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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환 Dec 22. 2024

동그라미

 

주말에 할아버지와 지내고 싶어 하는 손주가 왔다 이제 막 돌아갔다. 지난주에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후 연말 가족 외식이 겹쳐 집 밥이 먹고 싶다며, 집 밥은 언제 먹느냐며 할아버지 집에 온 손주와 놀다 보니 주말이 즐겁기만 했다. 갑자기 조용한 집 안엔 가끔 의자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오후다. 그 조용한 시간 속에서 엊그제 그녀와의 통화가 문득 떠오른다. 통화가 끝난 후, 마음이 한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평소에도 그저 편하게 느꼈던 친구였는데, 이런 적이 없었던 그런 사람인데, 왜 그날 이후로 자꾸만 머릿속을 맴도는 걸까?

 

나는 대화 중에 정제되지 않은 말을 했던 것 같다. 어쩌면 솔직한 감정을 전달하는 데는 말이 더 효과적일 수 있겠다. 하지만 말이라는 것은 글과 다르게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섞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나는 내 감정과 정확하게 마주하고 싶을 때 주로 글로 표현하는 편이다. 이 글도 그런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사람이 자꾸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신경이 쓰인다.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이 감정, 도대체 뭐지?"라는 물음에서.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낮고, 오랫동안 참아온 듯한 그녀의 울음소리와 서러움을 토해내는 절제된 대화가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돈다. 그간 함께 했던 모든 시간들이 필름처럼 되감겨 스쳐 지나가며, 그녀의 말투, 웃음소리, 특유의 제스처와 사진을 찍을 때의 동작, 짤막한 대화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순간들이 이상하게도 따뜻하게 느껴진다. 이런 감정이 오랜만이라 더 낯설고, 그래서 더 붙잡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지도 모른다.

 

사실, 나이가 들면서 이런 감정을 더 이상 느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살아온 시간이 쌓이면서 책임과 현실의 무게가 감정보다 앞서는 일이 많았다. 그전 같으면 쉽게 결정할 간단한 일도 두세 번씩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엊그제 그 통화 이후로는 감정이 이렇게 묵직하고 부드럽게 스며들 수 있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다.

 

이 글을 당신에게 직접 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마음에 담아두기엔 나 자신에게도 불편할 것 같아서 이렇게 글로라도 남겨본다. 당신과 통화할 때, 나는 그냥 나 자신을 그대로 드러냈던 것 같다.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변명할 일이 아니었으니, 있는 그대로 느껴지는 그대로 내 감정을 말했다. 대화가 거듭되면서 위로도 해주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간 함께 해왔던 친구라 여겼던 사람들과의 믿음이 유리처럼 쉽게 깨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내가 그동안 노력하고 헌신한 것이 너무 값싼 취급을 받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고, 알 수 없는 상실감도 밀려왔다. 함께 이만 보를 걷고 삼만 보를 걸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고, 함께 산천경계 좋은 풍경을 찾아 유람을 하고, 혀가 즐거운 맛있는 음식을 먹은 들 그 무슨 속 빈 강정 같은 공허함이란 말인가? 결국 ‘함께 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고 서로의 존재가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안타까움과 현실에 놓인 상황이 손에 움켜쥔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듯했다. 여행 중에도 이런 마음 때문에 나 자신을 추슬러야 했는데, 내가 왜 이런 심적인 부담을 여행까지 와서 느껴야 하고, 왜 그런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해야 하는지, 끝도 없이 밀려오는 자괴감을 눌러 앉혀야 했다. 이러한 상황이 혹 나의 잘못에 있지 않을까? 되돌아보며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여행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편으론 공감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마음에 담긴 묵직한 돌을 들추어낸 것만 같아, 내 마음도 무겁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편안함을 느낀다면, 백 번이라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내게 보여준 편안함이 고맙기도 했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게 무척 새로웠다는 느낌이 더 컸다. 내 감정선에 미묘한 변화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나이가 들었다. 나이가 먹었다는 얘기는 슬프지만, 동시에 현실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는 서로를 받아들이기엔 너무 많은 현실적인 문제와 벽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 자신도, 당신도 각자 살아온 길 위에 많은 흔적을 남기며, 여전히 그 길을 걷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있는 시간에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괜찮겠지?’라고 혼잣말을 하며 계속 신경 쓰이는 일이 낯설기만 하다. 무엇 때문일까? 아직은 뭐라 단정 지을 수도 없고,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답을 내리기 어렵지만, 그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마주하기 쉽지 않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이 감정을 지켜보려고 한다. 일시적인 감정이라면 결국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것 역시 내가 마주해야 할 진실일 것이다. 다만 지금은 그저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무엇이든 혼자 견디지 않기를,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어떤 순간에도 외롭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점점 커져간다. '늘', '항상', '잘하는' 같은 수식어에 자신을 가두어 두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솔직한 심정이다. 

 

나는 10여 년 전 대장암 수술을 받은 후, 그리고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낸 후 인생관에 변화가 생겼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다음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통화 중에도 이야기했지만, 나나 그녀나 이제 그리 많은 시간이 남아있지 않다. 삶에서 제삼자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가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자신을 최고로 존중하기를 바란다. 누가 뭐라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자신이 중심이 되어 돌아가는 세계에서 살기를 바란다. 

 

혹여 이 글이 당신에게 전해진다면, 내 마음을 가볍게 받아들여주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무언가를 의도하거나 관계를 바꾸려는 것도 아니고, 당장 무엇을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나 스스로의 감정을 솔직히 마주하며, 당신에게 고마움과 안타까움, 걱정스러움, 그리고 혼자 견디지 않기를 바라는 작은 바람을 글로 남기고 싶었을 뿐이다.

 

당신이 나에게 그랬듯, 나도 당신에게 따뜻한 사람이었으면 한다.

@thebcstory

#감정 #진실 #사람 #관계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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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세상도 그렇고 사람과의 관계도 동그라미 같았으면 좋겠다. 이 글은 다른 사람들이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랍에만 넣어 둘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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