존이 달린 중요한 신호이다. 이 신호를 무시한다는 것은 기존의 질서에 반하는 것이며 어기면 각자의 생사를 위협받는 강제력이 있다.
흥미로웠던 것은 ‘마’의 존재이다. ‘가,나,다.라’가 여러 방안을 제시하고 두려워하고 온갖 호들갑을 떠는 동안 ‘마’는 날개짓을 한다든지 통을몇번씩 두드린다는지 알 수 없는 몸짓을 보낸다. 말은 일절 하지 않는다. 나머지 사람들과 소통이 될리 없다. 다들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 없다. 그런‘마’조차 경보음,경보등이 울리면 통안으로 들어가고 마는게 질서에 수긍하는 것이고 결국 살아야 함은 본능이다. 이 작품에도 나와있듯이 말이다.
나 : 아름다울지도 몰라요.물고기가 헤엄치고,
수초도 자라고,어린 고래의 예쁘고 순진한 눈동자를 볼 수 있을거야.
하지만 죽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지만 이 질서를 거스르려는 사람이 생긴다. 정어리 사건을 계기로 ‘마’에 대한 마음이 커진 ‘라’는 모두에게 경보음이 울리면 통에 들어가지 않고 소리를 지르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그렇게 되면 선장 앞에 끌려갈 것이고 태양이라도 주겠다고 한다. ‘라’의 고백에 ‘마’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반응을 보낸다.
결말에 이르러 라는 다른 통들에 기웃거리다가 소리지를 용기를 내지 못한다. ‘라’의 통에 들어가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는다. 결국 다시 정어리가 들어있는 자신의 통 안으로 비굴하게 들어가고 만다. 경보음이 멈추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통안에서 나온다. 하지만 ‘라’는 나오지 못한다. 과연 경보음이 울릴 당시 ‘라’가 갑작스럽게 느낀 두려움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죽음의 공포는 수치심 보다 강렬한 것일까? 질서에 강제력에 순응하는 것은 생을 보장해준다. 그것이 무엇이든, 정어리가 든 통에 계속 있는 것 이라 해도.
죽음 뒤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과 공포심을 준다. 그 누구에게도 예외는 없을 것이다. 특히 모든 게 의문 투성이인 상황에서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때 우리는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에게서 눈을 가리게 하는 방법이 있다. 바로 ‘희망’이다. 그게 헛된 희망이라도 말이다. 희망이 있기에, 이상이 있기에 우리는 잠시나마 용감 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