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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ficionado 어피셔나도 Jul 07. 2024

단편소설 - 피 와 당

- 2014년 카페문학상 가작, 단편소설집 중에서

                                                 

공장 안은 시끄럽고 요란한 기계 소리들로 가득했다. 하얗게 녹은 설탕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자 그 두꺼운 막을 뚫고 나오느라 애쓴 도넛이 반짝거렸다. 몇 명은 포장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또 몇 명은 다시 설탕을 녹였다. 시곗바늘이 새벽 5시를 향해도 사람들의 손은 여전히 분주했다. 설탕을 붓고 뽀얗게 일어나는 분에 시야가 흐려졌다. 눈물에 희뿌연 막이 씻기자 갓 만든 도넛을 입 안에 욱여넣던 남자가 소리쳤다.


“은수! 설탕 좀 더 가져와” 


아무리 발걸음을 빠르게 움직여도 창고로 가는 길은 찐득거렸다. 바닥이 발을 잡아끄는 느낌. 발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단내가 진동을 했다. 코를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마비되는 것 같은 기분. 이상한 감각이었다. 창고로 들어서자 퀴퀴한 먼지 냄새와 설탕의 몽롱한 단내가 났다. 위압적으로 쌓아 올린 설탕 포대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사다리를 두고 올라가 포대 자루를 아래로 던졌다. 


‘퍽퍽’ 하는 소리와 함께 종이가 찢어지면서 설탕이 쏟아졌다. 새하얀 알갱이들이 무덤을 쌓았다. 저 많은 설탕을 누가 다 먹을까 생각하니 우스운 생각이 들며 석기가 생각났다. 그 녀석이라면 피 대신 온몸에 설탕물이 흐르고 있으니 저 설탕을 모두 다 씹어 먹을 것 같았다. 생각을 멈추고 사다리에서 내려와 삽으로 설탕을 푸기 시작했다. 단내에 취해 정신없이 삽질을 하는데 물컹한 것이 삽 끝에 걸렸다. 본 적 없는 시체를 만진 것 같은 불쾌한 감각.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몇 번을 더 찔러보아도 물컹한 느낌은 그대로였다. 온몸에 털이 쭈뼛 서고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뭘까 부스스 스러지는 가루들 사이로 물컹한 것이라니! 그대로 삽을 빼고 설탕무덤을 휘적거리자 댕강 잘린 팔이 보였다. 파리하게 색을 잃은 사람의 팔이 설탕무덤에 박혀 있었다. 숨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꺄악!!!!!!!!!!!!!!”


몸을 웅크리고 소리를 질러대자 비명을 들은 사람들이 몰려와 둥그렇게 에워쌌다. 설탕무덤에 박힌 팔이 손을 턱 하고 내 밀고 있었다. 덜덜 떨며 손짓했지만 모두들 조용했다. 그 누구도 소리를 지르지도 주저앉지도 않았다. 정신 나간 것을 다 봤다는 눈과 마주치자 고개를 돌려 설탕무덤을 보았다. 설탕무덤 위 댕강 잘린 팔은 보이지 않고 죽은 쥐와 바퀴벌레만이 가득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 내게 팔을 뻗어 손을 내밀던 것이 저기에 박혀 있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어진 것이다. 석기의 팔이었던가. 석기의 손이었던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똑똑히 봤으니 생각을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사람들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하나 둘 창고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남자가 들어와 소리쳤다. 


“이은수! 정신 안 차려? 이따위로 창고 관리를 해? 당장 폐기시키고 청소해! 뭐 해! 빨리 치워!”


석기의 팔. 아니. 물컹한 감각이 아직 남았는데 바로 집어 들어 만져 볼 걸. 분명 팔이라면 석기 팔이었다. 정신없이 설탕무덤을 헤치자 벌레가 우수수 쏟아졌다. 나가다 말고 구경하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그러자 머리 위로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남자가 물통을 가져와 그대로 부어 버린 것이다. 새하얀 설탕이 모두 녹아버리고 바퀴벌레와 죽은 쥐만이 바닥에 가득했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더러운 창고 안 물에 젖은 꼴을 비웃었다. 


