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벗어나고 있다는 증거
이혼 서류를 정리한 지 벌써 한 달. 변호사를 통해 처리하니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났다. 전남편에 대한 미련은 정말이지, 단 한 줌도 남지 않았다. 아이는 쑥쑥 자라고 있고, 나는 너무도 피곤하다. 후회할 새도, 과거를 되씹을 틈도 없었다.
잡생각이 많을 땐 운동을 하랬던가. 그 말은 진짜 맞았다. 땀을 흘리다 보면 마음속에 끈적하게 남아 있던 감정들도 함께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곤 한다. 요즘 나는 두 개의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하나는 동네 한부모 모임, 다른 하나는 동네 독서모임이다.
한부모 모임에 나가 보니, 생각보다 많은 한부모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생각보다 나쁜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양육비를 못 받는 엄마들, 연락 두절된 아빠들, 이미 다른 연애를 시작한 누군가들. 그리고 그 속에서, ‘한부모도 연애를 하더라’는 현실도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어린 아이가 있어서, 낮 시간에 이뤄지는 활동엔 참여가 어려웠다. 자연스레 밤 시간에 열리는 독서모임이 나의 중심이 되었다.
그 모임에서 나는 처음으로, 진심으로 놀랐다. 따뜻한 말투, 배려심 있는 태도,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조심스레 자신의 생각을 나누는 사람들. 내가 전남편에게서 느껴보지 못한 것들이 거기에 있었다. 말의 온도, 생각의 깊이, 삶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어느 순간, 한 사람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책임감 있고 조용하지만 중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책을 읽고 삶을 나누는 이 소소한 모임을 이끌어가는 그가, 나는 참 궁금해졌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이런 시선을 가질 수 있을까?
점점 더 그가 궁금해졌고, 그의 SNS와 블로그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의 생각과 태도에 공감이 커졌고, 나도 모르게 자주 방문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계정이 비공개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당황스러웠다. 들킨 것도 아닌데 들킨 기분. 염탐하려는 마음은 아니었지만, 상대가 불편함을 느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피했고, 서러웠고,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비록 큰 마음은 아닐지언정 나보다 나이도 어린 총각을, 애까지 있는 이혼한 내가 감히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 갑자기 너무도 부끄럽게 다가왔다. 엄마를 부르며 울어대는 아이를 보며 다시 현실감이 밀려들었다. 아가씨 때도 쉽지 않았던 연애를, 지금 이 시점에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순간, 내가 너무 오만했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재혼을 꿈꾸고 있었다. 배려심 많고 다정한 사람과, 신뢰와 헌신이 깃든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갈망이 내 안에 분명히 있었다.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확실히 느끼는 것은 있다.
나는 지금, 괴로웠던 결혼생활로부터 점점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