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결에 한 소린지 모르겠지만, 우산을 가져가라는 목소리에 현관 앞에 놓인 긴 투명 우산을 하나 챙겼다.
누나는 숟가락을 놓으며 창문 밖으로 보이는 흐릿한 날씨를 이야기했다. 나는 챙긴 우산을 보여주고 고맙다는 말을 이으며 잔잔히 대화를 이었다. 밖에서 누나를 만나는 건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내가 대학에 오기 전까진 서로의 존재 정도만 기억하는 무뚝뚝한 남매 관계였고 그건 둘 다 서울에 상경해 같이 자취를 하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리저리 물건을 뒤집어놓은 온기 없는 방, 그리고 가끔 잠에 취해, 술에 취해 얼굴을 묻고 있는 모습이 나에게 더욱 익숙한 누나의 인상이었다. 그래서 같이 쇼핑을 하고 주변의 맛집을 찾으며 흐린 날씨를 걱정하는 오늘의 하루가 나에겐 조금 어색했다.
꾸밈없는 대화를 하기에는 편한 가족이라기보다 어색한 학과 선배였고, 그래서 학교 이야기를 시작했다. 새로 짓는 도서관, 누나가 알만한 학과 선배들, 나이 많은 교수님들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누나는 현장 이야기를 재밌게 시작했다. 첫 취재를 나섰던 이야기. 해외 취재를 나가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하면서 대학 때 여러 활동들을 해보면 도움이 많이 된다는 조언을 덧붙였다. 고등학교 때 가끔 있는 가족들 식사 자리에서 무감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던 이야기였지만, 대학에 들어온 지금, 즐겁게 얘기하는 누나의 표정과 감정들을 조금은 동경하게 되었다. 무엇이든 쉽게 해내던 누나의 그림자 사이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조차 누나에게 뺏겨버린 실상이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텅 빈 표정으로 그림을 그리던 누나가 붓을 내려놓고 달라진 표정을 보고 있으니 그 조차도 쉽게 용서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말문이 트인 우리 둘은 학교생활을 시작으로 간단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이성관계에 대한 이야기, 진로에 대한 고민 등을 이어갔다. 가볍게 시작했던 맥주 한 잔은 두 잔을 넘어섰고, 마지막 잔을 나눠 마실 때쯤 어두워진 창밖과 내리는 비를 피하는 사람들을 보며 천천히 일어설 준비를 했다. 누나는 당연하다는 듯 계산을 했고 나는 조금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투명 우산 위로 작은 물방울들이 내려앉아 이내 형체 없이 흘러내렸다. 점점 쌓이는 빗소리를 흘려들으며 누나가 낸 물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아니라 쏴아하고 쏟아지는 비였다. 지하도 아래로 또각또각 우산을 짚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나는 우산을 다시 펼쳐 들었다. 금방 갔다 온다는 말을 남기고 식당에 두고 온 핸드폰을 찾아 나섰다. 회색, 다홍색의 보도블록들이 금방 어둡게 물들었다. 첨벙첨벙 멀어져 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역에 들어서 우산도 접지 않은 채 멍하니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울에 쏟아지는 소나기 속에서, 어릴 적 빗소리에 새어 나오던 여러 번의 얕은 숨들이 생각이 났다. 6살 무렵이었다. 밤새 내리는 빗소리에 잠겼던 목소리들이 깊은 새벽 속에 섞여 들어왔다. 엄마의 목소리였다. 소리 없는 몇 번의 번개가 이어지던 빗소리를 여러 번 멈춰 세웠다. 낯선 적막이 흘렀다. 무엇 때문인지, 어린 나이임에도 들켜선 안된다는 생각에 발소리를 감췄다. 굳게 닫힌 방문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잔잔히 들리는 빗소리와 어긋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시절 더 넓은 우주에 대해서 생각했었다. 사춘기를 지나며 어른이 돼가면 자연스레 유년기의 울긋불긋한 기억들은 서서히 지워지고 뚜렷이 기억할 수 있는 정교한 기억들만을 써내려 간다고. 나는 초등학교 때 읽었던 그 두 줄짜리 문장에 기대어 이전과는 다르게 밝게 웃음 지으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집이라는 작은 공간이 드넓은 우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학교와 집을 오가는 작은 동네에 나를 놓아두고 깜깜한 어둠 속에서 무한한 빛을 뿜어내는 작은 별들을 바라보며 그저 시간이 지나가길, 저 영원함 속에서 이 찰나에 순간이 어서 지나가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다 흐리게 물든 하늘에 검은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더 좁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아도 감지 않아도 칠흑 같은 어둠 저편 너머로 보이는 작은 불빛들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꽁꽁 이불을 둘러싸고 또 한 번 끝나지 않는 시간이 지나가길 바랐다. 낡은 선풍기가 소용이 없는 그런 여름날이었다.
마지막 잔을 나눠먹으며 망설이며 입을 열었던 한 마디에, 누나는 고개를 돌리고 한두 방울 쏟아지는 비를 응시했다. 같이 집에 한 번 내려갔다 올까. 부정도 긍정도 아닌 무응답이었다.
비가 오던 그날, 소리 없이 치는 번개에 몸을 떨던 누나의 조그만 등을 생각했다.
색이 바랜 노란 우산이 역 안으로 들어왔다. 철사 하나가 힘없이 내려앉아 작은 우산 밖으로 튀어나온 왼쪽 어깨와 검은 크로스백이 다 젖어있었다. 그냥 하나 사지 그랬어. 우산을 터는 누나의 왼쪽 어깨를 손으로 털었다. 작은 등 아래로 어깨를 움푹 누르는 낡은 크로스백이 눈에 들어왔다. 카메라 두 개와 노트북이 든 가방이었다. 하나는 필름 카메라였다. 누나는 가방과 우산을 내려놓고 카메라 하나를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불이 온전하게 들어오지 않는 낡은 전광판이었다. '처방조제'라고 쓰인 약국 간판이 처가 빠져 '방조제'가 되어있었다. 누나는 그것을 보물이나 되는 듯 열심히 찍었다.
다음 주 주말에 괜찮아? 시간 내볼게.
누나는 카메라를 가방에 집어넣으며 이야기했다. 나는 내려놓은 누나의 가방과 우산을 집어 들면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누나의 생일날에, 뭐가 갖고 싶냐는 아빠의 물음에 누나는 mp3라고 대답했다. 쉽게 무엇을 사주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아빠는 다음 날 누나가 말한 mp3를 사 왔다. 라디오 기능이 있는 조그만 화면이 딸린 핑크색 mp3였다. 그때부터 누나는 내가 잠을 못 자는 날이면 귀에 이어폰을 꽂고 라디오를 들려주었다. 나는 재밌는 사연이 나올 때면 그 부분을 어눌한 말투로 다시 이야기했고, 누나는 애써 웃으며 자기도 그 부분이 제일 재밌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천천히 잠에 들었다. 두 귀 양쪽에 하얀 이어폰 줄을 꽂고서.
아직도 난 누나가 낸 물길을 따라 역으로 걸었고, 누나가 나온 중학교 고등학교 지나 또 같은 대학에 들어왔다. 나는 여전히 그 조그만 등을 따라잡지 못했다.
누나와 나는 나란히 역 계단을 내려갔다. 투명 우산이 바닥을 짚으며 물기를 털었다. 떼지 않은 가격텍이 걸음에 맞추어 흔들렸다.