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바리스타 P의 우주
P가 일을 그만둔 지 3년째 되는 날이었다.
이제 슬슬 다시 해야 하지 않겠어 나의 말에 P는 뚱한 표정으로 말이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직업을 가진 그가. 고등학교 시절은 프로게이머로 살아온 그가. 늘 원하는 것이 있었으며 그것을 할 수 있는 재능과 능력이 있었던 그가 뚱한 몇 년이 아리송했다.
늘 글을 써 온 나는 이제 막 드라마 입봉을 준비하는 시기였고 P의 시간이 아까워 그에게 송곳같은 말을 하곤 했다. 그의 뚱한 시간이 회의와 상처로 인해 생긴 것을 알면서도 3년이 넘는 것은 그만하면 되지 않았어 채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P를 알아 온 지 10년이 넘었으니 그의 생각을 온전히 알수는 없어도 그가 조용히 더 깊어지고 있음은 알 수 있었다.
좋아하는 것을 미워하고 다시 사랑하는 일은 나 역시 충분히 아는 마음이었으니까.
그래서 몇 년을 뚱한 P의 얼굴을 보자니 안쓰럽고 일면 답답했다.
지나칠 정도로 조용한 완벽주의를 가진 그가 속상했다. 나라면 안 그럴텐데. (그건 P도 마찬가지였다. 고집스러운 나를 보며 P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정말로 그가 가진 재능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P는 늘 우수한 평가를 받았고 본질에 가까운 것을 빠르게 캐치했으며 맛에 있어서는 최고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늘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없음에 힘들어했다. 그렇다고해서 포기하진 않았지만 그로 인해 돌아온 수모와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는 지난 3년 동안 자신이 겪은 수모와 수난을 조용히 치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재촉하고 싶었다. 상처는 치유로만 낫지 않으니 지난 날 나의 상처가 여기에 있었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날을 만들고 싶었다. 결국 P를 움직일 말이 필요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언어를 총동원해도 그를 동하게 할 순 없었다. 우리는 늘 함께였으나 일에 관해서는 다른 우주에 살고 있었으니까.
P는 오로지 재능이 전부인 세계를 이미 10대에 겪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최고가 되기 위해 젊은 날의 힘과 재능을 모두 쏟고 그 기쁨을 맛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후 찾아오는 허무가 선수 생명이 다한 후 찾아오는 지극히 당연한 신체의 변화가 지금의 우주를 만들었다.
조용하지만 꼭 완벽해야 했으며 자신의 완벽주의를 참지 않았고 늘 사람들과 조용히 차갑게 부딪혔다.
새하얗게 차가운 냉기로 가득한 것이 그의 우주였다. 사람들은 그곳이 차다고 했지만 그는 그곳에서 단 한번도 춥다고 느낀 적이 없이 혼자였다. 쉽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으며 그의 이야기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도 자신을 보고도 환대하지 않는 그에게 조금은 실망했으리. P는 그들을 위한 예쁘고 귀한 것과 완벽한 인사를 고르고 있었을 텐데.. 나는 P의 우주에서 그가 키우고 있는 아름다운 꽃밭을 본 유일한 목격자였다.
그래서 이것을 내다가 팔자 아니면 사람들을 초대해보는 건 어때 같이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들뜨며 말했다. 그러나 그는 꼭 보여주기 위해서 가꾸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럼 무슨 의미가 있어라고 쏘아붙이는 나의 말에 P는 다시 말이 없었다. 그의 말이 모두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준비해주고 싶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니까. 이 정도로도 사람들은 좋아할 걸. 나는 지금도 좋아. 봐봐 엄청 예쁘잖아.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눈 하나 꿈쩍 안 하는 그가 야속해서 그러면 난 다 봤으니까 이제 지겨워 재미없어 다른 건 더 없어 모진 말로 P를 자극했다.
나의 우주는 늘 재밌는 걸로 가득했고 원하는 것은 다 해봐야 직성이 풀렸으며 좋아하는 것은 반드시 다 분해해 내 손으로 다시 만드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었다. 사람들과 늘 함께 하고싶은 마음이 있었고 내가 가진 것을 다 보이며 속없이 이야기를 하고 늘 시끌벅적인 상태였으니까. 미숙함의 아름다움이라든가 부족함의 겸연쩍음도 앳됨으로 사랑받을 수 있었으니까. 반짝이는 작은 재능으로도 주목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그의 조용한 완벽함이 또다른 반짝임을 가진 보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쏘아붙였다.
P는 꼭 고집을 부리지. 아주 천하태평이야. 그럼 여기서 이러지 말고 네 커피를 해 걱정 섞인 비아냥이 그를 아프게 만들었음에도 나 역시 그를 채근했다. 그러자 P는 제대로 말을 해보겠다는 듯 나를 봤다. 네가 하는 일과는 다른 점이 있는 거야. 그의 말에 나는 뭐가 얼마나라고 말했다. 나는 너처럼 지켜봐주는 사람들을 가진 게 아니야. 나의 커피를 돈을 주고 사 먹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거라고. 나는 제대로 된 걸 만드는 사람이야. 나는 제대로 된 게 아니면 팔기가 싫어. 그런 걸 하기가 싫어. 내가 좋아하는 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맛으로 내가 잘하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기구와 머신으로 내가 좋아하는 블렌드로 커피를 만들고 싶어 그렇다고 해서 자의식이나 에고를 드러내겠다는 게 아냐. 많은 것을 걷어내고 본질에 가까워져 순수해진 것. 단순해진 것을. 심플해진 것을 이제 온전히 사랑받으면서 하고 싶어. P의 뚱한 얼굴이 열받은 듯 조금 달아올랐다.
예쓰. 성공이다.
나는 3년동안 숨겨 둔 P의 속을 듣고 싶었다. 그래. P가 원하는 것. 어린 직업을 그만둔 스무 살. 그 후로 아주 오랫동안 바리스타로 살아온 그. 자신이 원하는 것과 자신이 소속된 곳에서 특출나지만 아웃사이더로 외로웠던 그는. 그래서 더 헌신적이었던 P는 머신의 테크니션과 에스프레소를 내리는 일을 사랑했다. 나는 일을 하며 모든 것을 소진해버려 병원에 입원한 P를 보고 펑펑 울었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을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미워하고 다시 사랑하는 과정 중에 있으리 나는 그즈음 P가 어피셔나도를 구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