순간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모조리 쏟아낼 것 같아 창고를 뛰쳐나갔다. 그러자 또다시 찐득한 것이 발을 잡아끌었다. 발, 종아리, 다리에 힘을 주고 발을 떼도 더디게 느껴졌다. 저 문으로 나가야 하는데 뛰어가야 하는데 발이 무거웠다. 악착같이 달려가 마지막 문을 열자 네온사인 불빛이 어지러운 번화가가 보였다. 


새벽 공기에 속을 게워 버렸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몽롱한 기분에 그대로 구겨졌다. 눈도 시리고 코도 시큰한 것이 눈물 콧물이 줄줄 흘렀다. 위생모와 장갑을 벗어 눈물 콧물을 닦고 번화가를 보았다. 화려한 불빛. 시끄러운 음악. 전혀 다른 세상 같았다. 두꺼운 문을 두고 이렇게나 다른 모습이었나 생각했다. 지난 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건 석기뿐이었다. 생각도 잠시 젖은 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몸을 웅크리고 시끄러운 번화가 소리에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설탕무덤 속 팔을 생각했다. 석기의 팔이었을까? 크고 흰 손이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는데 정말 나만 본 것인가? 가짜였을까? 


내 목숨을 담보로 빌고 빈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일까? 어지러운 생각이 가득했다. 그대로 눈을 감은 채로 숨을 쉬었다. 몸속에 남아 있던 단내가 올라와 몇 번의 기침을 더 했다. 단내가 사라지자 정신이 아득하고 피로감이 몰려왔다. 이 몸뚱이도 당에 중독된 것이 분명했다. 사람들은 극도의 흥분과 피로감을 해소하기 위해 많은 당을 섭취하고 그것에 의존했다. 


공장에서 만드는 도넛은 일종의 각성제였다. 최고의 수치의 당과 화학성분으로 이루어진 이 간식이 도시 곳곳에 배달되고 있었다. 각자의 사정이 있지만 이곳에 남은 이유가 있었다. 석기 때문이었다. 죽은 석기를 기억하기 위해 만나기 위해 그런데 그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럴 때면 온몸에 피 대신 당이 흐르는 상상을 했다. 아득한 안갯속 멀리 보고 싶었던 석기가 서 있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그때의 모습으로 나에게 오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당이 퍼져 나가면 영원한 기쁨에 몸이 썩어 가는지도 모르고 심장이 멎는지도 모른 채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어딘가 당에 취해 중얼거리는 헛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몰려오는 피로감에 힘이 빠지고 소음이 아득하게 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바로 앞에서 단내가 났다. 몽롱한 달콤함이 몸에 퍼지자 기운이 돌았다. 내 앞에서 숨을 후후 하고 내뱉는 건 석기뿐이다. 사탕을 오독오독 깨물며 씹는 소리. 단내 나는 뜨거운 날숨. 눈을 뜨자 양손에 음료를 들고 마주 보며 쪼그려 앉은 석기가 보였다. 뭐야. 여기 천국이야? 아니지 석기는 그 가족의 말처럼 천국에 갈 수 없다. 주위를 둘러보자 그대로였다. 석기를 올려다보았다. 개구쟁이 같은 표정. 분명 석기였다. 


“안에서 쉬라니까. 여기 미친 새끼들 천지인데. 위험하게 나와 있어 몇 시야? 퇴근인가?”


“다섯 시. 그게 다 뭐야?”


얼른 대답을 하고 석기를 보았다. 석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대로 내 앞에 앉은 채로 말을 했다. 얼마나 그려온 석기인가? 영원히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석기가 지금 내 앞에 있다.


“아니.. 속이 느끼하잖아. 하도 단것만 만들어 대니까. 저긴 공기도 달잖아. 마실래?”


석기가 음료수를 따주려다 무리인 듯 양손을 내밀었다. 석기가 가까이 다가오자 손을 뻗어 안고 싶었다. 그런데 그대로 바스러져 사라지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질 수가 없었다. 석기가 왜 그래 하며 몇 번을 물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바스러져 사라진 대도 이대로 보낼 수가 없어 그대로 입을 맞췄다. 석기는 양손을 움직일 수 없어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단내가 느껴졌다. 입술에 온기가 느껴졌다. 얼떨떨함이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사라지지 않았다. 석기가 돌아온 것이다. 나의 석기인 것이다. 나는 입을 떼고 석기를 눈앞에 가까이 두고 보았다. 


“너무 달다.”


“달아? 나 사탕 하나 밖에 안 먹었는데.” 


석기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 믿기지 않지만 꿈이라면 절대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죽겠다... 집에 가고 싶어”


지금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누군가 석기를 본다면 발견한다면 설탕처럼 녹아 사라질 것 같았다. 나는 이 현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생각할 시간도 마음도 여유도 없었다. 이 세상에 어딘가에 신이 있다면 내 목숨을 몇 번이고 팔아서라도 감사한 것이었다.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방금 전 석기가 온 것이다. 급한 마음에 정신없이 일어서느라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러자 석기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바로 잡았다. 


“그래. 집에 가자. 은수야.”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속으로 계속해서 되뇌었다. 해가 뜨기 전 어둑한 길을 걸으며 해가 뜨면 사라질까? 또다시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석기를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절대 놓지 않고 꽉 쥐고 걸었다. 그러다 다시 손에 힘을 풀었다. 


너무 세게 붙들면 부서질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살아 돌아온 사람. 아니 환영인 사람. 어쩌면 꿈속의 사람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런 방법이란 것도 따로 없었다. 아무도 알려주지도 않았고 책에서 본 적도 없었다.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석기를 바로 옆에 두고도 사라질까 눈물이 났다. 자리에서 멈춰서 석기와 마주 보았다. 눈. 코. 입. 어깨에 시선이 멈췄다. 그리고 다시 팔. 다리. 발을 찬찬히 보았다. 그대로였다. 눈물이 쏟아졌다. 석기를 그대로 안아버리고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펑펑 울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꿈속이었다. 시커먼 새들이 날아들어 쪼아대는 팔을 보았다. 파리해진 채 빛을 잃은 살덩이. 끄억 끄억 울며 팔을 파먹는 새들. 팔은 피범벅이 되었다. 섬뜩한 광경에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하얀 천장. 회색빛 커튼. 석기의 방이었다. 어쩌자고 정신을 잃은 걸까? 그 사이 석기가 사라졌으면 어떡하지 불안감에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아까부터 나는 맛있는 냄새를 따라가자 식탁 위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그것 빼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석기가 없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베란다! 옷방! 화장실! 어디에도 없었다. 꿈이었나 보다. 어디서부터 꿈이고 무슨 짓을 했는지는 차근히 기다려보면 누구든 달려와 알려줄 것이다. 멱살을 잡든 뺨을 치든 어쩌면 석기가 죽은 1년은 이 비슷한 일들의 반복이었다. 


거울 속 푸석한 얼굴을 보자 흉하고 못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이 꼴을 봤을까 손을 비벼 마른세수를 했다. 여태껏 이런 창피한 낯이었다니 다시 손을 비벼 얼굴에 가져다 댔다. 찡해졌지만 이것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욕심을 내면 다시는 못 볼지도 몰라. 만약 또 한 번의 기회가 있다면 그때를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덜컥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석기가 현관에 들어섰다. 다시 돌아온 것일까? 재빨리 현관으로 가 석기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석기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석기를 보자 얼굴이 찢어져 피가 뚝뚝 흘렀다. 석기의 몸에서 피가 쏟아졌다. 손으로 얼굴을 매만지자 손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석기의 얼굴이 그린 듯 번졌다. 완벽하게 환영이었다. 


1년 전 절벽에서 뛰어내린 그 모습으로 온 것이다. 몸이 떨렸다. 이토록 처참하게 망가진 석기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졌다. 부들부들 떠는 석기를 더 꽉 안았다. 


“은수야.. 오늘 면접 몇 시라고 했지..?”


석기는 그날 아침에 했던 모든 것들을 그대로 해주려고 했다. 음식을 준비하고 옷을 챙기고 응원도 잊지 않았다. 내 이마를 짚으며 열을 확인하는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래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다. 놀란 마음을 다스리며 계속해서 되뇌었다. 


“11시까지.”


“아니.. 그래도 뭐라도 먹고 가야 되잖아. 아님 좀 잘래? 아직 시간 좀 있으니까...”


힘겹게 입을 벌려 말하는 석기였다. 무너져 내리며 쓰러지는 석기를 받쳐 들었다. 괜찮아. 괜찮아. 사라지지 않아. 방금 전 감사드린 신에게 잘못을 빌었다. 할 말이 있어요. 욕심이 과했어요. 그리워하지 말 걸.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보여 달라고 빌지 말 걸.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이렇게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 걸. 잘못했어요. 몇 번을 빌고 빌어 바닥으로 쓰러져 내리는 석기를 껴안았다. 절대 놓을 수가 없었다. 석기의 차가운 얼굴을 계속해서 어루만졌다. 그러자 석기가 손을 들어 내 이마를 짚었다.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다시 정신을 잃었다. 뿌연 안개 속이었다. 지독한 환상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다시 보게만 해준다면 내가 죽어서라도 그 어떤 것도 참을 수 있겠다 생각했던 것들이 있었다. 그토록 황망하게 떠난 이유를 듣고 싶어서 마음을 알고 싶어서 빌고 빌었던 이기적인 바람에 결국 죽은 사람까지도 고통 속을 떠돌게 한다면 내가 이 환상에서 벗어나 석기를 놓아주어야만 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앞을 향해 걸으며 석기를 불렀다. 이렇게 부르고 외친다면 석기는 다시 나타날 것이다. 어디선가 단내를 풍기며 올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는데 발을 헛디디자 흙이 무너지면서 미끄러졌다. 끝도 없이 쓸려 내려가면서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나뭇가지에 매달렸다. 


절벽 끝이었다. 그때서야 안개가 걷히고 발아래 까마득하게 높은 절벽이 보였다. 나뭇가지를 잡은 손에 악착같이 힘이 들어갔다. 살겠다고 지금 여기서는 아니라고 버둥거렸다. 석기를 다시 보기 전까지. 여기서 끝낼 수 없었다. 


그때 시커먼 새의 울음이 들렸다. 점점 소리가 크게 들리며 먹잇감을 향해 돌진하듯 단숨에 머리 위로 날아왔다. 꿈에서 본 검은 새였다. 손이 미끄러져 저 아래로 떨어진다면 당장이라도 저 새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악착같이 손에 힘을 주고 버티자 끄억 끄억 울음이 커졌다. 


비열했다. 죽은 시체만을 파먹는 더러운 것이 산 사람이 언제 떨어져 죽을까 쳐다보는 것이. 석기도 이곳에 이렇게 매달렸을까? 살고 싶다고 마지막 순간까지 외쳤을까? 아무런 미련도 아쉬움도 그대로 뛰어내렸을까? 이 순간에도 절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살고자 하는 두려움을 거스를 수 없는데 석기는 다 잊어버리고 절벽 아래로 뛰어든 것일까? 나는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이 그저 살고 싶었다. 그리워하는 이를 다시 만나기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고 했던 다짐들이 산산조각이 났다. 처참함에 눈물이 났다. 오만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절벽 아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구덩이 같았다. 얼마나 많은 이들을 집어삼켰을까? 석기에게는 향긋한 꽃밭으로 시원한 바다로 새하얀 눈밭으로 그 어떤 것으로 변모해 꼬여냈을까? 


힘을 크게 쉬고 손에 힘을 풀었다. 끄억 끄억 울며 머리 위를 날던 검은 새가 절벽 아래로 빠르게 내려갔다. 나를 파먹기 위해 저 밑으로 가는 것이다. 결국 석기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이유도 듣지 못한 채 환상에서 깨어나면 이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무슨 마음이었는지 어떤 슬픔이었는지 절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비참했다. 나는 완전히 손을 풀고 저 아래로 떨어졌다. 


아주 높은 절벽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몸을 뚫고 지나갔다. 온몸이 찢어지고 날카로운 칼에 베인 것처럼 시린 느낌이었다. 절벽 아래로 계속해서 떨어지는데 단내가 퍼졌다. 시커먼 구덩이가 푸른 초원으로 변했다. 다시 보자 사막이었다. 그리고 빙하 같았다. 쉴 새 없이 빠르게 변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뜬 것은 낡은 간이침대였다. 낯선 남자가 커튼을 젖히고 들어와 팔에 꽂은 주사 바늘을 뽑았다. 잠시 현실이 구분이 되지 않았다. 여기가 어딘지 여기서 무엇을 했는지 멍한 표정을 하자 남자가 뺨을 세게 쳤다. 맞네. 꿈. 무슨 짓을 했구나.


“정신 차려. 정신 안 차려! 다 끝났어! 나가! 가라고”


남자가 가방을 집어던지며 침대에서 끌어냈다. 주삿바늘이 꽂혀있던 팔이 시큰거렸다. 가방을 안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운 창고 안, 수 십 개의 간이침대 위에 사람들이 주삿바늘을 꽂고 누워 있었다. 몇 명은 오열하기도 했고 몇 명은 신이 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좁은 통로를 지나 문으로 향했다. 창고 안에 단내가 진동을 했다. 문 옆에 있는 데스크에서 화려한 차림의 여자가 손짓했다.


“어머 세상에... 은수 씨 울었어요? 오늘은 어떻게 이야기를 좀 많이 했어요? 자주 와요 그래야.. 음 석기 씨? 석기 씨라고 했죠? 그래야 자주 만나지.. 잊어버리면 얼마나 슬퍼하겠어요. 여기 사람들 다 욕하면 안 돼요. 사랑하는 사람 못 잊어서 그러는 건데 누가 뭐라 그래요? 그렇죠? 오늘은 꽤 많이 썼네요. 돈은 좀 들어도 이건 가치를 매길 수가 없어요. 우리는 마약도 아니고 안전하니까. 그냥 몸속에 피 대신에 잠깐 당이 돈다 생각하면 돼요. 쉽죠? 조심히 가고 또 와요!”


여자의 말에 눈물범벅 인 채로 끄덕끄덕. 문을 열었다. 그러자 여자가 남자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 잠깐만 여기! 여기!! 좀 봐 봐요”


순식간에 남자가 입에 도넛을 욱여넣었다. 


“으응. 그거 선물. 꼭꼭 씹어 먹고 가요. 그럼 오늘 밤. 꿈에 잠깐 만날 거야! 또 와요!”


남자가 열어 준 문을 따라 네온사인 불빛이 어지러운 번화가로 나섰다. 환상과 현실이 뒤섞여 어지러웠다. 시큰거리는 팔을 보자 주삿바늘이 팔 전체에 흉으로 남아 있었고 석기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워하는 일을 멈출 수 없는 건 그 가족이 말하던 석기가 간다던 지옥이었다. 죽음으로 끝이 나면 다시는 그리워할 수도 없으니 이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고통이었다.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다. 계속해서 되뇌었다. 석기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워하는 한 언제고 나타날 것이다. 도시에 단내가 진동을 했다. 멀리서 공장 소리가 들린다. 도넛을 우걱우걱 씹어 먹으며 도시로 향했다. 꿈에서 또다시 석기를 만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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